[미지] 스물과 서른

어른은 언제 되는 것인가요?

2023.01.16 | 조회 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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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

 

안녕하세요. 미지입니다. 모두들 새로운 한 해를 환대하고 계신가요? 여러분들이 제 20대의 마지막 달을 따뜻하게 지켜봐 주신 덕분에 저는 무사히 30대에 접어들었어요. 아픈 곳은 없구요. 마음도 안전해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어떤가요? 안녕한가요?

미지와 주연, 두 사람의 흑심을 엿보고자 모여 주신 분들과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워 뭐라도 더 써 보자, 해서 다시 노트북을 켜고 앉게 되었어요. 주연보다 한가한 백수인 제가 먼저 찾아뵙게 되었구, 주연과는 2월부터 다시 무언가를 쓸 예정에 있어요.

그래서 준비한 오늘의 글은, 갓 스물이 된 지형과 갓 서른이 된 미지가 주고받는 편지예요. 최근에 조동희 작사가와 정현우 시인의 『우리가 사랑이라 말하는 것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읽으면서 문득, 아, 편지 쓰고 싶다. 받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던 참에 지형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고, 우리가 잠시 뜸했던 시간 동안 어땠는지, 그리고 저와 다를 지형의 스물은 어떤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서 제안을 했고, 고맙게도 지형이 흔쾌히 받아 주어 2회에 걸쳐 글을 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포근한 새벽 되시기를 바라며!

이만 줄일게요.

총총.

 

 


 

 

언니에게

편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보인다고 생각하니 좀 민망한 부분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쓰겠다고, 써 보겠다고 말했던 기세와는 다르게, 편지를 쓰려고 보니 딱히 내 글에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 독자이기만 했던 사람이라 글을 잘 가꾸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쓰기도 전에 기가 꺾여버렸어. 욕심을 내면 낼수록 문장은 어그러진다는 걸 아는데도 문장은커녕 단어만 썼다, 지웠다 하는 중이야. 선택부터 잘못된 것 같아서. 그래도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니까....... 물론 썰린 무로도 깍두기까지는 못 담겠지만, 무절이기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담아서 써 볼게. 가장 근본에 가까운 마음을.

해가 지나기 전에 수신인이 언니인 편지를 쓴 적이 있어. 메일링 전용 계정을 정리하려고 로그인했을 때, 메일함 상단에 언니 글이 있길래 반사적으로 눌러서 읽었거든. 지난번에 말했던 그 글이었어. 20대 중반에, 우울하지 않아도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내용의. 나와 닮은 사람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발견하다니, 벅찬 마음을 누를 수가 없더라. 글을 사랑하는 10대 중반이던 내가 했던 다짐을 언니도 하고 있었고, 언니가 이루었듯이 나도 스물이 지나고 나서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언니는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지만, 말도 안 되게 엇비슷한 사람이라서, 그래서 언니는 나를 그렇게도 지지해 줬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리고, 언니가 내게 해 준 말을 나도 언니에게 돌려줘야겠다고 결심했었지. 결국 그 편지는 중간까지 쓰다가 울어 버린 통에 마무리도 못 한 채로 서랍 속에 보관하게 되었지만, 이렇게 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흘러가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낀다는 건 이제껏 살아온 나에 대한 위로와 인정이기도 한가 봐. 내게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크지 않아서, 다들 어떤 기분이냐고 물을 때 변한 내 나이나 새해라는 게 달가워야 하는 건가? 싶었어. 나는 오늘과 어제만 가지고 살았으니까. 그냥 사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그걸 몰랐어. 새해를 맞을 때마다 지난해를 어떻게든 살아냈다, 가 아니라 올해도 잘 살아야지, 라고 말해야 했다는 걸. 언니, 나도 내 스물이 기꺼운 것 같아. 언니가 언니의 서른이 기껍다고, 서른이 되기까지의 모든 순간의 언니를 긍정했듯이 나도 이제 나를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제에서 오늘이 되었을 뿐인데, 나를 인정하게 되었을 뿐인데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찼어. 덕분이야. 고마워.

언니의 서른은 여전히 안녕해? 오늘의 기분은 어때? 매일 새로운 감정들이 들끓는다면 정말 근사하겠지만, 어제와 같거나 작년과 같거나, 아니면 더 오래전과 비슷하더라도 괜찮아. 앞으로 채워 갈 서른이 많이 남았잖아. 오늘 언니에게 찾아온 또 다른 언니를 맞이하고, 이해하면 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교수님 중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알면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그 말을 믿어. 언니의 서른과 나의 스물이 자신을 알게 되어서,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듯 스스로를 사랑하게 되는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니, 언니는 계속해서 글을 쓰게 될 거야. 있는 그대로의 언니를 받아들이게 될 거야. 내가 언니의 용기가 되었던 것처럼, 언니가 내 용기가 되어 줘.

단호박이 들어간 팥시루떡을 조금 떼어 먹으면서, 17일의 지형이가

p.s. 애벌레에게는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지형에게

잘 지냈니? 진부한 안부로 편지를 시작해 보려고 해.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을 받고 <미지의 담> 메일링 때 지형이가 참여해 주었던 인터뷰를 다시 읽었어. 그게 벌써 2년 전이더라구. 우리는 해가 두 번 바뀌는 동안 서로를 인지하고 지냈구나.

2년 전 그때를 떠올리면 지형이가 넘치는 생동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어. 활발히 읽고, 보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그랬었지. 나는 그런 너를 보면서 부러움과 위안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아.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에너지에 대한 부러움, 그리고 내가 지형이 나이였던 때에는 나도 지형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위안. 그러니까 나는 너를 아끼는 마음을 통해 선명히 기억하지도 못 하면서 미워하던 나의 과거를 조금은 더 안아 줄 수 있게 된 거야. 나의 열여덟에도 이렇게 빛나던 순간이 손에 꼽을 만큼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열여덟의 네가 주었어.

스물은 어때? 겨우 보름이 지났지만, 열아홉에서 스물이 되는 건 주변의 시선이 극명하게 달라지는 시기잖아. "이제 어른이니까". 작년에 이유운의 시산문집 『변방의 언어로 사랑하며』를 읽었는데, 거기에 내가 겪은 스물과 똑 닮은 문장들이 있었어. [ 인생을 사랑에 자주 팔아넘기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을수록 어른 같다. 어른이 된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19살의 12월 31일은 어린아이인데 20살의 1월 1일은 갑자기 어른이라니. 나는 갑자기 어른이 된 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세상에서 나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나는 너무 거칠었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견디지 못했고 그럴 때는 옆으로 누워서 울었다. 옆으로 누워서 울면 눈꺼풀에 눈물이 들어갔다. 눈꺼풀 안쪽이 아프면 지나치게 슬퍼졌다. 내가 고르지 않은 촌스러운 분홍색 꽃무늬 벽지도, 내가 쓰고 싶지 않았던 이상한 글들도, 읽고 싶지 않았던 사상들도 모두 나만의 비극 같았다. ] 나의 스물은 그랬어. 나는 너무 거칠었고, 그래서 내가 나를 가장 싫어했고, 누구보다 나를 견디지 못했지. 그런데 그때 내가 시를 읽었다면, 감정을 토해 내기 급급한 일기가 아니라 좀 더 정제된 문장을 쓸 줄 알았자면. 무언가 다르지 않았을까? 너의 스물과 나의 스물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해. 나는 그때 아직 알지 못했고, 너는 다시 글을 찾았다는 것.

네가 그랬지. 악기를 그만두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글을 배우고 있다고. 언젠가 다시 글을 쓰게 될 거라고 했던 나의 말이 생각났다구. 나는 미처 기다린 적도 없는 구원을 만난 기분이었어. 나보다 열 살 어린 너에게 이런저런 책을 쥐여 주고, 가끔은 달달한 걸 먹여 주기도 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했듯 너를 마음으로 품었었지. 너에게 해 주는 것을 콕 집은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특히 동생들에게 아끼지 않는 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도 있었어.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러지 말라고, 너에게 더 쓰라고. 그런데 내 생각은 달랐지. 나는 의미 있을 만큼은 나에게도 쓰고 있어. 그 중에 좋은 것들을 타인과 더 나누고 싶어 할 뿐. 가끔은 그런 성정에 스스로 회의감을 느낄 때도 있지만 말이야. 딱 그럴 때에 네 연락을 받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코끝이 매워지고 말았구...... 탁, 하고 숨이 놓이는 느낌이었어. 아, 나는 이대로 나여도 괜찮겠구나. 앞으로도 계속 나로 살아도 되겠구나. 그러니까, 어떤 마음을 참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물론 무얼 바라고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 마음은 어떻게든 열매를 맺는구나.

내 주변에는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리고 나는 지형이도 거기에 속한다고 생각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런 마음을 가진 우리이기 때문에 글을 쓰게 된 것 아닐까? 글은 대상을 사랑할 때 가장 우리의 편이 되어 주니까.

나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던 작은 너를 안아 주고 싶어. 그리고 마침내 네 마음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하게 된 것을 축복해. 나는 너의 스물이 기대가 돼. 네가 나의 서른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십 년이라는 시간은 꼭 은하수가 사이에 놓인 것 같다. 그치? 그럼 우리는 수많은 별들에 둘러싸인 존재들이겠구나. 작지만 빛을 잃지 않는 그 별들을 사랑으로 보듬으며 서로에게로 좁혀지자.

올해도 잘 부탁해.

언니가.

 

 

<흑심; 내가 사랑한 모든 존재들에게>는 선인장도 안아 주는 '미지'와 고양이처럼 나뒹구는 비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주연'이 함께합니다.

· 미지: poem.aboutyou@gmail.com / 마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 주연: micoks2@naver.com / 답장에 답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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