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루아를 부는 날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하나님 안에 속한 자들에게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다. 이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사람이 어떤 자격으로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라합의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라합은 이방인인데다가 창녀였다. 게다가 하나님의 심판이 예비되어 있는 가나안 땅, 부패하고 죄악이 관영한 여리고 성에 속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 보면 이는 상종할 수도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라합은 여호와만이 한 분 하나님이신 것과 그 분에게만 구원이 있음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기 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으로 몰래 들어왔을 때 이들을 숨겨주고 구원을 약속 받는 기회를 잡게 된다.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예호슈아가 말하였다. "그 창녀 집으로 가서 너희가 그녀에게 맹세한 대로 그 여자와 그녀에게 속한 모두를 거기로부터 나오게 하여라."
그 정탐꾼 청년들이 가서 라합과 그녀의 부모와 형제들과 그녀에게 속한 모두와 그녀의 모든 가문을 나오게 하여 이스라엘 진 바깥에 두었다.
그리고 그 성과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그들은 불에 살랐다. 단지 은과 금과 놋과 철기구들만 여호와의 집 창고에 넣었다.
그 창녀 라합과 그녀의 아버지 집과 그녀에게 속한 모두를 예호슈아가 살려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날까지 살고 있다. 이는 예호슈아가 예리호를 정탐하려고 보낸 그 사신들을 그녀가 숨겼기 때문이었다.여호수아 6:22-23 (직역성경)
이 일로 인해서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 중 일원이 되고, 훗날 예수님 탄생의 계보를 잇는 여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뿐만 아니라 라합의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라합과 같이 구원받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말씀처럼, 라합은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가족들을 구하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점령한 방법은 기상천외했다. 여느 전쟁처럼 돌을 던지고 칼과 창을 휘둘러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매일 한 바퀴씩 여리고 성 둘레를 돌라고 하신다. 그것도 어떤 말도 하지 말고 뿔나팔 소리만 내면서 행진하라는 것이다. 이 일을 6일 동안 반복하고 7일 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성을 일곱 바퀴 돌면서 뿔나팔 소리와 함께 '함성을 올리라'고 명령하신다. 이 날의 나팔 소리와 함성 소리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다.
여호와께서 예호슈아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네 손에 예리호와 그 왕과 용사들을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인은 그 성을 둘러싸서 그 성을 한 번 돌아라. 이렇게 너는 육 일 동안 행하여라.
일곱 명의 제사장은 궤 앞에서 일곱 양각 뿔나팔을 들어야 하며 칠 일째에는 너희가 그 성을 일곱 번 돌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제사장들은 뿔나팔들을 불어야 한다.
양각의 뿔로 길게 부는 그 뿔나팔소리를 너희가 들을 때 모든 백성은 큰 소리로 함성을 올려야 한다. 그러면 그 성벽이 아래로 무너질 것이다. 그때 그 백성은 각자 앞으로 올라가야 한다.여호수아 6:2-5 (직역성경)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고 성이 함락되기 전 6일 동안의 기간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기간 동안 과연 라합의 집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실제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라합의 집에 들어와 함께 구원받은 이들 중에서도 어쩌다 보니 끌려 들어온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문이 이미 가나안 땅에 파다하게 퍼져서 여리고 성 사람들은 두려움에 마음이 녹아내린 상태였다. 이런 무서운 존재들이 자신이 사는 성 앞까지 와서 그 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돌면서 나팔을 불어댄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겠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친족인 어떤 여자가 자신의 집에 오면 살 수 있으니 어서 들어오라고 간절하게 외치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따라가 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라합의 가족 외에 자발적으로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이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이끌리듯이 들어간 사람이나, 어떤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든 결국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 집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신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을 평화롭게 영접하여 불순종한 자들과 함께 망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31 (직역성경)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불순종한 자들이 망했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역으로 라합과 함께 구원받은 라합의 가족들은 순종한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엇에 순종했다는 것일까? 무언가 대단한 순종이 아니라 그저 라합의 집에 들어와 있으라 하신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무사히 내보내고 자신의 집 창문에 매달았던 진홍색 줄이 그 징표였다.
보라, 우리가 그 땅에 들어올 때 당신이 우리를 내려가게 했던 그 창문에 당신은 이 진홍색 줄을 묶고 당신 부모와 형제들과 아버지 집의 모든 자를 당신 집으로 모으십시오.
당신 집 문에서 밖으로 나오는 모든 자는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리니 우리는 깨끗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과 함께 그 집에 있는 모든 자에게 어떤 사람의 손이 미치면 그의 피가 우리 머리에 있을 것입니다.여호수아 2:18-19 (직역성경)
이 약속을 할 때 여리고 성이 함락되기까지 하루가 걸릴지, 한 달이 걸릴지, 1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지 라합은 몰랐다. 다만 정탐꾼들이 돌아가고 난 즉시 진홍색 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심판은 반드시 도래한다는 것을 믿은 라합의 믿음의 행실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날부터 바로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에게 외치기 시작했을 것이다. 곧 심판이 올 것이니 살 길이 주어진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이다.
그녀가 말하였다. "당신들의 말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녀가 그들을 보내니 그들이 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 창문에 진홍색 줄을 묶었다.
여호수아 2:21 (직역성경)
대부분의 성경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단순히 '나팔'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직역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나팔 소리인지 나오는 부분이 있다. 바로 유대력으로 신년을 기념하는 절기인 나팔절에 부는 '테루아'다. '테루아'는 9개 이상의 짧고 끊긴 나팔 소리를 통해 도래할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한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는 거룩한 모임이 너희에게 있어야 한다. 모든 일상의 일을 너희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날은 너희를 위하여 테루아(תְּרוּעָה)를 부는 날이다.
민수기 29:1 (직역성경)
성경에는 '테루아'에 대한 언급만 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이 절기에 나팔을 부는 순서는 조금 더 구체적이다. '테키아(תְּקִיעָה)', '세바림(שְׁבָרִים)', '테루아(תְּרוּעָה)', 테키아 게돌라(תְּקִיעָה גְּדוֹלָה)' 순서로 부는데 이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테키아 게돌라' 나팔 소리는 왕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한다. 왕의 도래는 곧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의미한다. 어떤 이에게는 심판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임하는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둘러싸고 6일 동안 나팔을 분 시간은 사실 하나님의 자비의 시간이었다. 심판이 아닌 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마지막 외침의 시간이었다. 그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라합처럼 구원의 길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그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면 언젠가는 테루아를 부는 날이 끝나고 테키아 게돌라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이 이르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5년의 나팔절을 맞이하며 나의 마음을 돌아본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리기 전, 나는 심판의 두려움과 구원의 확신 중 어느 곳에 속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나팔절이 임박하고 나서야 내가 여전히 두려움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라합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마침내 구원에 대한 확신과 강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전 첫 유월절을 지낼 때와 같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 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죽음의 사자가 미치지 않았다. 또는 노아의 방주 때에도 똑같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들과 동물들에게는 홍수 심판이 피해 갔다. 이 순종은 오직 믿음에서 비롯된다. 여리고 성이 함락되고 심판이 임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라합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사자가 온 집안을 방문하여 장자를 죽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집 안에 있는 것이다. 곧 대홍수가 나서 세상 모든 것이 물에 잠겨 심판 당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방주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나 의심을 가진 채로가 아니라 오직 구원에 대한 믿음과 감사함으로 들어간다. 약속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미션이나 얻어내야 하는 자격 같은 건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의 이름 안에 속해 있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기쁜 소식, 복음이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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