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성경 해석의 원리 중 '역사적 지평'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어떤 인물과 사건이 등장할 때 그 인물이 살아가던 시대와 그의 삶에 나를 대입해보는 관점이다. 나였다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이런 질문들을 하다 보면 때때로 성경 말씀이 정말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한번은 다니엘서를 읽다가 다니엘의 세 친구가 했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이 눈에 띄었다. 역사적 지평에서 바라보니 이것이 새삼 놀라운 고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명한 대로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풀무불에 던져지는 엄중한 때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꿋꿋하게 절하지 않는다. 느부갓네살 왕은 내가 너희를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면 어떤 신이 거기서 구해낼 수 있겠냐며 협박한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대답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실 것이며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금 신상에는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다니엘 3:14-18
이 고백 이후에 결국 다니엘의 세 친구는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지핀 풀무불에 던져진다. 너무나 뜨거워서 이들을 붙들고 가서 던진 사람들마저 타 죽어버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 불 가운데로 멀쩡히 걸어다니는 것이었다. 결국 느부갓네살이 이들을 나오라고 하는데,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고 옷도 멀쩡했으며 탄 냄새도 전혀 없는 상태로 나왔다.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다니엘 3:28
교회에서 자주 불려 익숙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찬양이 있다. 이 찬양은 밝고 신나는 분위기라서 그렇게 심각한 상황과 언뜻 잘 연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가지고 있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막연한 이미지는 고작해야 '내 소원 안 들어주실지라도'였는데, 실제 상황은 '풀무불에 던져져 불타 죽을지라도'의 스케일이었던 것이다.
내가 바로 그 시대에 바벨론에서 포로로 살아가던 유대인이었다면, 그 중에서도 특히 다니엘의 세 친구 중 한 명이었다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나 같은 상태로는 쉽사리 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이 얼마나 강력한 신앙 고백을 한 것인지 실감하게 된다. 다니엘의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다윗이 광야를 떠돌아 다닐 때 지은 시편에서도 이러한 고백이 나온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편 63:1-4
나는 조금만 아파도 내 생명을 귀하게 붙든다. 얼마 전에도 발가락을 모서리에 잘못 찧는 바람에 얼마나 아프던지 그 모서리가 막 미워졌다. 그런데 다윗은 마실 물조차 없이 메마르고 죽음의 위협이 따라다니는 광야 위에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주를 찬양한다는 고백을 했다.
이들은 성경에 적힌 것 이외에도 아마 수많은 기적과 은혜 가운데 신앙의 훈련을 받으며 강해졌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의 시험을 허락하시고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신다. 나도 지금은 그런 상태가 못되지만 계속해서 그 훈련을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왠지 심각함과 비장함보다는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실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부를 때에는 그냥 가벼운 느낌으로 신나게 불렀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와 같은 찬송들이 이제는 다르게 다가온다. 밝고 신나는 곡조가 죽음도 이겨내는 강한 믿음의 고백과 역설적으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재밌지만 뼈가 있는 말인데, '하나님, 이것만은 안 됩니다'라고 기도하는 제목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길로 반드시 인도하신다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신앙의 여정이 계속될수록 정말 그렇다는 걸 느끼고 있다. 나는 가기 싫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로 나아가는 과정은 힘들고 답이 없어 보이고 괴롭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평안과 확신이 동시에 내 마음에 부어진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나를 계속해서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 길의 끝에서 마지막 보루인 생명까지도 내어드리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신 십자가 사랑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심히 고민하며 죽을 정도로 슬퍼하셨고 땀이 피처럼 보이게 흐를 정도로 기도하며 돌파하셨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그 기도야말로, 나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맡겨드리며 완전히 순복하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복함으로 맞이하는 죽음 뒤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세상에 보이셨다.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2-36
가진 것이 많고 평안할 때 뿐만 아니라, 육신이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을 앞둔 그 때에도 뒷걸음질 치지 않고 돌파할 수 있는 믿음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이해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 가운데서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드리는 믿음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장래에 소망을 주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래의 소망이란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주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고난과 심지어 죽음이 다가와도 그 끝에서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에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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