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것
얼마 전 복음서를 읽다가 예수님이 지나가고 계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하게 외치는 소경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천국을 침노하는 자의 모습이 이런 것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며 함께 하셨던 사람들은 거의 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 당하며 손가락질 받는 사람, 또는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 이유가 이런 조건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다른 사람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간절히 구했기 때문이다. 이 간절함에 예수님이 반응하실 때 그들 마음에서 이미 천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된다.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마태복음 20:29-34
소경의 이야기를 묵상하고 나서 우연치 않게 설교를 듣다가 삭개오의 이야기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삭개오는 겉모습만 봤을 때는 키가 작고 왜소한 체형을 가졌고, 세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비난의 대상이었다. 나중에 그가 예수님께 서원하는 말을 보면 실제로 같은 민족을 상대로 토색하면서 비난받을 만한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삭개오의 관점에서, 또 그를 발견하시고 뽕나무 밑으로 다가가셨던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삭개오처럼 키도 작고 왜소한 체형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별다른 장비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올라가면서 살갗이 쓸리고 까지면서 피가 났을 수도 있다. 단지 예수님을 보고 싶다는 간절함 하나만으로 나무를 붙잡고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는데, 말그대로 몸부림치는 모습 그 자체였을 것 같다. 예수님이 지나쳐서 가버리시면 더이상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빨리 올라가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시고 삭개오에게 가셔서 그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삭개오의 몸부림은,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 유일하게 함께 머무르고 싶을 만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누가복음 19:1-10
반대로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비판하시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 이들은 출신 성분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내용은 반박하지 못하면서 단지 나사렛 시골 출신의 비천한 목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싫어서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다. 예수님께서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어 있는 이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셨다. 그래서 이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시는데 너무 정확해서 섬뜩한 표현이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태복음 23:27-28
그러니 겉으로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 속으면 안 되겠다. 열심히 회칠해서 그럴싸하게 꾸며놓았더라도 그 속이 무덤이라면 그건 그냥 무덤일 뿐이다. 무덤을 좋아하고 가까이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겉모습을 그대로 믿으면 실상은 무덤인지도 모르면서 아름답다 칭찬하고 그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또는 반대로 정말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간절하게 외치는 소경을 꾸짖고, 몸부림치며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를 죄인이라 수군거리며, 심지어는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죽이기까지 한다. 참 무서운 일이다.
영어 속담 중에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 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을 쉽게 받아들이며 의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을 꾸며내는 데 온 힘을 다해 치중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 너머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그래야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몸부림친 것처럼, 또 예수님이 그런 삭개오를 찾아내신 것처럼 진정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여기고 함께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겉모습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은 그 너머의 본질을 보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다. 결국 천국을 침노하는 자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과 같은 시각을 가져야만 한다. 소경이나 삭개오가 겉모습에 치중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간절히 구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구원은 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 바 되시고 멸시당하신 예수님을 나는 왜 보지 않고도 사랑하는가?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이 아름답고 놀라우며 나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나를 살리셨고 그분께서 먼저 한없는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 감격하여 나 역시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하는 예수님 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몸부림칠 때, 이 모습을 예수님께서 기뻐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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