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첫째 주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두려움을 이기고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2025.08.03 | 조회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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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떼의 발자취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정리한 글귀를 보내드립니다. 매달 첫째/셋째 주 주일 저녁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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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독교인들에게 '좁은 길'이란 말은 익숙하다.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향하는 그 길을 설명하실 때 쓰신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표현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연히 좁은 길로 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좁은 길이 어떤 길인지는 제대로 몰랐다. 생각만 있고 실천은 따르지 않는 신앙 생활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주님께 좁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6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그 길을 찾았으니 이제 예수님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맡기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단순히 구하기만 하지 말고 힘을 쓰라고 말씀하신다. 게다가 더 무서운 얘기도 하신다. 실컷 좁은 길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길 끝에서 주님이 천국 문을 닫으시고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좁은 길을 걷는 줄 알았는데 끝까지 가서 보니까 넓은 길이었다니. 차라리 넓은 길로 편하게라도 갔다면 모를까, 이보다 더 억울할 수는 없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결말을 맞이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가복음 13: 24-28

 


 

좁은 길은 어떤 길이길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일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보았다. 고대 근동에는 비탄 문학이라는 장르가 있다. 극심한 슬픔과 탄식의 감정을 시나 음악처럼 표현한다고 하여 애가(lament·哀歌)라고도 한다. 특히 성경에서는 욥기와 예레미야서에 특징적인 표현들이 등장한다.

욥과 예레미야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의 고난을 통과한 가장 대표적인 성경의 등장 인물들이다. 욥은 자녀가 한시에 모두 죽고 가산이 풍비박산나며 심각한 피부병으로 고난당한다. 이때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곧바로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데, 이 저주의 말들이 그의 고난이 결코 가벼워서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자신의 태어남 그 자체를 통렬하게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은 저주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욥의 믿음이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기 2:9-10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찌라도 얻지 못하여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욥기 3:1-10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하는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이다. 이전부터 수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패역함과 우상 숭배를 지적하고 멸망을 예언했음에도 이들은 돌이키지 않았다. 그 멸망이 코앞에 닥쳤을 때는 들을까 했으나 여전히 목이 굳어서 자신들의 살 길만을 찾고 하나님은 찾지 않는다. 심지어 예언자인 자신을 옥에 가두고 구덩이에 던지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애굽으로 도망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픔과 탄식이 비탄 문학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는 선포하지 않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선포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즉시 마음이 답답해져서 곧바로 하나님께 의뢰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아마도 욥과 같은 심정으로 자신의 태어남을 저주하며 괴로움을 대신 토해낸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7-9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예레미야 20:12-13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예레미야 21:14-18

이들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고통을 당했던 걸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미워하고 저주할 수 있을까? 나는 욥과 예레미야의 애가 앞에서 숙연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마음에는 이렇게까지는 고통 당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있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좁은 길을 간다는 게 이런 비탄의 노래가 절로 나오는 고통의 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눈 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이런 내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갈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부르시며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주셨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나타내시며 두루 다니실 때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좇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좇은 사람은 열 두 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예수님을 좇다 보면 무언가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자들은 종종 누가 더 큰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곤 했다.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누가복음 14:25-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9:27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복음 9:33-35

예수님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형에 대한 재판을 받으실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다. 그 때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보내신 성령을 통해 변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걷다가 순교로 생을 마친다. 제자들의 두려움을 파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아니면 영원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일까? 오히려 성경은 그 답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먼저 사랑하셨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우리도 하나님께 목숨까지 내어드릴 수 있는 사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5-39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한1서 4:18-19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가르침은 십자가를 통해 고난이 아닌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좁은 길로 걸어갈 때 겪게 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의 사랑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고난이 가볍고 거뜬히 당할 만해서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기까지 고난을 감수하셨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하는 주님을 너무나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을 마음에 새겨 본다. 이 간절함을 내게 주신 성령님께서 또한 좁은 길 끝까지 갈 수 있도록 담대함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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