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도피성
언젠가 한 목사님의 에세이를 보다가 인상 깊게 남았던 한 장면이 있다. 이 목사님은 20대에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하셨다고 한다. 회심 후 얼마 되지 않아 환상 중에 만난 예수님은 어느 높은 성벽 위에 앉아계셨다. 목사님은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곳이 영적 세계임을 알았고, 높은 성벽은 바로 구약 성경에 나오는 도피성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은 어딘가 지쳐 보이셨고 부활 직후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양 옆에는 천사가 한 명씩 붙어서 예수님을 부축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순간 예수님이 목사님을 고요하지만 불꽃 같은 눈동자로 꿰뚫어 보듯이 바라보았다. 어떤 것도 숨김 없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그 눈빛 앞에서 스스로가 엄청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이 기록은 내게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부활 직후의 예수님이 지쳐 보이셨다는 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십자가가 어느 정도의 무게였는지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걸 그저 쉽게 이겨내신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것은 지극히 실제적인 고통이었다. 십자가 형벌의 수치와 멸시와 고난, 하나님께 외면당하는 가운데서 느끼는 영혼의 극한 고독, 그리고 요나의 표적을 주셨지만 그럼에도 짐작하기 힘든 음부에서의 3일까지. 누군가는 이 기록이 그저 한 사람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이해가 갔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직후에 지친 모습을 하고 계셨을 수도 있겠구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요나 2:1-7
그 정도를 비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부모님을 슈퍼맨 같이 여기던 어린아이가 나이를 먹고 부모님의 고충도 알게 되면서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것과 같은 감정이 들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모든 일을 다 겪으셨다. 그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며 죄인으로 살던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겪으신 일이라고 생각하니 십자가의 참된 의미, 그 영광(כָּבוֹד)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6-8
앞서 묘사한 환상 속에서,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 목사님은 그 장소가 도피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 역시 신기했다. 나는 도피성에 대해서 부지중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피할 수 있는 성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그 외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특히 외견상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피성에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가진 지식으로는 해석이 잘 안되었다. 이따금씩 도피성에 대한 말씀을 읽거나 생각이 떠오를 때면 다시 궁금해졌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는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 궁금증에 대해서 문득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사소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이에 대한 답이 궁금한데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는 기도였다. 때마침 여호수아서를 읽고 있던 중에 가나안 땅 정복 전쟁을 마치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땅을 분배하는 부분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레위 지파가 분배받은 땅 중에 살인자의 도피성으로 지정된 성읍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시 도피성에 대한 자세한 지침이 기록된 민수기를 살펴 보았다. 모든 도피성은 레위 지파 관할의 성읍에 속해 있으며, 레위 지파 대제사장이 살고 있다. 부지중 살인한 후 도피성으로 들어온 사람은 더 이상 피의 복수자로부터 영향받지 않는다. 하지만 대제사장의 관할을 임의로 벗어나면 이때부터는 피의 복수자가 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도피성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나타내는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 이 성읍이라
민수기 35:6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찌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민수기 35:25-28
그런데 구약 시대의 레위 지파 대제사장들은 언젠가 죽는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머무르던 살인자는 혐의를 벗고 자유롭게 된다. 하지만 새롭게 발생하는 부지중 살인자가 또 있을 것이기에 레위 지파의 또 다른 제사장이 죽은 이를 대신하여 제사장직을 계승한다. 언젠가 죽는 인간 제사장 시스템 하에서는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반면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이는 시편에서 다윗에 의해 처음 계시된 내용인데, 전통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하던 레위 지파가 아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유다 지파의 다윗에게 이러한 말씀이 주어졌다. 훗날 다윗의 계보에서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편 110:4
이는 레위 지파라는 혈통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제사장 지위를 나타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신 단번의 제사를 통해서 반복해서 치러야만 하는 기존의 제사 의식을 모두 파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에는 그만큼 영원하고 완전한 속건제물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허물 있고 유한한 레위 자손 아론의 반차가 아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그리고 지금도 죄인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며, 이 언약은 영원한 보증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브리서 7:22-28
나의 기도를 귀기울여 들으시고 말씀을 통해 응답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도피성에 대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우리에게 주신 영원에 대한 소망, 그 확실한 언약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았다. 부활과 영원이라는 단어는 형언할 수 없는 설레임을 준다. 모든 죄의 사슬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단번에 깨뜨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구속을 바라본다. 영원히 쇠하지 않을 죄인들의 피난처, 영원한 도피성을 굳건하게 세우시고 그 안으로 나를 초청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나에게도 약속된 그 부활과 영원한 삶을 향해서, 이 아름답고 기쁜 소식을 소리 높여 외치며 나아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린도전서 15: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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