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에 파란 넥타이요 ㅎㅎ;"
이렇게, 낯선 이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스크린 너머로만 이야기를 나누던 누군가와 처음으로 대면할 때, 바로 소개팅과 당근마켓입니다. "토요일 저녁 여섯시 반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서 뵈어요"라든지, "금요일 저녁 일곱시 신사역 8번 출구 근방 맥도날드 앞에서 봐요"처럼 아주 상세한 일시와 장소까지 미리 정해두지만, 막상 여섯시 반에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으로 가보면 사람이 너무나 많아, 내가 과연 상대방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까, 혹시나 엉뚱한 사람에게 말을 걸면 어쩌나, 이런 걱정에 안절부절 못하곤 합니다. 소개팅은 사진을 교환하고 만나니까 그나마 낫지만, 상대방의 생김새를 전혀 알 수 없는 당근마켓의 경우에는 더더욱 불안합니다.
이런 경험이 몇 번 반복되면, 사전에 자신의 인상착의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습관을 들이게 됩니다.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무난해서 그것만으로 특정이 어려울 때에는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을 알려주기도 합니다(이를테면 당근 장바구니 같은 것을 말이지요). 그러다 보면 아래와 같은 재미있는 해프닝이 벌어질 때도 있습니다.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
지난 주의 뉴스레터에서, 이름의 흥미로운 특징을 한 가지 말씀드렸었습니다. 이름은 단 하나의 대상만을 고유하게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구독자'은 세계 속에서 오로지 구독자님만을 고유하게 가리키고, 다른 어떤 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의자'라는 단어가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의자를 가리키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런데, 딱 하나의 대상만을 고유하게 가리키는 언어표현은 이름 말고도 또 있습니다. 바로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입니다. [참고로, 이름이나 한정 기술구처럼 단 하나의 대상만을 가리키는 언어표현을 단칭어(singular term)라고 합니다.] 기술구(description)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의 속성, 즉 그 대상의 이러저러함을 기술(describe) 혹은 묘사하는 구절을 뜻합니다. 기술구는 여러 대상을 가리킬 수도 있고 하나의 대상만을 고유하게 가리킬 수도 있는데, 전자는 비한정 기술구, 후자를 한정 기술구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1)은 비한정 기술구입니다. 여러 대상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라는 기술구를 만족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아서,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김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 그 돌에 맞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정도이지요. 반면,
(2)가 귀속되는 대상은 필자가 유일합니다... 아마도요. 혹시 모르니 기술구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더욱 좁힐 수도 있을 겁니다.
기술구 (3)을 만족하는 대상은 이 세계에서 필자가 유일할 것입니다. 따라서 (3)은 단 하나의 대상만을 가리키는 기술구, 즉 한정 기술구입니다. 다음의 (4) 또한, 루드윅을 가리키는 한정 기술구이죠.
아닙니다. 농담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름의 의미란... 당근 장바구니가 아닐까?
눈치채셨겠지만, 당근마켓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인상착의도 한정 기술구입니다. 우리는 홍대입구역 3번 출구나 신사역 8번 출구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유일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한정 기술구를 사용합니다. "정장에 파란 넥타이요 ㅎㅎ;"는 사실 "202X년 X월 X일 토요일 저녁 6시 반에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착용하고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축약한 한정 기술구나 다름없고, "4출앞에 술병들고있어요"는 "202X년 X월 X일 X요일 오후 4시 33분에 마트에서 산 술병을 손에 들고 신림역 4번 출구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축약한 한정 기술구입니다. 당근 장바구니를 사용하는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근 장바구니를 들고 있으면 "홍대입구역 3번 출구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당근 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한정 기술구를 손쉽게 귀속시킬 수 있게 되지요. 각각의 기술구를 만족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기에, 상대방은 이를 단서로 제게 다가와 "저기... 당근이세요?"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정 기술구를 사용하여 이름과 대상 사이의 지칭 관계를 파악합니다. 소개팅 상대의 이름은 알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지칭하는) 대상을 정확하게 식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정장에 파란 넥타이" 따위의 한정 기술구를 매개로 대상을 확인하고 이름을 그 대상에 연결하지요. 이로써 이름과 대상 사이에는 이름이 그 대상을 가리키는 지칭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비슷한 예시를 우리의 일상에서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별 이유 없이 훑어볼 때가 있는데,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친구로 등록되어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구독자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그럴 때 구독자님은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일단 기억을 더듬어 그 사람을 알고 있을 만한 친구가 있는지를 생각해 본 뒤, 그 친구에게 그 사람이 누군지를 물어봅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이 항상 통하지는 않습니다만, 위의 대화는 당근마켓 사례와 함께 이름의 의미에 관하여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위에서 노란색으로 칠한 "OOO"는 이름이고, 파란색으로 칠한 부분은 한정 기술구입니다. A는 이름만으로는 그 이름의 대상을 식별하지 못하다가, 그 이름이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를 알게 된 때에 비로소 그 대상을 가리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의 의미는 다름아닌 그 이름에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름의 의미가 그 대상이 아니라 이름에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라고 보는 입장을 우리는 기술 이론(descriptivist theory)이라고 부릅시다. 기술 이론의 요점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연예인을 잘 모릅니다만, 한소희 배우님이 넷플릭스 드라마 <마이 네임>에서 윤지우로 열연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한소희"는 "<마이 네임>에 나온 그 여자 배우"입니다. 구독자님이 제게 "한소희가 누군지 알아요?"라고 묻는다면 저는 "<마이 네임>에 나온 그 여자 배우잖아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한소희"라는 이름에 저는 "<마이 네임>에 나온 그 여자 배우"를 귀속시킵니다. 자, 이제 제가 구독자님과 대화하던 중에 "한소희 진짜 이쁘다"라고 칭찬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한소희 진짜 이쁘다"라는 제 말의 의미는 "<마이 네임>에 나온 그 여자 배우 진짜 이쁘다"라는 것, 즉 이름의 의미는 화자가 귀속하는 한정 기술구라는 것이 바로 기술 이론의 설명입니다. 한마디로, 기술 이론에 따르면 이름의 의미는 마치 여러 사람들 중에 나를 유일하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당근 장바구니와도 같습니다.
기술 이론은 지난 주의 레터에서 살펴보았던 단순한 형태의 지칭 이론이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를 시원하게 해결합니다. 바로 동일성 퍼즐입니다.
이름 | 대상 | 한정 기술구 (뜻, 의미...) | |
샛별 | 샛별 | 금성 | 새벽에 보이는 가장 밝은 별 |
개밥바라기 | 개밥바라기 | 금성 | 저녁에 보이는 가장 밝은 별 |
기억하시겠지만, 동일성 퍼즐이란 "샛별"과 "개밥바라기"라는 두 이름이 각각 가리키는 대상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동일하지 않은 현상을 말합니다. 이제 위의 표를 살펴봅시다. 우선 구독자님의 오른손을 들어 표의 맨 오른쪽 열("한정 기술구" 열)을 가려 보세요. 그것이 단순한 형태의 지칭 이론입니다. 지칭 이론은 이름과 대상이라는 두 항목만을 고려합니다. 그러다 보니 두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동일하지만 의미는 다른 경우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지요.
이제 오른손을 떼어 보세요. "샛별"과 "개밥바라기"는 가리키는 대상이 같지만 각각에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는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샛별은 샛별이다"와 "샛별은 개밥바라기다"의 차이는 바로 여기서에서 비롯된다고 기술 이론은 설명합니다. 이름의 의미는 대상이 아니라 그 이름에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이기 때문에, 각각의 이름의 대상이 같더라도 그 이름에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가 다르다면 두 진술의 의미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I am Iron Man"이 명대사가 된 이유도 기술 이론을 받아들이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제적이었던 (5), (6)에서 이름을 각각에 귀속되는 한정 기술구로 치환하니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7)은 사소하지만, (8)은 정보를 전달합니다. 또한, 기술 이론의 설명은 믿음 문맥 하에 있는 문장에서도 잘 작동합니다.
이로써 동일성 퍼즐이 해결되었습니다!
『한여름 밤의 꿈』의 저자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면
... 그러나 이렇게 개운한 상태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구독자님의 행복하고 건강한 일상을 철학적 난제로 어지럽히는 것이 루드윅의 존재 의의니까요. 안타깝게도, 기술 이론 또한 그 나름의 문제를 한아름 안고 있습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한여름 밤의 꿈』의 진짜 저자가 아니라고 의심해 보신 적이 있나요? 오래되고 유명한 책들은 '진짜 저자' 논란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으레 저자로 알려진 그 사람이 진짜 저자가 맞냐는 의문이 제기되곤 하는 것입니다. 신학계에는 신약성경의 편지들을 과연 사도 바울이 쓴 것이 맞냐는 논란이 있고, 고전문헌학계에는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를 과연 호메로스가 쓴 것이 맞는지, 아니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진짜로 존재하기는 했던 것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 중 한 사람인 셰익스피어 또한 이러한 '진짜 저자' 논란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이를테면 『한여름 밤의 꿈』의 저자가 과연 맞냐는 것이지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사실 전혀 다른 사람이 쓴 작품이라거나, 여러 사람이 살을 덧대며 '공동 저작'한 작품이라는 식의 주장들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제임스 샤피로의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를 비롯하여 이 주제를 다룬 책을 몇 권 읽어보았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셰익스피어가 그 작품들의 진짜 저자가 맞다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정설이긴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기된 일각의 의문이 진짜라면 어떨까요? 이렇게 한 번 상상해 봅시다. 학계의 정설과는 달리, 실제로는 톰 행크스라는 셰익스피어의 절친한 친구가 『한여름 밤의 꿈』의 진짜 저자라구요. 행크스는 『한여름 밤의 꿈』의 원고를 완성한 뒤 이를 막 출판하려던 찰나에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했고, 그의 유고를 정리하다가 『한여름 밤의 꿈』의 원고를 발견한 셰익스피어가 나쁜 마음을 먹고 그 작품이 마치 자신의 저작인 것처럼 출판하여 유명세를 얻게 되었던 것이라구요. 이 진실을 아는 사람은 셰익스피어가 유일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에게 껌뻑 속아 『한여름 밤의 꿈』의 저자가 셰익스피어라고 믿고 있는 것이라구요. 물론 이는 일절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이런 허무맹랑한 가설을 동원하여 어떤 철학적 주장의 오류를 폭로하는 수법(?)을 왕왕 쓰곤 합니다. 이런 방법을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라고 부르지요.
끔찍한 상상이지만, 이 사고실험이 고유 이름의 의미와 무슨 상관인지 의문이실 겁니다. 이제부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기술 이론에 따르면 이름의 의미는 발화자가 그 이름에 귀속하는 한정 기술구입니다. "셰익스피어"는 이름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셰익스피어가 『한여름 밤의 꿈』의 그 저자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어서,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에 "『한여름 밤의 꿈』의 그 저자"라는 한정 기술구를 귀속시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야"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한여름 밤의 꿈』의 그 저자는 위대한 작가야"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사고실험에서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의 진짜 저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술 이론의 설명은 삐걱거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사고실험에서, "『한여름 밤의 꿈』의 그 저자"라는 한정 기술구를 만족하는 대상은 사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톰 행크스입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이다"라는 말에서 "셰익스피어"가 가리켜야 하는 대상도 실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톰 행크스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톰 행크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셰익스피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사고실험에서 사람들은
이 사람을 가리키기 위하여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
이 사람을 가리킬 의도는 전혀, 추호도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사용하여 톰 행크스가 아닌 셰익스피어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심지어는 아예 톰 행크스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조차 아무런 문제없이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고실험에서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가 아닌 한낱 사기꾼이니,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야"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런데 저 말이 틀린 말이 되는 이유도 애초에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톰 행크스가 아닌 셰익스피어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셰익스피어"가 톰 행크스를 가리켜야만 "셰익스피어는 위대한 작가야"라는 진술이 참이 되겠지요!) 그런데 기술 이론에 따르면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발화자가 귀속시키는 한정 기술구(= "『한여름 밤의 꿈』의 저자")를 만족하는 대상, 즉 톰 행크스를 의미한다는 엉뚱한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러한 논변이 드러내는 기술 이론의 문제점을 좀 더 형식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를 사용하여 가리키고자 하는 대상은 톰 행크스가 아닌 셰익스피어임이 명백하므로, 4의 결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조리한 결론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술 이론의 설명이 이름의 의미에 관한 설명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름의 의미는?
어떤 철학자들은 기술 이론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이름이 한정 기술구를 비롯한 그 어떤 것도 매개로 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지시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을 직접 지시 이론(Direct Reference Theory)이라고 부르기로 하지요.
문제는 직접 지시 이론이 우리가 처음에 검토했던 지칭 이론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동일성 퍼즐입니다. 직접 지시 이론은 일견 "I am Iron Man"이 왜 명대사가 되었는지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다"가 "샛별은 샛별이다"와 왜 다른지도 설명하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오도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셈입니다. 기술 이론에 문제가 있음은 명백한데, 직접 지시 이론도 딱히 사정이 낫지는 않으니까요. 추후의 뉴스레터에서 자세히 다루게 되겠습니다만, 심지어는 기술 이론과 직접 지시 이론에 둘 다 난제를 야기하는 주제도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이름, 픽션에만 존재하는 캐릭터들의 이름이 그것입니다. 개비스콘의 효험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술 이론도, 직접 지시 이론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이름의 의미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더 읽을거리
기술 이론은 프레게가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에서 초석을 다졌고 러셀이 여러 편의 저서와 논문에서 이를 발전시켰습니다. 프레게는 이름-대상 사이에 대상의 '제시 방식(mode of presentation)', 그리고 이에 언어적으로 대응하는 '뜻(sense)'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한정 기술구의 형태로 표현되는 뜻이 바로 의미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러셀의 논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지칭에 관하여 On Denoting」로, 이 논문에서 러셀은 철학적 분석의 모범이라 할 만한 논증을 펼칩니다. 러셀은 프레게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대부분의 이름은 사실 위장된 기술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기술 이론은 1960-70년대 이후로 반론에 부딪히게 되었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미국 철학자 솔 크립키(Saul Kripke)가 『이름과 필연 Naming and Necessity』이라는 강연과 동명의 책에서 펼친 여러 논변입니다. 크립키는 이른바 양상 논변(modal argument)과 인식 논변(epistemological argument)을 동원하여 기술 이론을 공격하고 직접 지칭 이론을 옹호하는데, 이 글에서 다루어진 것은 크립키의 인식 논변 중 하나입니다. 크립키의 공격 이후 기술 이론은 다소 힘을 잃게 되었으나, 직접 지칭 이론에도 난제들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최종적인 결론은 요원합니다(철학에 "최종적인 결론"이란 없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직접 지칭 이론을 지지하는 철학자들은 동일성 퍼즐을 비롯하여 기술 이론이 손쉽게 해결하는 난제들을 직접 지칭 이론을 바탕으로 해결하기 위해 여러 논변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콜린 맥긴의 『언어철학』 제2장이 크립키의 여러 논변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병덕 교수님의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는 크립키의 공격에 대한 기술 이론가들의 몇몇 반박 논변도 소개합니다. 윌리엄 라이컨의 『현대 언어철학』은 매우 훌륭한 교과서 형태의 책으로, 관련 논의를 폭넓게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영문 서적이지만 Herman Cappelen, Josh Dever의 『Puzzles of Reference』 또한 이름, 기술구 등 지칭하는 언어표현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들을 소개한 책으로 추천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스탠퍼드 철학 백과의 관련 항목들은 아주 좋은 참고문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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