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호] AI 시대에 달라져야 할 기획자, 디자이너의 보법

AI 기획을 처음 시작하면 겪게 되는 일들 그리고 세 가지 레슨런

2026.03.04 | 조회 1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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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에서 여의도까지」 — ✉️ 프로덕트 메이커들의 기획·디자인·AI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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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0년 넘게 다양한 도메인에서 서비스를 만들어왔습니다. 어떤 서비스는 성공하고 어떤 서비스는 실패하는 반복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때마침 등장한 AI 특유의 압도적인 속도감에 매료되어 지난 몇 해 동안 AI와 관련된 일들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AI 업계로 넘어온 지난 몇 년은 저에게 멘붕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년 넘게 쌓아온 기획 스킬들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된 것 같은 충격을 받았거든요.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면 그 당황스러움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이런 시행착오를 다른 누군가는 혼자 감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겪은 시행착오들이 여러분에게는 AI 시대를 건너가는 튼튼한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그동안의 기록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 10년간의 구력을 쓰레기통에 넣게 만든 황당한 에피소드부터 들려드릴게요.

 

 

1. 10년 차 기획자의 설계서가 쓰레기통으로 간 날

 

50페이지의 설계서를 무력화시킨 한 마디

첫 AI 서비스 기획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정성을 쏟아부은 50페이지짜리 화면 설계서를 준비했어요. 예외 케이스는 촘촘하게 막았고 정책은 빈틈없었습니다. 개발자 대상으로 진행한 리뷰도 실수 없이 완벽했어요. ‘자, 그럼 이렇게 진행하면 될까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려던 찰나,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개발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샤, 이건 생성형이라…기획서처럼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저는 당황한 채 되물었습니다, “안 될 수도 있다는게 무슨 말씀이세요? 기획서대로 안 나오면 그건 버그 아닌가요?

 

개발자는 무심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확률이에요.”

확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완벽을 설계하려 했던 시절
확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완벽을 설계하려 했던 시절


기획의 정의가 송두리째 흔들리다.

지금까지 저에게 기획은 A를 넣으면 B가 나오는 ‘확정된 스펙’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AI 서비스는 기획자가 결과를 통제할 수가 없었던 거죠. ChatGPT에 동일한 질문을 해도 10분 전 대답과 지금의 대답이 다르듯이, A를 넣었는데 C가 나올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안 나올 수도 있는 ‘확률의 문법’이 지배하는 곳이 바로 AI 서비스였던 것입니다. 사실 알고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기획에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 건지 몰랐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뭘 기획한 거지? 이렇게 되면 화면만 예쁘게 그려놓은 껍데기인 거잖아?”

 

이 실수가 저의 오랜 경력을 구식으로 만들었습니다.

 

 

2. 예쁜 디자인이 AI를 만나면 '바보'가 되는 이유

 

"사샤, AI는 그렇게 깔끔하게 대답 안 해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아름다운 디자인 시안을 들고 왔어요. ‘이건 무조건 된다’ 싶을 정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었습니다. 레이아웃은 사용자의 동선에 딱 맞게 정교하게 짜여져 있고, 모든 이미지 위치는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정해진 필드에 딱 맞는 정보가 들어가는 디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개발자의 반응은 차가웠어요.

 

“이 디자인, 생성형 LLM의 장점을 활용하는 디자인이 전혀 아닌데요, 오히려 반대예요. 데이터가 안 나올 수도 있고, 너무 길게 나올 수도 있고, 아예 엉뚱한 소리를 할 수도 있어요. 이 레이아웃은 다 깨질 겁니다.”

 

빨리 성과를 내고 싶은 조급함도 있었고, 은근히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던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롬프트를 잘 짜면 되죠! 일단 한 번 시도해보고 다시 얘기해보는 건 어때요?”

 

디자인의 고집과 AI의 할루시네이션이 만났을 때

다음날 실제 결과값을 뿌려봤을 때의 충격을 잊을수가 없네요.

 

다섯 글자가 예쁘게 들어와야할 곳에, AI가 “죄송합니다, 저는 언어 모델로서…”라며 장문을 쏟아내며 UI를 다 파괴하고 있었고, 날씨 정보가 나와야 할 칸에 “내일은 당신의 마음도 맑음입니다”같은 오글거리는 할루시네이션이 등장했어요. 예쁘게 잡아둔 콘텐츠 칸에는 엉뚱한 데이터가 들어온 것을 보며 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어요.

 

‘어제 본 그 예쁜 디자인 어디 갔어? 웬 바보가 화면에 앉아있잖아…’

 

 

3. 그래서 우리의 기획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 걸까요?

 

그 후로 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꽤 오랫동안 부딪혀봤습니다. 프롬프트를 수십 번 갈아엎어보고, 예쁘게 다듬기보다 일부러 망가뜨려보는 실험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제 사고방식이 먼저 깨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몇 번은 꽤 단단히 깨졌습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AI 시대의 기획자와 디자이너는 단순히 '화면'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요.

 

물론 바꿔야 할 것은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어쩌면 백 가지, 천 가지, 아니 백만 가지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처럼 몇 달을 돌아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부딪혀보며 특히 중요하다고 느낀 세 가지를 말씀드려 볼게요. AI 기획을 시작한다면, 최소한 이 세 가지 관점에서 한 번 점검해보셨으면 합니다.

 

1. 스펙을 정의하지 말고, 가이드를 설계해 보세요.

예전의 저는 A → B라는 정답을 정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어떤 문구가 나와야 하는지, 예외 상황에서는 어떤 메시지가 떠야 하는지, 최대한 촘촘하게 스펙으로 고정해두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AI는 생물과 같았어요. 기획자가 아무리 빈틈없는 정책을 써도 AI는 자기 마음대로 C나 D를 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해진 스펙을 사수하는 대신, AI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먼저 정의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의 형식은 어디까지 허용할지, 톤은 어느 선을 넘지 못하게 할지, 길이는 어떻게 제어할지, 우리가 ‘프롬프트’라고 부르는 부분을 더욱 꼼꼼한 가이드로 설계했습니다.

 

또 100% 완벽한 프롬프트는 없기에, '비즈니스 로직'이라는 안전장치를 한 겹 더 씌우고 이것이 프롬프트와 충돌이 나지 않게 계속 신경 씁니다. 답변의 근거가 부족할 때는 "참고용" 레이블을 자동으로 부착하게 하거나, 프롬프트를 무시하고 20자 이상의 답변이 오면 화면에 그대로 뿌리는 대신 말줄임표(...)로 처리하도록 가이드했습니다.

 

👉 바뀌어야 할 보법:

 

"이 버튼을 누르면 이 문구가 나와야 한다"는 고집을 버려보세요. 대신 AI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정해주고 선을 넘었을 때 어떻게 흡수할지를 먼저 설계해보세요. 그리고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왔을 때 유저가 당황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프롬프트와 비즈니스 로직의 결합'에 더 공을 들여야 합니다. 프롬프트는 방향을 잡는 장치이고, 비즈니스 로직은 안전벨트입니다. 둘을 함께 설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한쪽이 무너집니다.

 

2. '해피 패스'가 아닌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디자인을 시작해 보세요.

우리의 디자인 시안 속 데이터는 언제나 예쁘고 적당한 길이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실제 LLM이 뱉어내는 데이터는 길고, 지저분하며, 때로는 멍청해요. 우린 그걸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라고 부릅니다.

 

위 에피소드 이후로 저는 더 이상 디자인 시안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최소 요구사항만 정의한 뒤 빠르게 구현해보고, AI가 실제로 어떤 엉뚱한 말을 쏟아내는지부터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 ‘날것의 결과값’을 디자이너와 공유합니다. 그러면 대화의 초점은 ‘이 화면이 예쁜가’가 아니라, ‘이 예측 불가능한 데이터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담을 것인가’로 자연스럽게 이동합니다.

(예시 화면) 예쁜 데이터에 맞춘 디자인A vs 현실을 견디는 디자인B
(예시 화면) 예쁜 데이터에 맞춘 디자인A vs 현실을 견디는 디자인B

👉 바뀌어야 할 보법:

 

가장 예쁜 화면을 먼저 그리는 관성에서 벗어나세요. 데이터가 오지 않았을 때, 엉뚱한 대답을 할 때, 텍스트가 너무 길어 UI를 뚫고 나갈 때 어떻게 우아하게 대응할 것인가(Fallback design)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AI 시대의 진짜 디자인 실력입니다. 이제 디자인은 '틀(Mold)'이 아니라 '유연한 그릇(Container)'이 되어야 합니다.

 

3. 완벽한 정답보다는 유저가 직접 운전할 수 있는 조종석을 설계해 보세요. 

저는 그동안 버튼만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오는 '자판기'를 만드는 데 익숙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확률이 지배하는 AI 시대에 이런 모델은 필연적으로 실패합니다. 점쟁이가 아닌 이상 AI가 유저의 마음을 단번에 100% 읽어낼 순 없기 때문이에요. 

 

위 에피소드 이후로 저는 ‘한 번에 정답을 내놓는 화면’ 대신, 사용자가 결과를 다듬어갈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필수적으로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톤 변경 옵션을 주거나, 다른 버전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특정 문장만 다시 생성하는 기능처럼 사용자가 AI의 답변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장치들을 기본 인터페이스로 설계했습니다.

(예시화면) 정답 내려는 디자인A vs 함께 다듬어나가는 디자인B
(예시화면) 정답 내려는 디자인A vs 함께 다듬어나가는 디자인B

👉 바뀌어야 할 보법: 

 

기획자가 모든 결과값을 통제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유저가 AI의 확률적 흐름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제어 장치'들을 설계해 보세요. 최종 답안만 툭 던지는 게 아니라, 답변의 근거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생성 과정에서 유저가 방향을 틀 수 있는 인터랙션과 피드백 루프를 UI/UX 곳곳에 배치해 주세요.

 

사용자가 서비스를 '오류 없는 검색 엔진'으로 오해하게 두는 대신, '내 의도를 학습하며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파트너'라는 멘탈 모델을 갖게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용자가 결과에 실망하는 대신 "내가 의도를 이렇게 보정하면 더 정교한 답이 나오겠구나"라고 느끼며 주도적인 경험을 하게 만들어주세요.

 

글로벌 AI PM들이 말하는 '인간 중심 AI(Human-Centered AI)' 기획의 본질이 저는 어쩌면 이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돌이켜보면 제 10년 구력이 의미 없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확정의 시대’에 최적화되어 있던 사고방식이 ‘확률의 시대’로 넘어오며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었죠. AI는 우리의 기획과 디자인을 무력화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더 유연해지길 요구하는 동료에 가깝습니다. 스펙을 고집하던 손을 조금 풀고, 불확실성을 설계하며, 유저에게 조종석을 건네는 순간 우리는 다시 유효해집니다.

 

혹시 지금 저와 같은 혼란을 겪고 있다면, 너무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향만 조금 바꾸면, 여러분의 10년도 여전히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 다음 호 예고

[5호] 전환율은 올랐는데, 매출이 떨어졌다고요?

다음 호에서는 PM이 실험을 설계할 때 고려해야 할 사업적 관점을 짚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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