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기념일이 아닌데 편지를 쓰는 건 오랜만이다. 그치? 고백할 게 있는데, 말로 전하기 쫌 애매해서 이렇게 편지로 전해. 나 고백할 게 있어. 나 좋아하는 일 한다는 거 거짓말이야. 나 이제 그 일 안 좋아해. 그냥 좋아했었던 마음으로 버티던거야. 그러니까, 나.. 그만뒀어.
너도 알지? 나 웹툰 일 오래 했던 거. 운이 좋았었어. 전공도 아니고 배운 적도 없는데 서른에 어떻게든 좋아하는 일 해보겠다고 포트폴리오 만들어서 뿌리고, 수정해서 또 뿌리고, 또 수정해서 또 뿌려서 겨우 일감 하나 따냈었어. 그때 나 한 달에 8천원, 만원 그렇게 벌었다? 근데 그래도 너무 뿌듯하고 재밌어서 알바 끝나자마자 그 일 하려고 집으로 달려가고 그랬어. 근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된 걸까?
서른이 되고 좋아하는 일을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어. 그게 평생 취미로 해오던 그림이었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림으로 돈 버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부러웠던 마음을 안고 가장 밑에서부터 시작했지. 이 시장에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느낀 건, 가장 밑에서부터 경쟁이 치열하단 거였어. 보조작가는 보조작가들끼리 경쟁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보조작가는 보조작가들과 메인작가들과 함께 경쟁하는 거였더라고? 플랫폼에 치이고, 스튜디오에 치이고, 작가님들께 치이고, 보조작가님들께 또 치이고.. 같이 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 현실로 사라져가고.. 그래도 오래 버텼더라? 4년, 딱 4년 버텼더라.
몰랐어. 때로는 내가 한 8년은 일한 것 같았지만, 때로는 1년 반 정도 일한 것 같았거든. 프리랜서로 시작해서 회사에도 들어가고, 다시 회사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해서 그랬나? 어쩌면 이 일을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작품을 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니, 아니야. 그런 것 때문만이 아니야. 이미 오래전에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야. 이젠 그걸 받아들여야 해.
매번 그만둔다 해놓고, 이제는 못 하겠다 해놓고, 더 이상은 안 하겠다 해놓고도 이 일을 지속했어. 이 일이 주는 안정성, 그동안 쌓아 온 이력, 내가 좋아하는 세계에 있다는 감각이 좋아서 결국 또 계약해 버렸다고 웃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런 게 아니었어.
두려움. 그래, 두려웠어. 작년 초 처음으로 그런 마음을 느꼈었어. '이 일을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될까 봐.' 두렵더라고. 그날 밤, 나는 자려고 누워 엉엉 울었어. 너무 무섭다고, 내 안의 반짝임을 잃어버릴까 봐 무서워 죽겠다고. 마음이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이 일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어 울었지. 그런데, 나 이제 인정하려고. 이제 거짓말 안 하려고. 나, 더는 이 일을 하면서 반짝이지 않아. 더는 계발하고 싶지도 않고, 기술을 연마하고 싶지도 않아. 그냥 나는 이 일이 이제... 진절머리가 나.
이 일을 하면서, 좋아하는 행위에 속하면서, 즐겁고 행복했어. 이 일에 속한 나도 좋았어. 이 일을 하는 동안 자존감이 채워지는 것 같았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 멋져 보이잖아.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지쳤어. 지쳤다고 말하고 싶진 않았는데, 오래 사랑하고 싶었는데, 나는, 계속 이 일을 사랑하고 또 붙들고 싶었는데, 역시 지쳤어. 나도 오래 사랑하고 싶었어, 정말이야.
뭔가를 싫어하는 내가 싫어. 그런 나는 별로 달갑지 않아. 나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내가 좋지. 그러니까, 그 일을 사랑하던 때의 내가 좋았던 만큼, 이 일을 싫어하는 나를...
나는 그 대신 사람이 좋아. 사람을 사랑해. 사람의 이야기를 사랑하고, 사람이 하는 일을 사랑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일을, 사람 때문에 사랑하지 않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어.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을 잃은 기분이었어. 그 기분이 유쾌하진 않더라.
그런데 재밌는 거 아니? 막상 그만두고 나니 텅 빈 느낌은 들지 않더라. 공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반짝이지 않아야 하는데, 사랑스럽지 않아야 하는데, 싫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더라? 심지어 슬프지도 않았어. 그냥.. '끝이 났구나. 기다리던 불안이 왔구나. 드디어 불안한 자유가 왔구나.' 딱 그 정도. 그래서 알았어.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상상할 때나 무서웠지. 사랑하지 않는 순간이 오면 무섭지도 않고 아무 마음도 동하지 않는다는 걸.
길을 잃어보려고 해. 이제 내가 사랑하던 일을 거기에 두고, 더는 미련 갖지 않으려고 해. 내 어깨를 살짝 솟게 만들었던, 아주 가끔의 순간에만 일해도 나를 웹툰일하는 사람이라고 명찰 달아주었던, 병원에 가서까지 무슨 일 하기에 이렇냔 말에 왠지 수줍게 고백하게 만들었었던 이 일을 떠나려고 해. 이제야 다시 안정화되려고 했던 참인데, 나란 사람은 왜 이리도 항상 마지막 조금을 못 참을까? 근데 나, 사실 알아. 마지막 조금 못 참는 게 나로서는 제법 버티고 버틴 거라는 걸. 이 말을 쓴다는 건, 그저 누군가에게 이해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거야. 그러니 이해한다고 해 줘. 내가 나를 이해해도 괜찮다고 해 줘. 그게 이상하지 않다고 해 줘.
당장 뭘 해야 할지 뚜렷하진 않아. 그런데도 그만뒀어. 알바를 해서라도 이 일을 끝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지 않으면 평생 관성적으로 이 일을 지속할 것 같았어. 그래서 그냥 그만뒀어. 나답지 않은 선택이었지. 무모하잖아? 겁도 많은 주제에. 그래서 요즘은 길 잃을 준비부터 하고 있어. 길을 떠날 때쯤에, 또 편지 보낼게. 그때까지 내 걱정 말고,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 알았지? 그럼, 또 편지할게. 안녕!
P.S 참, 너는 요즘 어떻게 지내? 그때 고민한다던 거 있잖아. 하려던 일. 그거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네 이야기도 들려줘. 너는 꼭 내가 묻지 않으면 자세히 얘기 안 하더라? 말하지 않으면 몰라. 괜찮으니 먼저 이야기해 줘. 알았지? 답장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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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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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복의 방황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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