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1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지 4주년이 된 날이었어요.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는 형법의 조항을 ‘헌법불합치’로 판결했어요. 낙태에 죄를 물어 처벌하는 것보다, 낙태를 감소시킬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해 더 실효성 있는 수단이라는 판단이었죠. 헌법불합치 의견을 냈던 4명의 재판관들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언명은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포함할 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의견을 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임신한 여성의 신체적·사회적 보호를 보장하면서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수단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입법 공백'으로 남은 임신중지
헌재 판결이 나온 이후, 정부와 국회의원들은 임신중지와 관련된 법안을 잇따라 냈습니다. 현재 21대 국회에 계류 중인 임신중지 관련 법안이 14건이나 된다고 해요. 법안은 많이 발의됐지만 논의는 되고 있지 않습니다. 헌재가 “입법자는 늦어도 2020년 12월 31일까지 개선 입법을 이행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때까지 겨우 공청회 한 번 열린 게 다였어요. ‘낙태를 처벌하는 게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판결이 나왔으니 아예 처벌하지 말자’는 쪽과 ‘낙태죄 처벌조항을 남기고 제한적으로 낙태를 허용하자’는 쪽이 극심하게 대립했고 그 이후로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죠.
임신중지가 입법공백으로 남은 지금,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을까요? 낙태죄가 사라지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합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해 정보를 찾고, 많은 비용을 들여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로 임신중지가 이뤄지기 때문이에요.
전세계가 쓰는 ‘필수의약품’, 한국에는 없다
보통 임신중지는 ‘미프진’으로 불리는 약물 복용 또는 산부인과에서의 수술을 통해 가능합니다. 미프진은 의사의 처방을 받아 사용한다면 임신 초기의 여성이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알려져 있어요. 세계보건기구(WHO)는 수술보다 먹는 약이 더 안전하다고 권고했고, 2005년에 미프진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죠. 75개국에서 사용이 허가되어 오랫동안 전세계적으로 쓰여온 약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미프진의 존재가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아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낙태수술을 한 여성의 34.3%가 ‘약물을 이용한 방법이 있는지 몰랐다’고 응답했습니다.
한국에선 미프진이 불법입니다.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 한 약품회사가 식약처에 허가 신청을 냈지만 여러차례 자료 보완 요구를 받으면서 신청을 철회했어요. 약사 사회는 “미국 FDA의 승인을 받은 안전한 약인 미프진을 도입해 여성의 건강권을 지키려는 노력을 식약처가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어요. 시민들은 “식약처가 의도적으로 미프진 도입을 지연시키는 것 아니냐”며 반발했고요. 정품을 구할 수 있는 경로도 정부가 막고 있어요. 네덜란드의 한 의사가 만든 비영리단체인 ‘위민온웹’은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와 함께 먹는 낙태약을 우편으로 보내주는데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위민온웹 사이트의 국내 접속을 차단한 상태입니다.
필수의약품 없으니 가짜약이 판친다
미프진 도입이 무산된 사이 가짜약이 판치고 있다고 합니다. 포털사이트나 SNS에 미프진을 검색하면 다양한 경로로 미프진을 구입할 수 있는데요, 약이 진품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중국산 가짜약을 들여와 판매하던 일당이 붙잡혔다는 뉴스가 계속 이어지고 있죠. 가짜약을 복용하면 과다출혈이나 심근경색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여성들은 “몸이 망가져도 방법이 없다”며 절박한 마음에 불법 유통되는 미프진을 수십만원 주고 구입합니다.
먹는 약으로 임신을 중지한 여성의 43%가 국내 혹은 해외의 약물 판매자나 단체를 통해 약을 구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미프진은 의사가 ‘먹어도 된다’고 진단한 뒤에 복용해야 안전한 약이에요. 전문가의 처방과 복약지도 없이 약물을 복용하다보니 부작용 가능성이 커집니다. 한 미프진 판매자가 ‘임신 8개월 까지도 효과가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주며 180만원에 약을 판매한 경우도 있었어요.
낙태 수술, 처벌만 안 하면 끝일까?
가짜 미프진에 대한 불안 때문에 수술을 택한다 해도 여성들이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단 먹는 약보다 수술의 안전성이 낮고요, 그동안 암암리에 이뤄지던 수술이다 보니 불투명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임신중절 수술을 위해 병원을 수소문해보면, 주로 분만을 하지 않는 작은 산부인과나 미용 시술 위주의 여성의원에서 수술이 가능하다고 해요. 수술 당일 갑자기 의사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요. 안전한 병원을 선택할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죠.
그동안 낙태는 ‘죄’였고, 의사도 처벌 받았기 때문에 의대에서도 ‘임신의 종결’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대요. 한 대학병원의 의사는 “병원에서 임신중지 수술 전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 하는지 가이드라인도 논의도 없는 상황이라 의사 개인이 알아서 판단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어요.
의사들이 ‘알아서’ 임신중지 수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도 알아서 정해진다고 합니다. 포털사이트를 검색하면 7주 70만원, 8주 80만원과 같은 식으로 임신 주수에 따라 비용을 10만원씩 올려 받는다는 광고들이 많은데요, 의사들은 “임신 초기에 일주일 지났다고 10만원씩 올리는 건 비합리적”이라고 말합니다. 임신 주수를 정확히 측정하기도 어렵고요.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은 협상력이 없기 때문에 병원이 내라는 대로 내야하는 상황이래요. 단비뉴스가 서울 소재의 산부인과들을 취재한 결과, 임신 7주차의 수술 비용은 최소 35만원에서 최대 140만원까지 차이가 났다고 합니다.
저소득층, 청소년, 장애인이 가장 고통받는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입법 공백 상태의 임신중지는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더욱 가혹합니다. 저소득층의 경우 돈이 없으면 시술을 받지 못하거나, 돈을 구할 때까지 임신주수가 늘어나게 되어 더 위험한 상태에서 더 비싸게 수술을 받죠. 미성년자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려면 보호자의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불법으로 유통되는 약을 찾게 된대요. 장애인의 경우 장애인에 특화된 산부인과가 별로 없어서 수술할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장애친화 산부인과’사업을 시행하고 있지만 그곳에선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수술할 수 있기 때문에 입법 공백 상태에선 수술을 받을 수 있을지 불투명해요.
한국건강가정진흥원(여성가족부 산하 특수법인) 임신중지 상담 통계
임신주수 논쟁은 ‘함정’
임신중지 관련 입법을 두고 가장 합의가 안되는 지점은 ‘낙태 허용 주수’ 라고 합니다. 임신 몇주까지 낙태를 허용할 건지 주장이 제각각이죠. 그런데요, 낙태죄로 처벌하는 게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정이 나왔는데 처벌 조항을 남길 것이냐, 말 것이냐로 싸우고 있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김새롬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은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주수를 정하자는 논의 방향은 대체로 함정”이라고 지적했어요. 임신 주수가 아니라 ‘임신 중지를 보장할 방법’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죠.
임신중지 접근성 보장이 먼저다
자꾸만 임신 주수를 따지는 이유는, 태아가 어느정도 커지고 나서 낙태하는 일을 막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태아가 커지고, 임신중지에 따르는 위험성과 비용이 증가하니까요. 불가피한 사정이 없다면 임신중지는 임신 초기에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가피한 사정’은 대부분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상황이고요. 돈이 없는 경우, 정보를 얻기 어려운 경우, 병원이 멀리 있는 경우, 시간을 내기 어려운 경우, 장애가 있는 경우… 등등이요. 원치 않는 임신을 조기에 중단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 지금 입법자가 할 일 입니다. 그런데 ‘24주 이후로는 안 된다’, ‘10주 이후로는 안 된다’는 식의 논쟁만 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그야말로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미프진부터 도입하라
임신 초기에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미프진 도입을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미프진을 제때에 처방받아 복용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여야 해요. 낙태수술도 마찬가지 입니다. 임신중지가 보편적인 의료서비스로 자리잡는 것이 중요해요. 전문가들은 임신중단과 관련된 의료를 건강보험화 시켜야 진료의 퀄리티를 공적으로 관리하면서 적절한 가격에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금 한국 여성들은 임신중지 뿐만 아니라 사후피임약 처방 및 피임 시술도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헌법재판소가 이야기한 “낙태를 감소시킬 사회적·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거예요. 출생률과 관련 없는 여성의 재생산권은 개인이 알아서 책임지도록 되어있죠. 재생산권은 아이를 낳을 권리와 낳지 않을 권리를 모두 보장할 때 실현됩니다. 원치 않을 때에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고, 원하는 때에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처벌과 규제를 들이미는 접근법을 벗어나, ‘권리 보장’을 중심으로 제도가 변화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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