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기업 사무직 됐다!
여러분은 처음 취업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저는 뿌듯함, 기대감, 걱정스러움이 공존했던 마음이 기억납니다. 고등학교 졸업 전 현장실습을 나가게 됐던 열아홉살 소희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요. 지난달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의 주인공 소희는 “나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다?”라고 친구에게 말하며 환하게 웃습니다.
그러나 소희의 웃음은 며칠만에 산산조각이 납니다. 학교 선생님이 ‘대기업 사무직’이라고 했던 일자리는 하청 콜센터 업체였는데, 성과압박이 심한 곳이었거든요. 소희는 업무가 가장 고되기로 악명높은 부서에 배치되어 고객의 폭언과 성희롱에 시달립니다. 수시로 야근을 하며 실적을 올려도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결과가 돌아오고요. 월급마저도 계약서에 써있는 것보다 적게 받게돼요. 가혹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무너지던 소희는 현장실습에 나간지 3개월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이가 죽어도 회피하기 바쁜 어른들
영화 <다음 소희>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어요. 2017년 엘지유플러스 하청업체인 전주의 한 콜센터에서 일하던 특성화고교생 홍수연 양은 한겨울 저수지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습니다. 홍 양이 현장실습을 나간지 5개월만에 벌어진 일이었어요. 열여덟살 여고생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당시, 어른들은 책임을 떠넘기기만 했어요. 엘지유플러스는 원청의 소관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보였고요, 콜센터 측은 홍 양에게 실적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홍 양이 다녔던 학교와 교육청 측은 ‘고인이 실족사한 것’이라고 말했어요. 영화 <다음 소희>에서는 이런 상황을 배두나 배우의 절규와 함께 보여줍니다. “학생이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탓이라는 데가 없어…”
어른들이 바뀌지 않는 사이, '소희의 죽음'은 계속됐다
홍수연 학생과 같은 현장실습생의 사망은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습니다. 2021년, 요트 바닥에 붙은 따개비를 긁어 제거하던 열여덟살 현장실습생이 바다에 빠져 사망했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고인이 된 홍정운 학생은 12kg의 납벨트를 착용하고 바다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자격증도 없는 학생에게 잠수 작업을 시키면서, 장비를 벗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안전수칙도 지키지 않아 사망사고가 일어났다고 지적했어요. 당시 법을 위반하고도 '사고는 홍군의 과실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요트업체 사장은 얼마전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분노 끝에 무력감이 더해지는 소식이었어요.
어떤 구조가 ‘현장실습생의 죽음’ 불렀나
1. ‘취업률 높이기’에만 관심 있는 학교들
이명박 정부 시절, ‘취업선도 특성화고 지원사업’에 200억원의 예산이 교부된 이후로 각 지역 교육청들은 사업비를 받기 위해 취업지표 경쟁에 나섰어요. 정부는 특화고의 취업률 목표치를 60%로 올렸고, 2013년에는 취업률에 따라 예산을 차등지원하거나 특성화고 지정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채찍을 내놨습니다. 이런 교육부의 압박 때문에 시·도 교육청과 학교는 취업률 높이기에만 골몰하게 됐대요.
학생의 미래를 살펴봐줘야 하는 학교가, 학생 한 명 한 명의 취업을 ‘돈(지원금)’으로 보게 된 거예요. 안전한지 확인도 되지 않은 회사에, 전공에 맞지도 않는 일자리에 아이들을 보냈어요.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았고요. 학생들이 힘든 일이 있다고 얘기하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무시하고, 악덕기업을 관두려고 하면 “너 때문에 후배들이 피해를 본다”며 버티라고 말했습니다. 실습을 하다 그만둔 학생에게 벌을 주는 학교도 있었어요. 현장실습생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학교에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가 여기 있어요. 그렇게 학생이 죽으면 학교와 교육청은 그 죽음을 개인의 탓으로 돌렸죠.
2. 학생들을 ‘싼값에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자’로 여기는 업체들
교육계는 현장실습을 노동이 아닌 학습이라고 봅니다. 실습생들은 ‘교육생’이지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2017년부터 교육부가 ‘학습중심 현장실습’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예요. 그런데 학생들을 고용한 회사들도 과연 교육을 시켜주기 위해 학생들을 데려오는 걸까요? 노동 전문가들은 현장 실습을 ‘저렴한 노동’의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국가가 직업계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현장실습을 나가게 한 배경에 저렴한 노동력을 조기에 공급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거예요. 현장에선 현장실습생을 ‘값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자’로 인식하는데, 정부가 ‘학생’이라고 정의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오히려 노동자로서의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해 위험에 노출되기 쉬워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책임 있는 어른들은 여태 뭐하고 있었나요?
- 정부는 믿음직스럽지 않대요.
학생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정부가 만들었던 안전장치를 스스로 풀었던 적이 있어서일까요. 사람들은 정부의 대책을 신뢰하지 못해요. 2017년 제주도에서 현장실습생이던 이민호군이 사망하자, 정부는 '선도기업' 중심으로만 현장실습을 허용하겠다고 했어요. 공인노무사가 현장에 나가서 검증을 하고, 교육부와 교육청, 기업협회가 모두 괜찮은 기업이라고 인정한 곳에만 학생들을 보내게 한 거예요. 그러나 이 규제는 1년만에 슬그머니 완화됐어요. 다시 열악한 기업들이 현장실습 참여기업으로 선정됐죠. 고등학생을 바다로 보내 숨지게 했던 요트업체에 홍정운 학생이 실습을 나가게 된 배경은 정부가 만든 거였어요.
홍정운 군이 떠나고 2021년 말, 정부는 ‘안전·권익 확보를 위한 직업계고 현장실습 추가 개선방안’을 발표했어요.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나가는 업체에 공인노무사가 가서 현장실사를 거치도록 했고요, 업체의 인건비 부담분을 30%나 줄여줬어요. 그리고 학생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센터를 운영하기로 했다는데요, 학교 현장에선 ‘실효성이 없다’, ‘크게 달라지는 게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반응이 나왔어요.
- 국회는 싸우느라 바빴대요.
직업계고등학교 현장실습생이 죽어갈 때마다 국회에선 대책이 쏟아졌지만 여전히 ‘다음 소희’를 막아줄 만큼의 변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학생이 죽고 논란이 되면 너도나도 법안을 발의하지만, 그 이후에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어요. 정쟁만 하느라 바빴던 걸까요? 지난해 10월 홍정운 학생의 1주기를 맞아 국회를 점검한 결과, 현장실습 사고를 방지할 법안들을 1년 동안 한번도 심의하지 않았다는 보도도 나왔어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현장실습의 문제가 속시원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학부모들 사이에선 ‘현장실습 폐지론’도 나오고 있어요. 취약한 위치에 있는 학생들을 기업으로 보내지 말고, 실습교육을 학교 차원에서 제공하라는 거예요. 그런 가운데 현장에서의 실습 기회가 사라지면 안된다는 학생들의 요구도 들립니다. 학생들이 현장실습에서 기본권을 보장 받으면서 일을 배울 순 없는 걸까요?
1. 법망 바깥에 있는 기업으로 아이들을 보내지 말라
일단 법의 감시망 바깥에 있는 영세사업장에는 아이들을 보내지 말고,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기업들 가운데서 현장실습처를 선정하면 어떨까요. 우리나라는 사업장 규모가 작을수록 열악한 일자리가 많다고 알려져 있잖아요. 특히 상시 근로자수 5인 미만인 기업은 근로기준법의 보호 바깥에 있어요. 그런데 현장실습처의 약 15%가 이러한 노동법 사각지대인 5인 미만 기업이라고 해요. 홍정운 군이 일했던 요트업체도 1인 기업이었어요. 5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처벌법도 적용되지 않는 곳인데요, 노동자가 일하다 죽어도 형사적 책임을 지지 않다보니 기업이 안전 의무를 소홀히하기 쉬워요.
영화 <다음 소희>의 정주리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왜 그런 곳에 애들을 보내야 하지?”라는 의문에서 영화제작이 시작됐다고 말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더불어민주당의 강득구 의원은 공공기관, 공기업 같은 양질의 일자리에서 아이들이 현장실습을 해야한다고 주장했고요, 같은 당의 강민정 의원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현장실습이 이뤄질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면서 현장실습 기업을 선정할 때 산업재해 발생 빈도를 의무적으로 고려하게 만드는 법안을 냈어요. 한편 정부는 현장실습산업체에 공공기관과 대기업의 참여를 의무화하거나 업체별로 산재 정보를 공개하는 입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라고 전해졌어요.
2. 일하는 실습생의 기본권을 보장해줄 제도를 만들어라
위에서 현장실습생은 근로자가 아닌 교육생으로 여겨진다고 말씀드렸죠. 때문에 ‘노동자라면 최소한 이정도는 지켜주자’고 만든 보호제도의 범위에서 제외되는 문제가 있어요. 아이들은 어쩌면 기본권을 보호해줄 최소한의 장치도 없이 노동현장에 나갔던 거예요. 아이들이 한명씩 죽을 때마다 현장실습생에게 특례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하나씩 보호제도를 늘려왔는데요, 영화 <다음 소희>가 화제가 되면서 보호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보여요.
국회 교육위원회는 이은주 정의당 의원과 서동용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뒤 1년째 묵혀두던 법안을 지난달 말 통과시켰습니다. 이 법안은 근로기준법의 직장내 괴롭힘 금지, 강제 근로의 금지, 폭행 금지 등의 조항을 현장실습생에게도 적용하게 만드는 내용이에요. 현장실습생을 상대로 사업주가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성을 부여하는 거래요. 늦었지만 법제사법위원회과 본회의까지 무사히 통과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논의되어야 할 법안이 또 있어요. 중대재해처벌법의 보호대상에 현장실습생이 빠져있거든요. 중대재해처벌법은 근로자 사망과 같은 심각한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고 예방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인데요, 현장실습생도 이 법의 적용 대상이 되게하는 특례조항이 없어요. 심지어 대검찰청에서 만든 ‘중대재해처벌법 벌칙해설서’에는 이렇게 쓰여있어요.
전문가들은 중대재해법이 보호하는 종사자 범위에 현장실습생이 포함될지 불투명하다고 지적해요. 이런 문제 때문에 정의당 강은미 의원은 중대재해처벌법상 종사자의 범위에 현장실습생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 했는데요, 이처럼 현장실습생의 지위를 근로자로 인정하는 법적인 변화가 더 필요합니다.
3. 학교의 ‘학생 장사’를 막아라
사망한 현장실습생들이 다니고 있던 학교의 공통점은 ‘묻지마 취업’을 시켰다는 거예요. 반려동물을 전공한 학생이 콜센터에서 해지방어 업무를 하게 만들고, 전자상거래를 전공한 학생이 외식업장에서 하루종일 스프 냄비를 젓도록 하는 게 교육인가요? 이렇게 마구잡이로 학생들을 취업시킨 특성화고들은 성과급을 챙기며 ‘학생 장사’를 한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무책임한 학생장사를 부추긴건 교육당국이고요. 일부 교육청은 “실습 중 사고가 나도 학교에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 양식을 만들어서 학교에 전달해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서명을 받게 했어요.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성과만 챙기면서 학생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을 궁리만 열심히 하는 모습,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망한 현장실습생들이 다니던 학교는 학생들과 상담도 진행하고, 교사가 직접 실습처에 방문하기도 했다는데요, 이 같은 점검활동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막지 못했다고 학생들은 지적했어요. 학생이 부당한 일을 겪고 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줄 유인이 학교입장에선 없어요. 오히려 학생의 호소를 듣고도 그냥 다니라고 강요할 유인만 있죠. ‘취업률 높이기’가 성과로 측정되니까요. 특성화고와 교육청이 교육기관답게 기능하려면 학생의 전공과 적성을 고려해 안전한 일터로 보내는 일, 정당한 대우를 받도록 나서는 일이 의무여야 해요.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학생이 사망했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묻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힘든 일을 하면 존중받으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이나 한다고 더 무시해.”
<다음 소희>에서 소희의 죽음을 파헤치던 경찰이 자살 뒤에 숨겨진 구조적 문제를 깨닫고 내뱉은 말인데요, 우리 사회 문제점을 잘 나타내주는 대사라고 생각해요. 이윤을 좀 더 남기려고 법을 안 지키고, 지원금을 받으려고 문제를 외면하고, 성과를 더 내려고 같이 일하는 동료를 압박했던 사람들 때문에 학생들이 죽었잖아요. 그런 행태를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구조 안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소희와 같은 얼굴을 한 노동자를 주변에서 본 적 있나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며 일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것 같아요. 힘든 일 하는 사람들을 더 무시하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한국사회의 현실, 이제는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PS. 미션100의 첫번째 레터를 마치며, 또 다른 소희들에게 이 노래를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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