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쏘 저널 Vol.4] 사물 사이를 그리는 법

비어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그림의 호흡

2026.07.28 |

안녕하세요. 미사의 조용한 시각 창작 공간, <아뜰리에 모르쏘>입니다.

오늘 저널을 읽기 전, 책상 위를 잠시 바라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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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그컵과 연필꽂이, 의자와 테이블, 화분과 창문.

우리는 보통 그곳에 놓인 물건을 먼저 봅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물건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컵과 연필꽂이 사이의 거리, 의자 등받이 사이로 보이는 벽, 화분 잎과 창문 사이에 생긴 작고 불규칙한 공간까지 함께 바라봅니다.

오늘은 무엇인가를 더 자세히 그리는 대신, 그동안 보지 못했던 비어 있는 곳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 Morceau Curation

오늘의 음악: 빌 에반스, 〈Peace Piece〉

오늘은 음악을 따라가기보다, 음과 음 사이에 잠시 머물러보세요.

건반이 울리고 다음 소리가 시작되기 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짧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이 없다면 각각의 음은 자신의 형태를 갖지 못합니다.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을 둘러싼 빈 공간이 있어야 컵은 컵이 되고, 사람은 사람이 되며, 하나의 장면은 비로소 호흡을 갖게 됩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오늘은 음악보다 음악 사이의 고요함을 들으며 천천히 내려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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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LUMN

여백은 정말 비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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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수업에서 사과를 그려보자고 하면 대부분은 사과의 둥근 외곽선을 먼저 그립니다.

선을 따라가며 사과를 그리다 보면 어느새 이런 생각이 시작됩니다.

 

‘왼쪽이 너무 납작한 것 같은데.’

‘크기가 조금 작은가?’

‘왜 사진처럼 보이지 않지?’

 

대상을 정확히 그려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사과 안에만 갇혀버립니다.

그럴 때는 사과를 잠시 잊어보세요.

사과 왼쪽과 종이 끝 사이에는 어떤 모양의 공간이 있나요? 꼭지와 배경 사이에는 작은 삼각형이 보이나요? 사과 아래의 그림자와 바닥이 만나는 선은 수평인가요, 기울어져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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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흔히 말하는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는 대상의 주변과 대상 사이에 남아 있는 공간을 뜻합니다. 표시되지 않은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화면의 균형과 형태를 결정하는 적극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사물을 그리는 대신 그 주변의 공간을 그리기 시작하면, 뇌가 이미 알고 있는 ‘사과의 기호’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과는 둥글다’는 생각 대신, 눈앞에 실제로 놓인 사과와 종이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은 대상 하나를 종이 위에 옮기는 일이 아닙니다.
대상과 대상, 그리고 종이의 가장자리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2. ART HISTORY

모란디가 평범한 병을 계속 그린 이유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는 화려한 풍경이나 극적인 사건 대신 병과 주전자, 상자와 그릇처럼 일상적인 물건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Natura morta, 1938  
  Natura morta, 1938  

그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물건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오래 사용한 유리병과 작은 용기들이 탁자 위에 조용히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같은 물건이라도 서로 얼마나 가까이 두는지, 하나를 얼마나 뒤로 물리는지에 따라 화면 전체의 긴장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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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디는 1890년 볼로냐에서 태어나 1964년 같은 도시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작은 규모의 정물화와 판화를 꾸준히 제작했습니다. MoMA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소장품에서도 병·주전자·그릇의 단순한 배열과 흑백의 관계를 탐구한 그의 작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란디의 그림을 볼 때는 병의 모양만 보지 말고, 병 사이의 틈을 바라보세요.

Still Life, 1948-1949
Still Life, 1948-1949

두 병이 거의 맞닿아 있는 곳에서는 작은 긴장감이 생깁니다. 조금 떨어진 물건 사이에서는 고요한 호흡이 느껴집니다. 앞의 병이 뒤의 병을 가리는 순간에는 화면에 깊이가 만들어집니다.

그가 그린 것은 어쩌면 병이 아니라, 병들이 서로에게 만들어주는 거리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방이라도 의자의 위치가 달라지면 분위기가 바뀌고, 같은 사람이라도 누군가와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리 서 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관계와 거리, 기다림과 긴장이 들어 있습니다.


3. MATERIAL ARCHIVE

화가의 질문에서 태어난 색

세넬리에(Sennelier)와 오일파스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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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재료를 구입할 때 우리는 보통 색상과 가격, 사용감을 먼저 살펴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연필과 물감, 파스텔에는 한 시대의 기술과 예술가들의 고민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하나의 미술 재료 브랜드를 골라, 그 도구가 어떤 필요에서 만들어졌고 예술가의 표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브랜드는 프랑스 파리의 세넬리에(Sennelier)입니다.


루브르 맞은편의 작은 색채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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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화학자이자 색채 연구자였던 귀스타브 세넬리에는 파리 센강변의 케 볼테르 3번지에 미술 재료점을 열었습니다.

가게는 루브르박물관 맞은편에 있었고, 파리 보자르와도 가까웠습니다.

그는 이미 만들어진 물감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안료의 성질과 사용법을 연구했습니다. 색을 어떤 비율로 혼합해야 하는지, 물감의 투명도와 불투명도를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며 자신만의 제조 방식을 발전시켰습니다.

 

이곳은 단순히 미술용품을 사고파는 상점이라기보다, 예술가가 작업 중에 만난 문제를 이야기하고 제조자가 새로운 해결책을 연구하는 장소에 가까웠습니다.

세넬리에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점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새로운 재료가 먼저 만들어지고 예술가가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원하는 표현을 먼저 말하고 재료 제작자가 그에 맞는 도구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피카소가 원했던 색 막대

1949년, 파리에서 활동하던 화가 앙리 괴츠는 자신의 친구 파블로 피카소를 위해 새로운 재료를 만들어 달라고 앙리 세넬리에에게 요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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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캔버스뿐만 아니라 나무와 종이 등 여러 표면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 쉽게 갈라지거나 변색되지 않는 색채 재료를 원했습니다.

이 요청을 계기로 안료와 결합재, 왁스를 혼합한 세넬리에의 오일파스텔이 만들어졌습니다. 세넬리에 공식 기록에 따르면 피카소는 당시 루브르 맞은편의 세넬리에 상점을 자주 찾던 고객이기도 했습니다.

오일파스텔은 연필처럼 손에 직접 쥘 수 있지만 물감처럼 색을 두껍게 쌓을 수 있습니다.

선을 그을 수도 있고, 넓은 면을 채울 수도 있으며, 손가락이나 도구로 색을 밀고 섞을 수도 있습니다. 재료와 손 사이에 붓이 없기 때문에 손의 압력과 움직임이 화면에 직접 남습니다.

세넬리에 오일파스텔은 안료와 합성 결합재, 미네랄 왁스를 사용해 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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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는 표현의 결과일까요, 시작일까요?

새로운 미술 재료는 종종 새로운 표현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세넬리에의 오일파스텔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 순서가 반대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피카소에게는 먼저 하고 싶은 표현이 있었습니다.

여러 표면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리고 싶었고, 연필보다 강한 색을 사용하고 싶었으며, 물감처럼 복잡한 준비 없이 곧바로 색을 꺼내고 싶었습니다.

그 필요가 새로운 도구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래서 미술 재료를 선택할 때 반드시 가장 유명하거나 값비싼 제품부터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물어보는 편이 좋습니다.

나는 어떤 선을 그리고 싶은가?
색이 종이 위에서 매끄럽게 움직이기를 원하는가?
거칠게 걸리고 부서지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가?
천천히 색을 쌓고 싶은가, 한 번에 강한 흔적을 만들고 싶은가?

재료의 이름보다 먼저 자신의 표현을 생각하면, 도구를 고르는 기준도 조금씩 분명해집니다.


오늘의 재료 실험

오일파스텔 한 자루로 여백 그리기

오늘 실습에는 어떤 브랜드의 오일파스텔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진한 색 한 자루와 작은 종이를 준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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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이나 화분 하나를 책상 위에 놓은 다음, 사물을 직접 그리지 않고 사물 주변의 빈 공간만 오일파스텔로 채워봅니다.

오일파스텔을 눕혀 넓은 면을 채우고, 사물 가까이에서는 끝부분을 세워 천천히 경계를 그려보세요.

압력을 세게 주면 진하고 단단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힘을 빼면 종이의 결이 드러나는 가벼운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같은 색 하나를 사용해도 손의 압력에 따라 서로 다른 밀도와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실습을 마친 뒤에는 그림 옆에 짧게 기록해 보세요.

“이 재료는 내 손의 움직임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재료를 이해한다는 것은 제품의 특성을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그 도구를 사용했을 때 내 손이 어떻게 움직이고, 내가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4. MORCEAU DRAWING

컵을 그리지 않는 10분 드로잉

오늘은 책상 위에 있는 컵 하나를 준비해 주세요.

연필이나 검은색 펜, 그리고 작은 종이 한 장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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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컵을 종이 한가운데 놓지 않습니다

종이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치게 배치해 보세요.

컵이 중심에서 벗어나는 순간, 컵 반대편에 넓은 빈 공간이 생깁니다.

② 컵의 이름을 잠시 잊습니다

‘손잡이가 있는 원통형 컵’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대신 컵 왼쪽에 생긴 공간, 손잡이 안쪽의 구멍, 컵 바닥과 책상 사이의 그림자를 바라봅니다.

③ 사물이 아니라 주변의 모양을 그립니다

컵의 외곽선을 그리지 않고, 컵 바깥의 빈 공간부터 천천히 선으로 둘러싸 보세요.

손잡이 안쪽의 작은 공간도 하나의 독립된 도형처럼 관찰합니다.

④ 한쪽 공간을 검게 채웁니다

컵 주변의 공간 중 한 부분만 골라 연필이나 펜으로 어둡게 채워보세요.

컵은 직접 그리지 않았지만, 빈 공간이 채워지면서 흰 종이 위에 컵의 형태가 자연스럽게 나타납니다.

⑤ 잘못된 선을 지우지 않습니다

컵과 똑같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늘의 목적은 예쁜 컵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없는 곳에도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완성한 그림 옆에는 짧게 한 문장을 적어보세요.

“오늘 내가 발견한 빈 공간은 ______처럼 보였다.”

구름처럼 보일 수도 있고, 작은 동물이나 낯선 나라의 지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 모양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5. STUDIO STORY

그림을 그리기 전에 자리를 만드는 일

화실 수업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림 도구를 꺼내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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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의 물건을 정리하고, 의자 사이의 거리를 맞추고, 각자의 종이가 충분히 놓일 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종이가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선을 의식하게 됩니다. 반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도 혼자 작업하는 기분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업 전의 빈 테이블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집중할 수 있는 거리인지, 옆 사람의 작업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지, 잠시 손을 멈추고 차를 놓을 자리가 남아 있는지.

그림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단순히 책상을 치우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편안하게 머물고, 자신의 속도로 관찰할 수 있는 심리적인 여백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뜰리에 모르쏘의 수업에서는 종이를 빠르게 채우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한동안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사물을 바라보아도 괜찮습니다. 어디에서 첫 선을 시작할지 충분히 망설여도 괜찮습니다. 그 망설임까지도 그림을 이루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6. MORCEAU NOTE

이번 주에는 하나를 비워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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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답답해 보일 때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더 그리려고 합니다.

배경에 색을 칠하고, 비어 있는 곳에 장식을 넣고, 부족해 보이는 부분에 선을 더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더하는 것보다 남겨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번 주에는 그림 한쪽을 의도적으로 비워보세요.

화면의 절반에만 사물을 그려도 좋고, 인물의 시선이 향하는 쪽에 넓은 공간을 남겨도 좋습니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세요.

비어 있는 곳이 그림을 허전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사물에게 조용히 숨 쉴 자리를 만들어주는지 살펴보세요.

그림에서 여백을 받아들이는 연습은, 어쩌면 일상에서도 모든 시간을 유용한 일로 채우지 않는 연습과 닮아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급하게 완성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그 비어 있는 시간 속에서 생각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MORCEAU INVITATION

당신의 그림에 숨 쉴 공간이 필요하다면

<아뜰리에 모르쏘>의 마인드풀 드로잉은 대상을 똑같이 복제하는 방법보다, 오래 관찰하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배우는 수업입니다.

선을 잘 긋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미술을 오랫동안 쉬었어도 괜찮습니다. 무엇을 그려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최대 4명이 함께하는 작은 테이블에서 각자의 속도에 맞춰 진행합니다.

이번 뉴스레터의 10분 드로잉을 해보며 조금 더 깊이 그림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아래 페이지에서 수업 내용과 상담 방법을 확인해 주세요.

[아뜰리에 모르쏘 수업 및 상담 확인하기]

 

그림을 가득 채우기 전에, 당신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작은 여백부터 마련해 두겠습니다.

화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

아뜰리에 모르쏘 일상의 조각을 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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