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다 보면, 이상하게도 상대방보다 나라는 사람의 윤곽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단짝친구가 세상의 전부였죠. 등하굣길은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같이 가는 밀착형 관계 속에서, "너랑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을 공유하며 내 세상의 크기와 존재감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20대에는 아마 ‘사랑’이라는 연애사업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을 겁니다. 온갖 시시콜콜한 TMI와 밑바닥 감정까지 싹 털어놓으며 나라는 인간의 민낯을 확인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메커니즘이 조금 달라집니다.
매일 붙어 다니며 서로의 삶을 깊게 공유하는 친밀한 관계보다,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느슨한 관계 속에서 나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무언가를 시작하면 오래 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뜨겁게 몰입해 미친 듯이 파고들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끝냈다는 느낌보다는, 지루하게 오래 끌고 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뜨겁지 못할까', '집중이 부족한가', '열정이 부족한가'
그럴 때면 어김없이 이런 자책이 따라옵니다. 언젠가 저의 이런 고민을 적어둔 글을 읽고 도자기 선생님이 남겨주신 답글이 있습니다.
"타오르고 빨리 식는 열정은 넓은 구덩이를 팔 수 있지만, 꾸준함은 시간이 걸려도 구덩이를 깊게 팔 수 있죠. 굳이 '깊이'를 목표로 하지 않아도요. 그런 의미에서 항상 보여주시는 꾸준함이 늘 멋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내 안에서 자책하고 있던 부족함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준 겁니다. 스스로를 ‘열정이 미지근한 사람’이라 단정 짓고 있을 때,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내가 보지 못했던 나를 보여준 셈입니다.
이 뉴스레터로 이어진 분들도 비슷합니다. 서로의 일상을 속속들이 다 알지는 못하지만, 글 한 편을 매개로 주고받는 짧은 답장이나 인사 같은 것들. 내 삶의 중앙까지 깊숙이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스쳐 지나가지도 않는 관계.
저는 요즘 이런 적당한 거리의 관계가 주는 힘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나를 설명해주는 것과, 나를 조금밖에 모르는 사람이 어느 순간 정확한 한마디를 건네주는 것은 꽤 다른 경험이니까요.
어쩌면 나를 발견하는 데에는 꼭 깊은 관계만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 있는 사람이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더 잘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적당한 거리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요즘 여러분의 일상에는 어떤 느슨한 관계가 자리하고 있나요?

🎙️부기장의 한마디
저는 조금 내성적입니다. 그래서 업무로 만난 느슨한 관계로 저녁 자리를 갖게 되면 어색함을 이겨내고자 꽤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그렇게 술의 힘으로 느슨한 관계를 채우고 다음 날엔 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에게 이제 말 놓기로 하지 않았냐는 얘기를 몇 번 들었었죠.
그게 저는 인간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너무 친해지면 거리감 없이 달려드는 친구라는 관계가 싫었고, 20대에는 그럴 듯한 연애를 매개로 진지함 사이에 나를 속이는 관계가 싫었고, 30대에는 일이라는 둘레에 억지로 삼키는 술친구가 싫었습니다.
지금도 그다지 사람 관계는 편하지 않네요.
천진하게도 기장님과 비행시간이 저는 세상 제일 좋네요.
싫은 걸 해내는게 어른의 삶이라면 저는 아직 어른은 아닌가 봅니다.
🔭 보란더의 시선
사실 저는 부기장님이 내성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건 아마 가까운 사이에서 보는 모습일까요. 제가 그렇게 느끼는 건 부기장님이 말이 조금(?) 많기 때문일 겁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곧잘 대화를 이어가고, 어색한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봤으니까요.
어쩌면 둘 다 맞는 거겠죠. 누군가에게는 말이 많고 편안한 사람으로 보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관계를 위해 애쓰는 내성적인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저도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바라보는 나와, 제가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또 누군가가 전혀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나가 모두 다를 겁니다. 어떻게 보이든, 그 모든 모습이 결국 나일 테죠.
중요한 건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를 고르는 게 아니라, 그 여러 모습의 나를 얼마나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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