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슬기

시와 노가리 ep.6 거짓말처럼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2023.06.25 | 조회 2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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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무언가 끝이 나버린 삶으로 시가 스며들어 연명을 설득하리라 믿는다. 설득된 삶이 자꾸만 덧대어져서 그것이 또 다른 선의가 되리라 믿는다.

지난 여름, 강원도 홍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 첫 책을 출간한지 3개월 정도가 흐른뒤 였고, 친 동생을 떠나보내고 한 해를 넘긴 시점이었다. 부연하자면, 이승희 시인의 시에서 빌려온 한 구절을 제목으로 달고 나온 <수신인이 없는 편지>, 그러니까 나의 첫 책은 썼다기보다 옮겼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거기에는 동생의 마지막을, 마지막보단 기억을, 기억보다 울먹임을 옮겼다.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던 것이 나의 첫 책이었다. 내게 출간은 일종의 입장이자 태도였다. 무언가 이미 끝나버렸다는 비관적인 선언에 그것을 단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 거짓말 같은 이야기들을 한 번 더 믿어봐야 한다는 태도. 그 해 여름을 그런 막연함으로 지냈다.

홍천의 사회활동가인 사량씨에게 연락이 온 것은 그 무렵이었다. 오랜 이웃인 예솔씨의 블로그를 통해 내 책을 알게 되었다고 전한 사량씨는 길고 간곡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지역의 아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내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냐는 부탁을 했고,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래도 곧 만나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무엇을 이야기하면 좋을까 준비하던 기간에 오랜 친구와 나눈 편지를 모았고, 작가 노트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나의 필사 노트와 이승희 시인의 시집 한 권을 가방 속에 넣었다.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리라 예감했다.

홍천에 발을 내 디뎠었던 시점은 긴 장마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작은 강 하나를 끼고 따라 걷는 길마다 사람의 키만한 옥수수대를 볼 수 있던 그 도시는 날씨와 더불어 어딘가 고요하고 눅진했다. 그곳에서 나를 반겨주던 사량씨와 독자들에게도 그런 기운을 느꼈고, 나는 그 차분하고 부드러우며 조곤조곤한 환대가 좋았다. 우리가 만났던 장소는 산 중턱의 고즈넉한 카페였다. 소박한 삶(Rustic Life)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에서 우리는 빙 둘러앉아 서로를 마주했다. 내가 적은 문장들을 낭독하고, 편지를 쓰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잠시 직접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승희 시인의 시집을 꺼내 한 편의 시를 읽어 주었다. 수신인이 없는 편지라는 말이 적힌 시였다.

 

1. 살고 싶어서 가만히 울어본 사람은 안다 목을 꺾으며 흔적 없이 사라진 바람의 행로 그렇게 바람이 혼잣말로 불어오던 이유 이쯤에서 그만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나에게 끝없이 수신인 없는 편지를 쓰게하는 이유 상처의 몸속에서는 날마다 내 몸에서 풀려난 괴로움처럼 눈이 내리고 꽃 타위로는 피지 않을 검고 단단한 세월이 바위처럼 굳어 살아가고 있지 2. 손목 그어도 돼 여윈 손목 골짜기마다 아스라이 꽃 피우도록 끝없이 거절하는 일 죽을 만큼 분노하는 일 그리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 낡은 사전에 오래 입 맞추는 밤이 다 지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말 -이승희, '상처라는 말'

 

홍천에서 나는 그간 살고 싶어서 편지를 썼다고 말했던 것 같다. 먼저 떠난 사람을 애도하는, 그렇게 남겨진 사람의 입장에서 죽을 용기로 살지라는 말이 가장 큰 상처라고 했던 것 같다. 죽을 용기로 살아야 한다는 말에는 그 용기까지의 고통과 울먹임은 생략되어 있다. 내가 들은 어떤 말들은 한 사람의 삶과 입장을 설명하기에 때론 부주의하고, 세심하지 못하며, 빈약했다. 그래서 말은 때론 거짓에 가깝고, 말로 점철된 삶은 더욱 거짓 같아서 잘 믿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여름에 피는 맨드라미를 보고 싶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자세히 보면 꽤나 흉측하고 못생긴 꽃인 맨드라미를 올해에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거짓말처럼 또 보게 되었다고. 그렇게 막연하게 피어나는 일들을 믿어보고 싶다고.

그날, 홍천의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 중 하나를 골라 이곳에 옮겨 놓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무언가 끝이 나버린 삶으로 시가 스며들어 연명을 설득하리라 믿는다. 설득된 삶이 자꾸만 덧대어져서 그것이 또 다른 선의가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선의가 시의 마음이라, 나는 믿는다.

 

슬기님, 안녕하세요. 슬기님은 극강의 I를 가지고 계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수신인이 없는 편지'를 읽고 이 글들은 여성이 쓴 거라 100% 확신했었거든요. 이 자리에 와서 작가님이 남성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정말 놀랐습니다. 제 소개를 깜빡했네요. 저는 효숙입니다. 이 카페가 있는 마을의 아이들을 돌보는 기관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어요. 오늘과 같은 시간들이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를 느끼는 마을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슬기님, 책을 읽으며 작가님의 외로움이 많이 느껴졌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꼭 오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슬기님의 “안녕”을 눈에 담고 싶음이었습니다. 눈으로 확인한 지금 안도감을 느낍니다. 작가님이 사랑하는 이가 있고, 존재함으로 위로를 주는 친구분들도 계시고, 슬기님은 분명 행복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드니까요. 내내 슬기님의 안녕을 기도할게요. 내년에도 거짓말처럼 맨드라미를 느끼시기를. 2022. 07. 16 홍천에서, 효숙 드림. - '홍천에서 온 편지'

 

 


º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2012)

 

 

김슬기 작가의 <시와 노가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잔 대신 시집을 듭니다. 술 대신 시를 나눕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시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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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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