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해경

[휴재 특집] 힘 내는 말

김해경 산문 - 쉼 (2)

2023.08.01 | 조회 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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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무덥다. 여기서 무-는 하염없이, 속절없이, 너무, 아주 쨍하게, 라고 한다. 그러니까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고 시작하는 말의 무와 비슷한 것이다.

국어학자인 내 친구가 이 글을 본다면, 무어라 미친 소리를 늘어놓은 거냐고 바로 카톡이 오겠지? 국문학자인 내가 봐도 이건 시적 허용을 넘어선 문법적 무용론을 펼치고 있는 셈일 테니. 그러나 우리 인생을 통틀어 들여다보면 글자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의미보다도 무시 당하는 생의 날들이 참 많아서. 나는 소심한 반항이라도 해보는 것이겠다.

탁자 위에 놓인 커피가 다 식기 전에 써야 하는 글이라서 그런지, 곱씹어 보지도 못하고 스쳐낸 시간들이 참 많다. 예컨대 우리 엄마의 오늘 하루는 어땠나, 하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하루를 다 보냈을 때 드는 죄책감이랄까. 말을 꺼내면 그제야 아차, 하고 다가오는 형태소 같은 얼굴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미리 사랑하고 미리 아껴서, 젊은 날 쓸 수 있는 글을 다 쓰려고, 그래서 억만 년이 지나서도 남은 기록 속에서 우리가 지니고자 했던 마음의 문면을 누군가가 알아보도록 예비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턱없이 허술한 이 마음은 오늘도 엄마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래 뭐, 아빠는 또 어떻겠고. 멀리 여행을 떠난 할머니는 어떻겠나.

기도를 한다. 식전 기도를 하는 애인 앞에서 기도하는 척을 한다. 무슨 말을 빌어야 할지 몰라서 건강하세요, 라고 했다. 이럴 때면 건강이 무의식의 최고 심급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에겐 돈일 테고, 또 어떤 사람에겐 사랑일 테지만. 나에게 요즘 제일 중요한 건 건강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왠지 더 의연해진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후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머니 꽃길 걸어 저 멀리 뙤약볕 비추이는 무더위 속으로 하얗게 멀어져갈 때, 흙바닥에 무릎을 대고 절을 하다 눈물을 훔치는 아버지를 본 후로 더욱, 나는 건강해야 한다고. 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할 줄도 모르는 기도를 하면서, 친애하는 머릿속 얼굴들의 안위를 챙기면서, 나는 다시 오래된 서랍에서 사진첩을 꺼내듯 힘 내는 말들을 꺼내 놓고 두런두런 정리하고 있다. 어떤 인생은 할 말도 없었다. 어떤 시절은 겁만 많았다. 어떤 문장 속에서 삼시세끼를 다 챙기고도 모자라서 사랑을 하려고 집을 지었던 날들도 있었다. 하루는 옷을 보자기 삼아 흙을 퍼왔는데, 모두가 울고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가. 글을 쓴다는 건 언제까지나 그리움의 탑을 쌓다가 끝나는 일인가. 그래서 그리워할 일도 다 허비해버리고 나면 조용히 눈을 감는가. 눈을 감고 고요에 몸을 맡기는 순간 쨍그랑ㅡ하고 깨지는 꿈의 균열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인생의 비린 알들. 그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가. 무엇이 태어나려고 우리 이토록 슬픈 날들 견뎌가면서, 힘 내는 말도 금기에 부치고 살아왔는가. 그러지 말자.

힘내자. 모든 아나키스트들. 모든 낭만주의자들. 모든 집시들. 모든 모더니스트들과 T들. 그리고 모든 애인들과 모든 아버지, 어머니, 시인. 모든 아무들. 모든 모두들.

커피는 다 식었다.

_ 다음 편에 계속

덧, 7월 20일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이제 할머니집 가면, "웅기 왔나" 소리 못 듣는다. 내게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라곤 이 네 글자가 전부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음절이, 같이 서 있지 않으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이 네 개의 글자들이. 조금 그립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조금씩 그리움도 커지겠지. 우리 할머니, 하늘에서 우리 다 보살펴주느라 울지도 못하고 날이 종일토록 맑으니, 무더위에 얼굴 빨개져도 무한한 사랑이리라. 할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편히 쉬세요.

 

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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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프로젝트 『물성과 해체』는 다양한 예술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장르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가진 에세이를 통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때로는 희망차고 때로는 비참할 이야기. 그러나 아마추어처럼 달려들고 프로처럼 진지할 이야기. 변화가 두렵지만 변화해야 할 때도, 견디는 게 지겹지만 견뎌야 할 때도, 우리는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네, 우리는 영원히 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달라질 것입니다. 견딜 때보다 벗어날 때 더욱 성장하는 가재처럼, 벗어남이 무한하다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영원처럼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술처럼 영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성과 해체』의 공간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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