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정말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부칩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깊은 동굴 속에 숨어서 흠씬 다친 부위를 핥아대는 여린 짐승 같은 나의 성정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당신이 그간 내게 보내준 편지를 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많은 날들이 햇빛에 하얗게 소멸되었고 나도 어떤 날은 그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이렇게 오늘처럼 뚜렷이 남은 까닭엔 당신이 보내신 몇 마디의 말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때 아닌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동안 글을 쓸 수 없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글을 쓰기가 싫었습니다. 글을 쓰면 남들과 똑같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편지라는 형식을 빌리곤 있지만 당신에게 보내는 몇 줄의 문장조차 버겁고 거칠기에 짝이 없습니다. 왜 그런 걸까요. 당신에게 답을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마음은 이제 여름을 지나 '왜'로 변하였습니다. 물음표가 된 이 세계에서 꿈꿀 수 있는 생명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칠 월은 유독 힘든 날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런데 힘이 들수록 사람들 곁을 떠나 있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사람들에게 힘듦을 고하고 함께 이겨내는 편인가요, 아니면 당신도 나처럼 방안에 작은 촛불 하나 켜두고 어둠에 몸을 기대는 편인가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삶에 대한 생각. 사랑에 대한 생각. 미안함의 종류와 문학성이라는 마음에 대한 생각.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을 한 줄로 줄이진 못했습니다. 그런 결단이 생기지 않더군요. 그저 생각이 생긴 대로 뻗어나가서 내 머릿속은 아무도 오지 않는 우거진 정원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건 분명해요. 문학은 자기치유를 위한 적극적인 정신차림 그 자체라는 것. 그간 문학을 자기 손으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우월감 또한 문학에 의지한 자기치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문학을 정신으로 바꿔 말하고, 공감이나 연대로 바꿔 말하고, 심지어 노동이나 돈으로 바꿔 말해도 그것은 자기 세계의 안식을 위한 은유에 불과하단 것. 그래서 문학은 자기 몸을 해치는 수많은 슬로건과 자기 정신을 해체하려는 숱한 단체행동에도 그 모두를 하나의 메타포로 수렴시키는 거대한 마음이라는 것.
나는 문학이 마치 신처럼 느껴졌습니다. 신은 그런다면서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든 그것이 자신의 계획이요, 시험이요, 자비라면서요. 이제 지칠 대로 지쳐버린 육신이지만 인간에게는 영원히 숭고한, 그런 존재라면서요.
내게 제일 숭고한 존재는 문학 같아요. 문학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서러워지고, 아프지만, 아름다운 육체를 본 듯 등 위로 긴장이 서고 문장 뒤에 서 있을 하나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를 하게 돼요. 부디 잘 살라고. 정신을 해치는 애정들로부터 몸을 잘 보살피라고. 그리하여 또 건강한, 나의 신이 되어주시라고.
나는 이제 우울하지 않아요. 나는 언제든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도 나는 이제 우울하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엔 여전히 당신과도 같은 과분한 애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공평한 거라서, 당신에 버금가는 유실된 우울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너무 잘 알아버리고 말았다는 또 하나의 사실 자체가 나를 더이상 우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운을 되찾은 기분이에요.
당신. 우리가 만났던 초여름에 당신이 해주었던 이야기들 끝에 작은 아기의 머리 같은 우울들이 콕콕 찍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극복한 것처럼 말했지만, 당신이 주는 응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그래서 언젠가는 당신의 몸을 조용히 갉아냈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학이든 신이든, 상관없이 서로를 지탱한다는 사실도 압니다.
잠깐이었지만, 떠나서 미안했습니다. 나는 줄곧,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여름을 지나왔습니다.
그래도 편지하겠습니다.
2023.8.15.
가을을 예견합니다
김해경 드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는 매주 친애하는 당신을 찾아갑니다. 광연과 해경이 주고 받는 편지 속 친애하는 당신의 삶에서 부디 안식을 찾을 수 있길.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