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긴 우기는 끝이 보일 기미가 없고, 산뜻하게 외출하고 싶은 주말마저 온통 눅눅해서 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다. 서재에 꽂혀 있는 책들이 축축한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이런 날은 샤워를 하고 가만히 앉아 감상에 젖는 일 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하며 유튜브를 시청한다. 스크롤을 쭉 내리다 보면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고침이 되는 영상들. Ebs 인문학 강의, 이동진 평론가의 리뷰, 고양이와 요리, 마빈게이의 음악, 그리고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 말려.
짱구는 못 말려?
뜬금없이 등장한 애니메이션 영상에 손가락이 멈춘다. 무심히 지나쳐도 좋을 법한 영상에 왠지 호기심이 생긴다. 그래, 시간이나 죽이지 뭐. 그렇게 시간을 죽이자고 놀렸던 손짓 한 번에 한참을 울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보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그 농담을 간과해서는 안 됐다.
나미리 선생님의 사랑이라고 불리는 이 영상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짱구가 다니는 떡잎 유치원의 선생님인 나미리에게는 이현우라는 연인이 있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이현우에겐 독특한 관심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뼈였다. 번듯한 외과의사로 살아가던 이현우는 어느 날 먼 이국의 화석 발굴에 지원하게 된다. 나미리 선생님은 기약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연인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이현우와의 만남을 거부한다.
발굴 현장으로 떠나는 이현우의 출국 당일. 여전히 연인을 그리워하는 나미리 선생님은 심란한 마음을 가누며 아이들의 등원을 돕는다. 그렇게 짱구의 집 앞에 도착한 나미리 선생님과 떡잎 유치원 셔틀버스. 무슨 이유 때문일까. 등원을 위해 멈춰 선 셔틀버스 앞에서 짱구는 엄마에게 떼를 쓰며 말한다.
보고 싶은 건 보고 싶은 거라고요.
그 말을 되새기던 나미리 선생님은 왈칵 눈물을 흘리며 이현우를 그린다. 그 모습을 본 원장 선생님의 조언.
나미리 선생님, 이제야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셨네요. 선생님이 먼저 솔직해져야 아이들의 마음도 솔직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자, 어서 가요. 공항으로.
그렇게 아이들과 나미리 선생님을 태운 셔틀버스는 공항을 향하고, OST로 삽입된 윤도현 밴드의 <사랑했나봐>의 노랫말이 흐른다. 바보인가 봐. 한마디 못하는. 잘 지내냐는 그 쉬운 인사도. 결국 나미리 선생님과 이현우는 공항에서 재회하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에피소드는 끝이 난다.
국내에 소개된 에피소드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이야기들은 희극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에 알려진 사실은 이현우는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되고, 소식을 들은 나미리 선생님은 실의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지만 짱구와 주변의 도움, 그리고 이현우가 남긴 마지막 편지를 통해 구생한다. 이런 서정이라니. 부리나케 떠오르는 시 한 편을 찾아 받아 적는다.
오스카 와일드에 따르면,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사랑을 잃는 비극이 하나. 나머지 한 가지는 사랑을 얻는 비극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모든 사랑의 귀결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라면 우리는 왜 사랑해야 하는가. 유튜브 댓글을 통해 알게 된 이현우의 마지막 편지는 이런 내용이다. 나는 화석을 찾아 과거를 파내는 일을 하지만, 당신은 아이들이라는 미래를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당신의 그 모습을 사랑한다.
이런 농담을 들은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 <둘리>의 고길동 아저씨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순간 너는 어른이 된 것이라고.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짱구>의 나미리 선생님을 이해한 나는 사랑을 알게 된 것인가. 이토록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사랑의 비극적 메커니즘을 역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비극이 단지 비극으로 남았을 때, 그것은 참극이 된다. 참극 속에서 우리는 늘 삶은 계속된다라는 사실을 자주 잊는다. 서로를 가득 채운다거나 아니면 먼지가 되어버린다거나 하는 사실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비극의 결말이 단지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도래할 다음이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밀도 높은 사랑은 비극을 내파 하며, 사랑의 밀도는 피로와 회복을 매개로 하여 쌓여간다. 그렇게 우리는 기뻐서 했던 말들이 미워하는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점진적으로 깨닫는다. 할 일을 다하고 강변에서 일어난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은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거나 다른 자리에 앉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우리는 다음이 있음을,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저 책의 첫 문장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거나 이별이거나.
그렇게 우리는 노래가 된다.
° 허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 지성사, 2020)
° YB의 <사랑했나봐>를 함께 들어주시길 부탁합니다.
김슬기 작가의 <시와 노가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잔 대신 시집을 듭니다. 술 대신 시를 나눕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시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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