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어김 없이 돌아왔습니다.
흐르는 장면을 붙잡아 빛의 힘으로 영원히 존속시키는 사진의 원리처럼 살아낸 순간을 문장의 힘으로 그려내 오래도록 머금는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진심은 울린다. 진짜 마음은 닿는다. 모든 막힌 담과 오해를 허물고.'
요 며칠 음미했던 문장입니다.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남고 싶습니다. 거짓 된 마음이 아닌 진짜 마음이고 싶습니다. 주고 받는 편지가 지속되는 시간만이라도 당신에게 기대고 있음을 느끼고 싶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수취인이 되면 좋지 않겠습니까. 산다는 게 무엇입니까. 당신과 전혀 상관 없이 제 존재의 부족함, 이 미안함, 이 미진함 앞에 떳떳해지기 어려운 삶일지라도 뻔뻔히 적어가는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살아야 하니까.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너로 하여금 최후의 순간까지 끊어지지 않는 게 우리의 삶임을 압니다.염치없지만 오늘도 당신의 무사함을 바라며 저의 무사함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어떤 날엔 현미경을 통해서야 간신히 보이는 아주 작은 것들의 세계를 관찰했습니다. 그들의 세상을 밝히고자 했던 인류의 노력에 힘입어 빨갛고도 파랗게 박제 된 모습을 샅샅이 훑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투는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주 미세하고 동시에 아주 거대한, 모순된 생명의 굴레. 꼬리에 꼬리를 문 뱀 같이 먹고 먹히는 그 순리를 엿보면서 아등바등하는 삶이 무색해졌습니다. 고유의 색이 없어진 게 아니라 모든 색이 동시에 들이닥쳐서 색이 없어진 것 같은 경이로움. 이 생경한 마음을 접어두고 재빠르게 검경하고 기록해내야 제 시간 안에 집에 갈 수 있다는 조급함이 밀려왔습니다. 삶을 감당하기 위하여 진실로 느낀 것들을 외면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렇게 살아내기 급급했습니다. 미생물의 삶도 그럴까.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며 눈알이 빠지도록 렌즈를 돌려서 간신히 퇴근 시간, 업무를 마무리 짓고 부랴부랴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지하철은 짙은 하루의 노고로 가득했습니다. 앉을 수가 없습니다. 다리는 퉁퉁 붓고 사람 내음으로 가득 찬 공간에 속은 울렁이는데 어느 누구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 이런거지. 이런게 삶이지. 목적지에 당도하기를 바라며 이 터질 듯한 마음을 참고 참아내는 것. 널려진 오징어처럼 말라가는 삶이 너무 고린내 나서 어떻게든 생각의 습기를 가지려 꾸역 꾸역 책을 펼쳤습니다.
어떤 현란한 문장과 수사를 동원한다고 해도 생사의 경계를 헤매는 이들의 사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다.그리하여 내가 읽은 불과 얼마 안되는 책들 중 , 늘 곁에 두고 살아온 소설가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를 등뼈 삼아 글을 정리해보려 애썼다. 김훈 선생은 자신의 책을 두고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살아 있는 몸으로 감당해내면서 이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한 사내의 운명에 관하여 말하고 싶었다. '희망을 말하지않고 , 희망을 세우지않고 , 가짜희망에 기대지않고 , 희망 없는 세계를 희망 없이 돌파해내는 그 사내의 슬픔과 고난 속에서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희망의 싹이 돋아나기를 나는 바랐다.'라고 했다.내게 칼의 노래는 나의 이야기였고 팀원들의 이야기였다.그리고 힘든 사회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했다.
특히 김훈 선생이 그려낸 이순신은 내가 26년 전 해군에서 군 복무를 할 때 만난 이순신의 모습과 정확히 같았다. 보직으로 부여받은 일을 수행하기위해 최선의 최선을 다하다 , 죽음으로써 힘겨운 세상에서 해방되고자 한 이순신에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의 모습을 보았다. 또한 세상의 모멸과 치욕을 오롯히 감내하면서도 알 수 없는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는 그에게서 조직 내 중간관리자의 고통도 보았다.김훈 선생이 그려낸 세상 속에 나와 내 동료들이 있었다.
이국종 , <골든 아워> 11~12쪽.
죽어가는 사람과 살려야하는 사람들의 고군분투. 생사의 현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거대한 이권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저자는 고뇌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기록했습니다. 그 소리 없는 저항 앞에서 맥없이 흐느적거리던 저의 허리가 세워졌습니다.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을 세우지 않고 가짜 희망에 기대지 않고 알 수 없는 무의미와 처절하게 싸우는 사람들 앞에서 숙연해졌습니다. 나의 작은 무사함이, 나의 하릴 없는 힘듬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몸은 비척거려도 마음은 다시 깜빡거리며, 희망을 절대 말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의 기쁜 바람을 말하고 싶습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진심으로 힘들어도 진짜 마음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게 아닐까요. 당신께 닿고 싶다는 일점의 각오로 그렇게 살아내는 거 아닐까요.
당신께 오롯이 닿고 싶습니다. 그렇게 묻고 싶습니다. 모든 막힌 것들을 허물고.
2023.09.05.
진짜 마음을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길 위에서
이광연 드림
김해경과 이광연 작가의 편지, 매주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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