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슬기

시와 노가리 ep.2 여름, 시시콜콜한 이야기

유혜빈, <8월>

2023.05.28 | 조회 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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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

에세이 프로젝트 : 글을 매개로 맺어질 수 있는 삶과 사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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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시시콜콜한 이야기

 

    윤오는 선풍기를 틀고 대자리에 누워 무성하고도 고루한 여름의 수식어에 대해 생각한다. 여름은 사랑이 자라기 좋은 계절이 아니던가. 여름은 열매가 맺히기 좋은 계절 아니던가. 윤오는 적당히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생각한다. 여름을 맞이한 윤오의 마음속에 사랑이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는 그따위 것들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일관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다른 말을 하면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고 아니 여전히 윤오의 대자리에 누워 있고 싶어 나는 대답했다)
    적당히 느린 바람이 윤오의 이마 위를 스치고 있다. 강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윤오의 머리맡에 등을 기대 잠들어 있고. 윤오의 머리 위일지 하늘 위일지 모르는 그 위로 윤오의 기억들이 순서 없이, 두서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윤오 아닌 것 없고, 어느 것도 윤오랄 것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저 지금 윤오는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칼의 흩날림, 대자리의 딱딱하고 시원한, 강아지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우리는, 어느 여름날에는, 윤오였거나, 윤오를 사랑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고, 부디 그래야만 한다.

유혜빈, <8월>

 

어린 시절 열이 많았던 나는 유독 여름에 자주 아팠다. 불명열(不明熱)이라고 했던가. 원인도 증상도 없이 열이 오르는 것을. 엄마는 그것을 두고 외가 쪽의 내력이라고 말했다. 외할머니, 삼촌과 이모들, 그리고 엄마까지도 여름마다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다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여름 앓이가 심한 나를 위해 싱글사이즈 이불 크기의 대자리를 내 방에 깔아 주곤 했다. 딱딱한 대자리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있으면 몸이 서늘해졌고, 나는 곧 혀를 빼 문 강아지처럼 엎드려 잠들었다. 그런 날 꿈을 꾸면 꿈의 키가 쑥쑥 자라나는 것 같았다. 여름은 아무래도 성장하기 좋은 계절 아니던가. 대자리의 서늘함. 내게 서늘함은 언어를 통해 처음 찾아온 여름의 수식어이자 촉감이다.

나의 여름에는 엄마의 사랑과 같던 대자리의 서늘함도 있지만, 떠올리면 아랫배를 저려오게 만드는 싸늘함도 있다. 그건 아마도 ‘윤오’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싸늘함일 것이다. 윤오. 윤오를 이야기하자면 이소라의 6집 앨범에 수록된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는 노래를 빼놓을 수 없다.

2004년 이소라의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그녀의 팬들 사이에서 무수한 추측이 이어졌다. 노랫말의 은유를 통한 여러 가지의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랫말을 통해 ‘윤오’라는 이름을 언급하며 그의 진짜 마음을 모르겠다고, 그 때문에 자주 속상하다고, 더 잘해달라면 그럴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이 노래를 듣는 이가 알 수 있는 정확한 사실은 무엇도 없다. 오로지 자극할 뿐이다. ‘윤오’라는 이름의 외연을 통한 순서도 두서도 없는 나의 기억, 나의 이야기, 나의 여름, 그리고 나의 윤오들을. 언젠가 이소라는 ‘윤오’라는 이름은 사랑하던 이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를 수 없었기에 가까운 지인의 이름에서 착안했다고 전했다. 이소라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이후로 ‘윤오’라는 이름은 꺼내기 힘든 비밀의 고유명사이자 대명사가 되었다.

어떤 시나 노랫말들은 여름의 대자리에 가만히 누워 자고 있는 윤오를 깨운다. 잠들어 있던 윤오는 때론 기억이고, 감각이며, 지나간 누군가나 무엇이고, 자신이다. 우리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여름 이야기들은 시시콜콜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때론 대자리의 서늘함보다 깊었고, 강아지에게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드는 한낮의 뙤약볕보다 높았다. 그 여름 앓이를 지나오거나 감당하고 나서야 이야기는, ‘윤오’는 겨우 시시콜콜한 열매를 맺는다.

8월은, 여름은 아직도 멀었다. 그러나 나는 시를 통해 여름으로 내달려본다. 소설가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의 한 장면처럼. 소설 속의 한 남자가 ‘너의 무기력을 사랑해, 너의 허무를 사랑해, 너의 내일 없음을 사랑해’라고 독백하며 한 여자에게 달려간 것처럼 나의 윤오에게로. 8월의 한낮은 가장 깊은 그늘을 만드는 계절. 그 계절은 서늘했거나 싸늘했거나, 이제는 너무나 시시콜콜한 사랑이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는 그따위의 것들. 그렇게 우리는 윤오였거나, 윤오를 사랑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부디 그래야만 한다.


° 유혜빈,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창작과 비평, 2022)

° 이소라의 6집 수록곡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함께 감상하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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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작가의 <시와 노가리>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노가리를 앞에 두고 술잔 대신 시집을 듭니다. 술 대신 시를 나눕니다. 매주 일요일 저녁, 시에 취해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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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성과 해체는 글을 매개로 삶과 사람, 그리고 사랑을 잇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방황했습니다. 잡으면 물성이 되지만, 놓치거나 놓쳐야만 했던 일들은 사랑을 다- 헤쳐 놓았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의 전리품을 줍습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요. 그리고 여전히 방황- 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또 찾아 오겠습니다. 

물성과해체 김해경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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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자영의 프로필 이미지

    잘자영

    0
    over 1 year 전

    정말 로맨틱한 밤으로 만들어 주시는 글이에요.. 작가님 덕분에 여름밤이 기대됩니다 🥺❤️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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