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당신에게
잘 있나요? 벌써 여름입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나오며 생각했습니다. 이젠 정말 꿈을 바꿔야겠다고요. 엊그제도 참지 못하고 소주를 마셨습니다. 하루빨리 술을 끊고 정진해야 할 텐데요. 그래야 당신이 내게 보내온 존경과 존중이 거짓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런데 당신은 왜 나를 존경한다 그러구 존중한다 그러구 이상한 말을 하시는 거죠?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글쓰기를 멈춰야겠단 생각을 술을 끊어야겠단 생각과 동시에 느낍니다. 어쩌면 이 충동을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도 나를 여지껏 살게 하는 특별한 순간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순간이 바로 내 집앞에서 일어났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사흘 동안 보지 못했던 햇볕을 쬐는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 문고리를 잡았어요. 그리고 있는 힘껏 그것을 돌려 문을 열었습니다. 담벼락엔 청단풍의 그림자가 하늘거리고 있었고, 그 아래 어떤 여자가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습니다.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바닥에 붙어 있었습니다. 이웃인가? 아니면 이 가파른 골목을 지나다 지쳐버린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름인가? 차라리 환상이라면!
나는 그 사람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이곳에 뿌리내리지 말라구요. 제발 탄생하지 말라구요. 이런 세상에 와서 나처럼 울다가 젖은 얼굴을 볕에 말리는, 그런 비참을 겪지 말라구요. 그러나 그 사람은 담배에 매달린 작은 불씨처럼, 위태롭지만 단단하게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날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에게 탄생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그랬더니 당신은 내게, 그것은 끝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어요. 난 그 말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매일이 끝인 것처럼 매일을 탄생하고 있어요. 물론 지루합니다. 언제까지고 나는 이토록 불완전한 자세로 계속 태어나야만 할까요. 뺨과 두 손에서 노란 꽃잎이 피기 시작합니다. 발끝으로 초록의 이파리가 무한히 뻗고 있어요. 결국엔 여기서 시작하겠답니다. 여기서 여름을 견디겠답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응원하게 됩니다. 그 사람의 담배가 불에 다 탈 때까지, 여름은 영원이라는 착각 속에 뜨겁겠습니다. 오, 조금 더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조금 더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 이토록 비틀거리고 있지만, 그 어딘가 어느 시간 속에 단단히 묶인 채 그것이 뿌리라 확신하며 한뼘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그리하여 당신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고 말할 수 있어 좋아요.
이제 문을 닫아야겠어요. 밤이 오고 있습니다. 자고 나면 또 탄생이겠죠. 여자는 사라지고 없을 겁니다. 그래도 나는 왠지 견딜 것 같습니다. 내 살갗을 뜯어먹으며 나를 다 소진할 때까지요. 그쯤 다시 당신을 찾아도 될까요. 그때까지 부디 안녕해주시길. 답장을 빕니다.
2023.5.15.
단칸에서
김해경 드림.
<비틀거리고 있습니다>는 매주 월요일 친애하는 당신을 찾아갑니다. 광연과 해경이 주고 받는 편지 속 친애하는 당신의 삶에서 부디 안식을 찾을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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