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리는 글

미완성 완성

Ep.11

2024.12.23 | 조회 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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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온 글

일단 읽고 나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글!

바구나와 날아
바구나와 날아

그 파일, 분명 여기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없다. 어디에 뒀더라. 아이클라우드를 죄다 뒤져봐도 없고, 데스크탑을 탈탈 털어봐도 보이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이름을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얼마나 꽁꽁 숨겨둔거야, 지우진 않았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걸 삭제하기엔 끈덕진 미련이 그득했고, 완성하기엔 힘도 자신도 없었으니까. 슬슬 초조해져서 입이 마른다. 지금 이 순간도 찾아내고 싶은 마음과 찾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각각 절반이다. 아—몹시 찝찝하다. 어디선가 쉰내가 나는 것 같다. 파일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잔뜩 쉬어버린 지난 열정이 점차 선명해진다. 내가 지금 애타게 찾고 있는 건, 5년 전 완성을 포기하고 그리기를 중단한 내 미완성 그림파일이다.

그러다 불현듯 오래 잊고 지내던 두 개의 네모난 바구니가 떠올랐다. 빨간 바구니와 파란 바구니. 각각 커다란 글씨로 인쇄된 라벨이 붙어있었는데, 빨간 바구니에는 <미완성>, 파란 바구니는 <완성>이라고 쓰여 있었다. 당시 다니던 미술학원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스스로 판단하여 분류하도록 하셨다. 어린이 스스로 내 그림이 완성이라고 생각되면 파란 바구니에,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되면 빨간 바구니에 담도록 했다. 나는 크레파스 때가 잔뜩 묻은 양손으로 도화지를 가슴팍에 꼭 붙여 안고 두 개의 바구니 앞에서 항상 망설이는 어린이였다. 반면, 아이들 대부분은 고민 없이 바구니에 슉슉 그림을 넣고 갔다. 파란 바구니에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얼룩덜룩한 도화지가 쌓여갔다. 나는 눈앞에서 도화지들이 팔랑팔랑 바구니에 담기는 광경을 빤히 쳐다보다가 빨간 바구니 안에 살포시 그림을 놓았다. 그리고서 파란 바구니 속 그림들을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늘 구석에서 나를 지켜보던 찬영이가 불쑥 나타나 바구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야, 너 제일 잘 그렸는데 왜 맨날 저기에 넣는 거야?” “…몰라.”

그때 난 어떤 목소리로 모른다고 그랬더라. 아쉬운 목소리? 슬픈 목소리? 아니면, 난 약간 깍쟁이 어린이였으니까 새침을 떼며 ‘네가 그런 게 왜 궁금한데?’의 뉘앙스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으려나? 그러게, 찬영아. 난 왜 그랬던 걸까. …그리고 내 미완성 그림파일은 어디에 있는 걸까. 노트북 화면 위의 하늘색 폴더 아이콘이 꼭 그때 그 바구니 같다.

정말 잘 그리고 싶은 그림이었다. 졸업 작품으로 A1 사이즈 포스터 시리즈를 작업하는 중이었다. 프로젝트 제목은 <지리산의 계곡들>.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넣은 지리산 계곡 홍보 포스터 시리즈를 기획했다. 자연과 계곡. 내가 정말 좋아하는 분야라서 잘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자신했다. 교수님들과 학부생들 앞에서 작업 기획과 일정 계획을 호기롭게 발표했다. 졸업 작품으로 출품해야 하는 작품은 총 세 가지였다. 기대되는 퀄리티가 높았기 때문에, 두 학기 통째로 모든 수업은 졸업 전시 위주로 돌아갔고, 매 수업은 각 분야 교수님들과 함께 —편집 디자인, 영상 제작, 패키지 디자인— 전시로 참여할 각각의 프로젝트를 각자의 일정표를 따라 작업하며 피드백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1차 공청회를 이 주 앞둔 어느 날, 편집디자인 교수님과 작업 면담을 하는 날이었다. 진행 상황을 공유하고 작업 방향과 다음 주 작업량을 약속했다. 나는 교수실 문을 닫고 나와 복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계획했던 작업량보다 2주 정도 지연되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게 맞는 건가?’

다음 주 작업 면담 시간, 나는 빈손으로 교수님을 만나러 갔다.

“날아야, 너 무슨 일 있어? 왜 그러는 거야?” “…. 모르겠어요.” 무언가 잘못되었다. 1, 2주 정도는 밀릴 수 있다. 그치만 삼 주, 사주, 오주. 나는 계속 빈손으로 교수님들을 찾아갔다. 어느 날은 도저히 누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어서 면담을 통째로 빠져버렸다. 지연된 만큼 작업량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신뢰가 무너진다. 생활이 무너진다. 자존감이 사라지고 수치가 나를 가득 메웠다. 그 당시 나는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웠다. 밥 먹는 것도 수치스러워서 종일 굶다가 새벽에 밥을 사 와서 폭식했다. 늦게 자거나 못 잤다. 아니면 너무 오래 자서 눈을 떠도 밤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궁금하다가 갑갑해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달라고 했지만 나도 나를 모르겠어서 아무 대답도 못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된 거지.’ 정말, 정말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지금 힘드냐고요? 지쳤냐고요? 슬프냐고요? 우울하냐고요? 존나 모르겠어요. 그거 다 합한 것보다 더 나빠요. 더 최악이에요.

나는 3차 공청회에 참석하지 못했고, 당연히 졸업 전시 심사에서 탈락했다. 나는 졸업하지 못했다.

졸업을 보류하고 다른 진로를 선택하고 살아내는 동안 마음과 몸이 더 상했다. 잔뜩 취약해진 상태에서도 돈벌이를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음침하고 우울한 상태로 나를 많이 소진했다. 그러다 몸이 더 이상 소진되기를 거부해서 허리에 병이 났고, 당시 내 표현을 빌리자면 좌천 되듯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본가에 내려가게 되었다.

***

찾았다.

잔뜩 구린 모습이나 미련마저 세세히 기록해 두는 내 블로그에서 찾았다. 작업파일(psd 파일)이 아닌 이미지파일(jpg 파일)이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과거의 나, 화질을 낮춰 저장해두었다. 수치스러워도 기록하고 보관해 두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찾자마자 핸드폰으로 옮겨 열어보았다. 오랜만에 직접 보는 것이지만 디테일 하나하나 또렷이 기억나는 내 미완성 그림. 그림 속엔 연분홍색 하늘과 연두색 바닥 위로 커다란 산이 눈을 감고 앉아있다. 그 산은 파란 물방울 덩어리처럼 그려진 계곡을 안고 있고, 그 계곡이 다양한 생물을 품고 있는 그림이다. 커다란 산의 몸 이곳저곳에는 나무와 물 밖의 생물들이 있다. 산의 오른쪽 엄지손가락 위에는 팔과 다리가 달린 물고기가 계곡으로 다이빙하려고 준비 중이고, 물잠자리는 산에게 기대어 낮잠을 자고 있다. 민물 인어는 계곡 바위에 걸터앉아 머리의 물기를 꼭 짜며 노래를 부른다. 계곡 깊숙한 곳에서는 큰 다슬기와 작은 다슬기가 포개져 잠을 자고 있다. 물 밖에서는 단풍 인간이 쑥떡을 먹고 있고, 그 아래에서 은행잎 인간이 독서를 하고있다.

아름답다. 내 기억보다 더 애써서 그렸구나. 그 와중에 완성하고 싶어서 정말 열심히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먹먹하다. 나 왜 이 그림을 완성으로 여기고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더라. 아마 잘하지 못해서 그랬을거다. 누구보다 나를 차갑게 평가하고 구석으로 몰아넣었던 나. 빨간 바구니를 꼭 붙잡고 아무의 도움도 받으려 하지 않았던, 방법을 몰랐던 외로웠던 나를 마주했다.

나는 지금 다시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 본가에 내려온지 햇수로 사 년 만이다. 글 덕분이다. 글을 쓰면서 그렇게 ‘존나’ 모르겠던 내 마음과 시간들을 집요하게 마주하고 해명하는 시간을 가진 덕분이다. 아픈 ‘몸’과 불편한 ‘사회’와 이상한 ‘나’ 사이에 끼어서 헤매던 시간을 끌어안게 되었다. 동료의 글에 빚져 내 세계를 넓혀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바랬던 해명. 지난함 끝의 경쾌한 감각. 그 감각은 어렸을 적 한없이 나를 작아지게 했던 파란 바구니를 떠올리게 했다. 눈앞에서 팔랑팔랑 담기던 다른 아이들의 그림들도. 글을 한 편 한 편 완성할 때마다 그 파란 바구니에 팔랑팔랑 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완성이 쌓이는 것 같았다. 내가 안심하고 파란 바구니에 글을 넣을 수 있었던 건, 함께 글 써온 동료들의 다정함 덕분이다. 나의 고유한 서사에 다정하게 부벼주고, 글 너머를 읽어주고, 나조차 믿지 못하는 나를 믿어주었다. 파란 바구니를 고르지 않을 수 없게 손잡아주었다.

결국 오랫동안 아프게 묵혀두었던 내 미완성 그림도 글로 빚어 완성했다.

‘팔랑.’ 

이 글도 파란 바구니로 쏙 넣어본다.

 

 

 


📮 안녕하세요, 날아입니다! 이번 글은 날개집을 만나기 전, 올해 초에 썼던 글이에요. 어제는 친구들을 만나 연말 파티를 했고요, 올해가 일주일 남짓 남았네요. 지금 이렇게 연재 중인 날아온 글도 빨간 바구니를 경유하며 파란 바구니에 가닿는 과정 같아요.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잘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전보다는 수월해요. 앞으로도 헤매겠지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지리산 그림을 완성했냐면, 아직 못했어요. 할 거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어요. 완성하게 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확신해요. 좋은 여정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날아온 글도 그 여정이에요. 완벽의 벽을 허물고 ‘나’로 메우는 여정이요. 이번 레터는 저의 취약함을 한땀 한땀 적어낸 글이어서, 날아온 글로 나누고 싶었어요. 미완성 그림을 글로 빚은 이후의 여정을 지난 날아온 글들로 여러분과 함께했네요. 저는 여전히 파란 바구니를 선택하려고 애쓰며 지내고 있어요.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주에 마지막 글로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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