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몽사몽. 창문에 붙어있는 뽁뽁이 뒤로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이 유난히 하얬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걸어나가 거실 통창을 열어젖혔다. 내가 그리워한 광경이 있었다. 익숙한 풍경에 하얀색이 많아져 있었다. 나무들과 이웃집 위로 눈이 소복이 내렸다. 멍하니 바라보는데 저 멀리 검은 새 무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얀 풍경과 대비되어 눈이 즐거웠다. 테라스 테이블 위에도, 며칠 전 할라와 함께 마신 초록색 와인병 위에도 눈이 소복이 앉았다. 의자에 쌓인 눈을 소매로 대충 털어내고 풀썩 앉아 담배를 물었다. 날개집에서 처음 맞는 눈 내린 아침이다. 진짜로 겨울이 왔다.
출근을 위해 현관을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초록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지난밤 작은 텃밭 귀퉁이에 세워둔 *나동이도 하얀 식빵이 되어있었다. 자차 소유 운전자가 된 지 17개월 차가 되었다. 그간 한 번의 겨울을 지났지만, 파주에서 홀로 맞는 겨울은 처음이다. 그래서 이런 적도 처음이었다. 기분 좋게 출근하려고 운전석에 앉았는데 두꺼운 서리가 잔뜩 끼어있어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와이퍼를 가장 강하고 빠르게 조작해 보아도 차도가 없었다. 파주는 춥다더니. 어쩐다. 나동아, 우리 어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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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갖고 싶었다. 딱히 원했던 차종은 없었지만,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저렴한 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른 차가 나동이다. 나동이는 뒷좌석이 없는 작고 귀여운 레이다. (절대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많이 태울 일은 없을 것 같아 뒷좌석을 시원하게 날려버렸다. 지금도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2023년 7월 1일. 서울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리고 광주에서 나와 나동이가 처음 만났다. 나동이가 출고되었다는 소식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언제쯤 받아볼지는 불확실했다. 그 때문에 예기치 못하게 의미 있는 축젯날 나동이를 받은 우연이, 아직도 무척 흐뭇하다. 그날 바로 장거리 여행을 떠났다. 떠나기 직전까지 불확실했던 목적지도 단숨에 정해졌다. 여행지는 경주. 조수석엔 동생 오렌지와 함께. 그때 여름에 장거리 밤 운전을 하면 날파리 세수를 하게 된다는 것을 처음 겪었다. 사는 동안 아주 여러 번 밤에 *희옥의 차를 탔었는데, 이런 느낌인 줄 몰랐던 것이다. 차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차가 생기고 나서 비로소 겪게 되는 경험 중 첫 번째였다. 별안간 죽은 수많은 날파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것보다 얘네를 씻어내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세차 솔로 여러 번 박박 닦아내며 진을 뺐다. 벌레 사체는 정말이지 잘 안 닦인다. 뿌듯함과 교훈을 남긴 첫 장거리 운전 여행이었다.
차가 생기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중 두 가지를 꼽자면, 차박과 방랑이었다. 나는 나동이를 만난 후 반년 동안 그 두 가지를 듬뿍 해보았다. 텅 빈 뒷좌석에서 책도 읽고 밥도 먹었다. 좋아하는 강이나 바닷가 아무 데나 경치 보기 좋은 곳을 향해 자동차를 엉덩이 방향으로 주차해 두고, 트렁크를 활짝 열어 풀 내음이나 바닷냄새를 실컷 맡으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머무르다 훌쩍 돌아왔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참여하고 싶은 장소가 있으면 언제든 나동이를 몰고 갔다. 그렇게 생긴 소중한 인연과 나동이 안에서 홀로 보낸 시간이 모여 독립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동이를 구매하고 겪으며 절실히 깨달은 것도 있다. 원하는 대로 살고 싶으면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진실이다.
*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창문 히터 모양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앞 유리 아래쪽에 조그맣고 동그란 모양으로 서리가 녹기 시작했다. 와이퍼와 함께 작동시켜 보니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었다. 출근은 조금 지체되었지만 이만하길 다행이다. 그렇게 출발한 출근길은 풍경이 아름다웠다. 앙상한 나무들 위로 토실토실 눈꽃이 피어있었다. 나동이를 타고 아름다운 것을 본다. 애정하는 것에게로,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로, 궁금한 것에게로 지체없이 간다. 돈 벌러도 간다. 매일 출발하고 매일 도착한다.
도착했다…. 퇴근하고 싶다. 이따가 빨리 아름다운 날개집으로 가자, 나동아.
*나동이 : 날아의 자동차 이름. ‘날으는 자동차’ 를 줄여 만들었다.
*희옥 : 희와 옥. 날아의 모부.
📮 안녕하세요, 날아입니다! 오늘도 레터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나동이 이야기는 꼭 쓰고 싶었어요. 운전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그중 꼭 하고 싶었던 말은, 친구들아! (가능하다면 꼭) 차를 사자! 인데요, 제가 겪은, 차가 생기고 훨씬 능동적으로 살 수 있게 된 변화를 꼭 공유하고 전염시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예요. 저는 나동이가 있어 더 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확신하거든요. 다음 주에 새로운 글로 찾아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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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보
사물에게 이름 붙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다정한 날아씨. 나동이 🤍 날아 🤍 날개집 파주에서의 본격 첫 겨울 무탈히 잘 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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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월
하얀 식빵 나동이 너무 귀여워요.. 매일 출발하고 매일 도착한다는 말 뭔가 벅차고 애틋해요..
혜월
그림도 너무너무 귀여워요… 매번 그림도 잘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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