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헤리티지

낙동강 맑은 흐름에 띄운 선유 정원

안동 임청각 군자정 원림

2026.04.28 | 조회 106 |
from.
茶敦온형근

안동 임청각 군자정 원림 - 낙동강 맑은 흐름에 띄운 선유 정원

 

   안동 임청각 별당 군자정과 반무방당(半畝方塘)  
   안동 임청각 별당 군자정과 반무방당(半畝方塘)  

한국정원문화는 누가 지켜왔는가?

 

나는 지금 君子亭(군자정) 마루 끄트머리에 선다. 20243, 공사 소음이 영남산 기슭을 흔든다. 철로는 없앴고, 현장은 굴착기의 둔탁한 소음과 공사 가림막 너머로 피어오르는 흙먼지로 자욱하다. 안동 법흥동 영남산 능선이 낙동강 물줄기와 맞닿는 자리에 임청각 군자정 원림이 세월을 머금은 채 船遊(선유)에 나설 채비를 마쳤다. 군자정 원림과 강 사이를 가로막고 민족의 혈맥을 끊던 중앙선 철길이 걷힌 자리는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붉은 속살을 드러낸다. 발밑으로 기차의 진동을 견뎠던 지반의 단단함이 전해진다. 코끝을 스치는 것은 비로소 정원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한 낙동강의 비릿하고도 시원한 물바람이다.

 

가림막에는 임청각의 옛 사진을 인화하여 보여준다. 공사의 어수선함과 강물 사이 어딘가에 나는 궁색하게 발길을 여민다. 이렇게 공사 현장과 원림이 겹쳐진 답사는 처음이다. 한국정원 답사를 수없이 다녀본다. 품 안에 질문을 지닌 채 다닌다. 문화유산에 대한 지극히 본능적인 의문인 누가 지켰는가?’에 대한 반추이다. 답사의 출발점에서 지녔던 의문은 하나씩 꺼풀이 벗겨진다. 정원문화를 지켜낸 것은 문중과 가족이다. 이들이 아니면 문화유산은 훼손되거나 복구할 수 없는 나락으로 던져졌을 것이다. 조경학자도 지자체도 국가도 아니었다. 조상의 유적이고 당연히 지켜야 한다. 굳이 중국정원문화에서처럼 평천장의 고사¹⁾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한국정원문화에서는 너무 흔하여 잘 사용하지도 않는 효심(孝心)’ 말고는 보전 근거를 찾지 못한다.

 

평창장의 고사를 지나친 집착으로 비판 수용한 사례가 화순 임대정 원림을 경영한 사애(沙厓) 민주현(閔胄顯, 1808~1882)이다. 민주현은 임대정기에서 세월이 바뀌면 흥망성쇠가 따르는 자연의 이치를 언급한다. “평천장의 꽃과 돌을 세대에 걸쳐 지킬 물건으로 여기는 자는 그 계책이 어리석다고 비판한다. 민주현은 정원 구성물인 꽃과 돌 등에 집착하기보다 오직 효()와 우애, 근검이라는 덕목을 통해 집안의 정신적 가치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정의한다. 정원을 구성하는 요소보다 정신 가치를 높이 여긴다. 문화유산을 진정으로 보존하고 계승하는 지혜는 효와 우애, 근검이라는 구체적 지침을 임대정 원림에서 발견한다.

 

그렇다. 전임자의 행적이나 치적을 바꾸고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쇠퇴 정서를 떠올린다. 관료 사회일수록 흔하다. 지자체뿐 아니라 학교 관리자만 바뀌어도 멀쩡한 공간을 옮기고 부수고 새로 짓고 나무를 옮겨심는다. 재직 중에 분에 넘치는 계획을 수립하여 다음 관리자에게 넘긴다. 계획을 수립한 관리자는 퇴직하거나 이직하고 나중 관리자는 속수무책 예산 집행으로 눈뜨고 공간이 바뀌는 현실을 마주한다. 책임지지 않는다. 권력이 속성인 크고 작은 모든 공공기관이 이에 해당한다. 부끄러운 민낯이다. 조상의 유적도 시대와 유행을 따라 고치고 수정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더군다나 온 나라가 정원 시대라고 들뜬 시대에, 손대고 싶어 안달하면 어쩔 것인가.

 

다행히 한국정원문화는 그렇지 않다. 원형이 지켜진다. 가장 근접한 직계 조상을 섬기는 고결한 마음에서 비롯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시 아버지와 아들로 10, 15, 20대 반복되면서 자손 대대로 정원의 원형을 유지한다. 바꾸기 좋아하고 고치기 좋아하는 현상과 동떨어진 행태이다. 내가 이걸 이렇게 했다고 자랑으로 여기는 그 기질조차 근접하지 못한다. 대단한 한국정원문화의 성과이다. 그 성과는 학자와 국가, 지자체와 문화유산을 이끄는 리더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조상을 이해하는 효심에 한국정원문화가 농축되어 있다. 조상을 위한다는 것은 곧 우주의 지극함에 닿는 정성이다. 효심이야말로 그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일제가 철도를 놓아 공간을 두 동강 낸 임청각 군자정 원림이 그렇다. 훼손의 외압을 지킴의 내공으로 이어나간 효심의 공간이다. 이 군자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 나라를 걱정하고,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의로운 생각과 뜻을 공유했을까. 효심이야말로 성리학이 일궈낸 최대의 성과이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의병의 의로움은 효에서 시작한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지고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자신의 고향과 집을 책임지고 연대하였다. 그 의로움과 연대의 거점이 한국정원문화의 축을 이루는 사랑방, 누정, 서원, 서당, 사찰 등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들락대는 행위 자체가 의()를 만들었다. 군자정 마루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무엇을 보았을까. 뜻 맞는 벗이 불쑥 찾아온다. 수시로 모여 시문을 나누고 시대의 아픔이나 학문을 토론한다. 군자정 원림은 낙동강과 대화하다 만주로 떠난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의로운 결심의 공간이다.

 

옥소 권섭의 동유기에 등장하는 임청각

 

권섭은 임청각에 들렸을까? 나는 옥소(玉所) 권섭(權燮, 1671~1759)을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경관학자이자 경관 미학자로 소개한다. 제천과 청풍 일대에 근거를 두고 문경을 오가며 전국 산수·누정·원림을 세밀한 기록으로 남겼다. 사물의 객관 사실에 내면의 주관 감성을 더하는 진경산수화풍 글쓰기를 개척한다. 치밀한 관찰로 답사 장소에 직접 이름을 지어주는 등 경관학자로서의 위상을 남긴다. 경관을 시와 산문으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보완하는 융합학자이다. 심지어 꿈에서 본 경관을 기몽 문학으로 남겨 한국전통조경의 원형을 고찰하고 명승의 장소성을 비정하는 데 핵심 사료를 제공하였다. 권섭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큰아버지이며 양자로 학문과 유산을 승계한다.

 

권섭은 1755(영조 31, 을해년) 10월에 경북 예천·안동·문경 일대를 유람하여 동유기를 남겼다. 여기에 임청각이 등장한다. 동유기를 보면 음력 10월이니 추울 땐데, 제천을 출발하여 청년 손자 권신응을 대동한다. 목적은 시조묘 제례 참석이다. 시조묘에서 초헌관으로 참여하고 음복례 시 한 수 읊는다. 그리고 삼태사묘를 시작으로 승보당, 서악사, 영호루를 지나 임청각에 들렸다. 귀래정은 강물이 불어 건너지 못했다. 원지정사에 도착하고 이치화와 권이천, 손자 권신응과 함께 강심대에 배를 띄우고 밤늦도록 뱃놀이를 즐긴다.²⁾ 권섭이 임청각을 들렸을 때는 임청각은 허주(虛舟) 이종악(李宗岳, 1726~1773)이 주인이었다. 임청각을 방문한 1755년은 권섭은 85, 이종악이 30세였다.

 

  임청각 가계도 일부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안동 법흥 고성이씨 임청각), 권섭의 임청각 방문과 선유, 이종악의 선상 유람의 시기를 시각화함, 8년 간격을 두고 경관 향유 기록 나타남  
  임청각 가계도 일부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안동 법흥 고성이씨 임청각), 권섭의 임청각 방문과 선유, 이종악의 선상 유람의 시기를 시각화함, 8년 간격을 두고 경관 향유 기록 나타남  

안동 고성 이씨 가계도는 입향조인 이증(李增, 1419~1480)으로 시작한다. 실제 안동에 상시 거주하면서 살기 시작한 것은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李浤, 1440~1516, 귀래정)과 셋째 아들 이명(李洺, 임청각)이다. 그렇게 이종악으로 이어진다. 이종악은 오벽(虛舟五癖)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서벽, 탄금벽, 화훼벽, 서화벽, 주유벽이 그것이다. , 거문고, , 글씨·그림과 함께 뱃놀이 마니아(mania)이다. 이종악은 권섭의 강심대 선유에 큰 자극을 받았을까? 8년 후 이종악 또한 낙동강 반변천 주변의 선상 유람과 이를 그림으로 그려 세상에 남긴다. 1755, 권섭은 이종악을 만난 이야기는 없다. 다만 물이 불어 귀래정을 들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행적과 명성으로 서로를 알고 존중했으리라. 이종악은 176344, 자신이 꾸린 선상 유람 기획으로 주유벽을 낙동강에 띄워 달랜다. 낙동강 반변천 주변 선상 유람이다. 임청각 앞 낙동강인 동호(東湖)에서 출항한다. 이때 직접 그린 화첩에서 임청각과 군자정의 원형 자료를 확인한다. 안동 병산서원의 만대루가 눈으로 읍취하는 시선의 경관이라면 이종악의 반변천 선상 유람은 몸으로 강 안에 들어가는 경관이다. 파주 화석정이 시각을 확장하는 경관이라면 임청각 군자정은 낙동강으로의 감각 통합 경관을 이끈다.

 

임청각 군자정 원형을 기록한 화폭

 

임청각의 입향조는 영남산과 낙동강의 경치에 매료되어 자리를 잡은 이증이다. 이증의 아들 이명이 임청각을 짓고 지금의 토대를 마련한다. 임청각에 대한 기록은 이종악의 임청각 중수기에 자세하다. 1767년 이종악 시대에 썩은 들보를 갈고 기와를 교체하는 등 군자정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고, 생활이 편리하도록 방의 구조를 일부 변경한 과정과 소회를 기록하고 있다.

 

시서화, 거문고에 능하고 산수 유람을 즐긴 이종악은 1763년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에 배를 띄워 유람한 닷새 동안의 선상 유람을 기념해 그린 실경산수화가 허주부군산수유첨(虛舟府君山水遺帖)이다. 부군(府君)에서 보듯이 이종악 사후에 그의 아들이 화첩을 편첩한다. 최열(2024)한양 중심의 주류 화풍과는 다른 지역 화풍을 보여주는 그림들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오직 허주 이종악만의 개성에 넘치는, 이른바 허주 양식으로 그린 것이다.” ³⁾ 라고 허주부군산수유첩을 평한다.

 

이종악의 군자정 원림 경영의 확장

 

1) 천변만화의 심회를 이끄는 바라본다는 행위

 

이종악은 임청각과 군자정에만 머물지 않고 많은 곳을 유람하였다. 국역 허주유고를 보면 그의 경관 유람은 주체적 사유의 일관성이 나타난다. 산수에 대한 각별한 마음과 주유벽(舟遊癖)을 지녔기에 학문 틈틈이 명산대천을 유람한다. 경관의 뛰어남을 시와 그림으로 남긴다. 역사 의미가 깃든 장소를 탐방하고 감회를 시로 읊는다.⁴⁾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자취가 서려 있는 청량산에서는, 지팡이 소리, 소매를 휩쓰는 바람, 더위잡아 오르는 손을 묘사한다. 퇴계와 최치원, 김생 등을 청량산 유람에 불러내 동행한다. 인물과 공간을 결합한다. 뾰족한 봉우리를 붓 획으로 읽는 시선[處處尖峰筆樣分]은 독특하다. 병자호란 당시의 전적지인 경기도 광주군 지역의 쌍령, 신립 장군의 전장이고 우륵이 거문고를 퉁기던 탄금대, 병자호란의 아픈 역사 깃든 남한산성 등을 답사한다. 그리고 이를 시의 경지로 읽는 경관으로 기록한다. 무엇보다도 이종악은 배를 타고 풍경이 아름다운 낙동강 반변천 연안의 경승지를 한없이 유람하는 것을 즐긴다. 이때 남긴 실경산수화와 시가 있어 이종악의 원림 경영의 확장 개념을 읽을 수 있다.

 

  낙동강 반변천의 허주 이종악의 선상 유람 코스  
  낙동강 반변천의 허주 이종악의 선상 유람 코스  

이종악은 선유의 과정을 12경으로 남겼다. 1<동호해람>에서 제12<반구관등>까지 연속하여 편찬한 허주부군산수유첩과 달리 실제 선상 유람 순서는 출발하여 되돌아오는 과정으로 전개한다. 12점의 그림은 양정(4), 운정(6), 칠탄(7), 사수(9), 선창(10)을 유람하며 지인들과 강변 거문고 연주로 즐겼다. 배는 선창에서 내려 걸어서 낙연폭포(11)와 선찰(12)을 유람한다. 대부분 안동댐 수몰로 현재는 볼 수 없는 곳이다. 반변천을 내려와 망천(8), 이호(5)에 도착한다. 여기서 시를 짓고 거문고를 연주한다. 이후 선어연(3)을 거쳐 반구정(2)에 이른다. 5일간 낙동강 반변천 연안의 12경승 화첩을 중심으로 군자정 원림 경영의 확장 과정을 따라간다. 이 유람코스는 파란색 코스로 진행하여 되돌아오는 코스를 붉은색으로 표시하였다(위의 그림 참조). 이 과정을 따라 반변천 12 승경 유람을 따라나선다. 첫 번째가 <동호해람>이다.

 

  제1도 <동호해람(東湖解纜)> - 임청각 앞의 너른 강인 동호에서 배의 닻줄을 풀고 유람을 시작하는 모습 (우측) AI를 수단으로 선화 형식으로 변환, 이하 같음  
  제1도 <동호해람(東湖解纜)> - 임청각 앞의 너른 강인 동호에서 배의 닻줄을 풀고 유람을 시작하는 모습 (우측) AI를 수단으로 선화 형식으로 변환, 이하 같음  

동호(1)는 법흥동의 임청각 바로 앞 낙동강이다. 임청각이 맑은 물가에 있는 전각이라는 뜻이니, 그 맑음의 주인은 동호가 된다. 동호는 흘러가는 물이면서 동시에 머무는 거울이다. 이종악이 닻줄을 풀던 날 동호는 배를 밀어냈다. 동호에서 닻줄을 푼다는 解纜(해람)’은 출항 또는 출범을 의미한다. 1<동호해람(東湖解纜)>의 화폭 상단 봉우리는 영남산이다. 그리고 하단 강물은 낙동강이다. 배산임수 아닌가. 임청각 남쪽, 강 건너 문필봉인 낙타산 연봉이 시선을 집중하는 안대(案對) 역할을 한다. 임청각과 사당 사이의 군자정이 보인다. 임청각의 건물 앞뒤는 숲을 방불케 하듯 나무가 많다. 강가 유람선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있다. 선상 유람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다. 임청각과 사당 사이의 군자정은 임청각 일원의 주진입부로 보일 정도로 접근성을 개방하였다. 2018년에 수립된 안동 임청각 종합정비계획의 마스터플랜에 의하면 동호해람의 장소에 나루터를 복원하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마스터플랜, 『안동 임청각 종합정비계획』, 안동시, 2018, 332쪽. A : 군자정, B : 영모당, C : 기념관(전시실), D : 나루터 정비  
  마스터플랜, 『안동 임청각 종합정비계획』, 안동시, 2018, 332쪽. A : 군자정, B : 영모당, C : 기념관(전시실), D : 나루터 정비  

2) 돛단배가 양정 모래톱을 지나는 풍경

 

  제4도 <양정과범(羊汀過帆)> - 양정 물길을 돛단배가 돛을 달고 지나가는 풍경  
  제4도 <양정과범(羊汀過帆)> - 양정 물길을 돛단배가 돛을 달고 지나가는 풍경  

임청각 앞 동호에서 출발한 배는 반변천 상류쪽으로 양정을 지난다. 두 번째 코스이다. 4도인 <양정과범(羊汀過帆)>은 선어연 상류 2킬로미터 지점이 무대이다. 양정의 모래톱이 펼쳐진 물길을 돛단배가 지나가는 풍경이다. 바람 몰아치고 물결 세차다. 숲과 숲 사이 푸른 이내 속에 주점이 가깝고[隔樹蒼烟近酒家], 돛단배 밖으로 저무는 산은 약간 푸르다[帆外暮山靑一抹]. 석양이 비추는 곳에 만 그루 소나무 비스듬히 서있는[夕陽明處萬松斜] 수림대 경관이 도드라진다. 시의 풍경이 화폭의 건물과 소나무로 묘사된다.

     

긴 호수에 바람 몰아치니 물결 세찬데 長湖風急水波多(장호풍급수파다)

숲 사이 푸른 이내 속 주점이 가깝다. 隔樹蒼烟近酒家(격수창연근주가)

돛대 밖 해 질 녘 산은 한결같이 푸른데 帆外暮山靑一抹(범외모산청일말)

석양 비친 곳에 만 그루 소나무 비스듬히 서 있네 夕陽明處萬松斜(석양명처만송사)

 

-이종악, 과양정호운(過羊汀呼韻)2연 중 1, 국역 허주유고, 107.

장호(長湖)는 선상 유람의 대상인 반변천 구간을 통칭하는 의미로 읽힌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되니 땅을 밟고 싶은 심정이 드러난다. 지상에서는 선상 유람의 동경을, 배에서는 지상에서의 익숙함을 그리워한다. 그 잠깐을 호수 못지않게 과감하게 여백 공간으로 표현한다. 화폭 중간 우측에서 하단까지의 모래톱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강마다 있었던 경관 단위가 모래톱이다. 모래톱은 수수만년 흐르던 강물이 만들어 놓은 부드러운 경관 요소이다. ‘금모래, 은모래라면서 즐기던 수변공원 역할을 하였다. 이 수변공간의 모래톱을 소멸시키는 것은 댐과 보이다.

 

3) 계획된 만남에서 터져 나오는 감흥

 

  제7도 <칠탄후선(七灘候船)> - 칠탄암에서 일행을 태운 배가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모습  
  제7도 <칠탄후선(七灘候船)> - 칠탄암에서 일행을 태운 배가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모습  

배는 다시 일곱 골짜기의 물이 만들어내는 칠탄으로 유람한다. 세 번째 코스이다. 7<칠탄후선(七灘候船)>은 칠탄에서 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양정을 지나 칠탄까지의 여정은 가장 긴 거리이다. 긴 여정의 저편에 배를 기다리는 일행과 마주한다. 칠탄은 합류의 지형으로 만남을 예고한다. 바위 위에 앉아 시선을 강으로 향한 기다림의 경관이 한 축을 이룬다. 아울러 배에서 감동이 되는 경관이 동시에 화폭에 담겼다. 이 감동은 시가 되어 몸보다 문장이 먼저 반응한다. 경관이 언어를 강제하는 순간이다. 우연이 아니다. 약속에 따른 사전 합류이다. 사전에 설계한 만들어낸 만남인데도 이종악은 놀라고 기뻐하며 시의 경지로 경관을 읽는다.

 

칠탄암을 바라보니[望七灘巖] 그 위에 갓을 쓴 선비(관자) 예닐곱 사람이[上有冠者六七人] 소매를 잇대고(나란히) 앉아 있었다[聯袂而坐]. 배를 저어 앞으로 가보니[棹舟而前] 곧 망천의 여러 일가 어른들이[則輞川諸戚叔] 내 행차를 기다리고 계셨고[待吾行], 유사(柳査) 형제[柳査伯仲] 또한 그곳에 있었다[亦在焉]. 나도 모르게 놀라고 기뻐서[不覺驚喜] 입으로 시 한 수를 읊었다[口占一絶].

 

동쪽으로 뵈는 너른 모랫벌에 시야가 트이는가 싶더니 東望滄洲眼界寬(동망창주안계관)

가벼운 돛단배 이미 만 겹 산속을 지난다. 輕帆已過萬重山(경범이과만증산)

바위 머리 누가 앉아 멀리 바라보며 기다리는가 巖頭誰坐遙相待(암두수좌요상대)

손 잡으며 기쁘게 맞이하는 이 모두 반가운 얼굴 握手欣迎摠好顔(악수흔영총호안)

 

-이종악, 망칠탄암(望七灘巖)~, 국역 허주유고, 108.

 

  (왼) 배가 칠탄 근처에 이르자, 환성을 터진다. (오) 칠탄암에는 예닐곱 사람이 강을 바라보고 있다.  
  (왼) 배가 칠탄 근처에 이르자, 환성을 터진다. (오) 칠탄암에는 예닐곱 사람이 강을 바라보고 있다.  

시는 배를 타고 만경창파와 첩첩산중을 지나는 시원하고 속도감 있는 풍경을 전반부에 묘사하면서, 후반부에서는 바위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발견하면서 놀라고 기뻐한다. 배에서 내려 그들과 손을 맞잡고 인사 나누는 따스한 정경이 이어지겠다. 계획과 의도된 설계의 사전 약속임에도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놀란다. 치밀하게 계획된 만남에서도 터져 나오는 무의식의 감동이 자연스럽다. 잘 계획된 것은 이처럼 우연처럼 예상을 초월하는 감흥으로 다가선다.

 

사전에 계획된 만남은 지역을 대표하는 의성 김씨와 전주 류씨 가문이며, 의성 김씨는 이종악의 외손이고 전주 류씨는 사돈가이다. 임하 망천에 사는 청계 김진(金璡, 1500~1580)의 후손인 김상훈·상직·상덕·상욱·응동과 임동 박실에 사는 기봉 류복기(柳復起)의 후손인 류통원·장원이다. 이들의 명단은 사수선유록에 기록된다. 류통원·장원은 친구이자 사돈인 류도원(柳道源, 1721~1791)의 형제들이다. 류도원과 이종악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긴밀함으로 점철된다. 이종악은 뱃놀이를 통하여 혈연의 지도를 명료하게 그려낸다. 의성 김씨, 전주 류씨, 고성 이씨 집안의 유대를 확인한다.

 

4) 사수에 배 띄우니 적벽 그림자 드리운다

 

  제9도 <사수범주(泗水泛舟)> - 사수에 배를 띄우고 사우들과 선유하는 모습 (오) 1910년대 지도의 사의동 부근  
  제9도 <사수범주(泗水泛舟)> - 사수에 배를 띄우고 사우들과 선유하는 모습 (오) 1910년대 지도의 사의동 부근  

이어서 사빈서원 근처의 사수에서 뱃놀이를 한다. 네 번째 코스인 제9<사수범주(泗水泛舟)>이다. 사수(泗水)는 임하면 사의동(思義洞) 일대이다. 사실은 풍류의 옷을 입은 추원(追遠)이다. 가까운 조상을 기리기 위한 공통 감정의 동조의식이 발동한다. 어느새 일행이 늘었다. 사빈서원은 이종악의 외조 김진과 다섯 아들을 제향한 곳이다. 김진에 대한 추원의 자세가 이 모임의 실질적 취지이기도 하다. 김상훈, 상직, 상덕, 상욱, 응동, 정동, 광섭 등 의성 김씨 자손이 선유 참가자의 중심이다. 이 또한 우연이 아닌 기획이다. 류치현, 주현, 통원, 창원, 흥원, 장원은 김진의 외손이다. 고성 이씨로는 이종악, 홍명, 홍적, 홍저가 있고 이종악 외제로 이의간이 참여한다.

 

  사수선유록에 남긴 일행 명단  
  사수선유록에 남긴 일행 명단  

사수선유록을 보면, 참여자는 18명으로 평균 연령은 39.7세이다. 최연장자가 유치현(53)이고, 최연소자는 김상욱(30)이다. 30대가 9명으로 절반이 30대이다. 이들이 모임의 활기를 더했음을 알 수 있다. 이종악(38)을 중심으로 안동 지역의 전주 유씨, 의성 김씨, 고성 이씨 가문의 인물로 주축을 이룬다.

 

첨부 이미지

 

9<사수범주(泗水泛舟)>의 화폭을 살편다. 사빈서원은 임하구곡의 하나이기도 하다. 국역 허주유고에서 시를 찾아 읽는다.

 

아침에 동호를 떠나 저녁 무립 사빈까지 朝發東湖夕泗濱(조발동호석사빈)

강산 곳곳의 그림이 새로우리라 江山處處畵圖新(강산처처화도신)

배 안이 안온하여 집에 누운 것 같을 테고 舟中穩似齋中臥(주중온사재중와)

간간히 졸면서 조용히 나루를 올라가리라 和睡從容上上津(화수종용상상진)

 

-이종악, 원운, 국역 허주유고, 106.

 

비 온 뒤 봄 강물이 이끼처럼 푸른 군자정 앞의 너른 강인 동호에서 배를 타고 유람을 나선다. 아침에 동호에서 출발하여 저녁 무렵 사빈에 이른다[朝發東湖夕泗濱]. 사빈까지 오면서 산수 강산 곳곳마다 보이는 그림이 새롭다. 심지어 배 안이 집에 누운 것처럼 안온하다[舟中穩似齋中臥]. 낙동강 반변천 유람은 이동 서재에 있듯 누워서 편안하게 풍경을 감상한다. 선잠 들 듯 느긋하게 나루를 거슬러 오른다[和睡從容上上津]. 유람이 꽤나 편안하였나 보다. 배가 서재이고, 눕기도 하고, 드문드문 졸다가 차를 마시면서 나루를 거슬러 오른다. 동호를 떠난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선유 정원에서의 유람의 시간 층위가 쌓이고 있다.

 

  사빈서원 앞 모래톱에 12명의 선비들이 앉거나 서서 선유하는 6명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  
  사빈서원 앞 모래톱에 12명의 선비들이 앉거나 서서 선유하는 6명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  

사수는 사빈서원 앞 절벽 아래 수량이 풍부한 선유 장소이다. 모래톱에서 앉은 사람과 서 있는 사람으로 12명이 그림에 묘사되었다. 뱃놀이를 쳐다보는 것을 보아, 6명씩 3개조로 나누어 3회에 걸쳐 선유를 즐기는 기획이리라. 이런 상황이면 뱃놀이를 사양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부류가 될 적극적인 선유의 현장이다. 절벽과 모래톱이 이루어지는 경관이 소동파가 즐겨 뱃놀이하던 적벽(赤壁)’을 떠올렸으리라. 적벽을 떠올리는 풍류와 함께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김극일, 수일, 명일, 성일, 복일을 제향한 사빈서원을 찾는 의식이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들 18명의 모임 자체가 김진에 대한 추모이다. 김진의 집안인 의성 김씨는 반변처 내앞마을의 오래된 명문가이다.

 

5) 선창에 정박하고 한여름 더위를 거문고로 사위며

 

  제10도 – 〈선창계람(船倉繫纜)〉 - 선창에 당도하여 배의 닻줄을 단단히 메고 뱃길 유람을 마무리하는 모습  
  제10도 – 〈선창계람(船倉繫纜)〉 - 선창에 당도하여 배의 닻줄을 단단히 메고 뱃길 유람을 마무리하는 모습  

사수를 출발하여 돌출한 바위와 강바닥에 바위가 많은 선창에 도착한다. 여기에 배를 맨다. 다섯 번째 코스이다. 10선창계람(船倉繫纜)이다. 선창계람은 선창에서 닻줄을 맨다는 정박을 의미한다. 이종악의 선유는 3 남짓한 쪽배를 타고 거문고, 서책, 다기(茶器)를 싣고 다녔다. 당시에도 거문고와 차를 즐기는 풍류는 아무나 쉽게 닿을 수 없는 고상한 경지였다. 허주의 배는 빈 배가 아니라 가장 충만한 배였다. 거문고 연주는 명인의 계보를 전수한 듯 스스로 거문고 악보[琴譜]를 편찬할 정도이다. 배 안에는 차 달이는 화로인 다조(茶竈)를 선유의 필수 공간으로 장치하였다. 이동하는 다실의 탄생이다. 군자정은 차를 마시던 정자로 알려졌다. 풍류와 운치를 중시한 그의 기질은 절제된 미학의 경지를 부풀리지 않고 잘 보여준다.

 

  선창에서 이종악이 연주하는 거문고 (모두 18명의 선비들이 둘러 앉아 듣는다)  
  선창에서 이종악이 연주하는 거문고 (모두 18명의 선비들이 둘러 앉아 듣는다)  

정박한 배는 고요하다. 일행은 커다란 바위로 옮겨 앉는다. 이종악 본인이 직접 거문고를 연주한다. 동시대 함께 연주하던 퉁소의 정박(鄭璞, 1734~1796)과 거문고의 이상경(李尙慶)은 이 자리에 없다. 앞서 사수에서 합류한 18명이 아회를 즐긴다. 모두 둘러앉은 너럭바위가 있어서 안정적인 공연 장소를 구가한다. 이종악이 거문고를 뜯는 순간을 상상한다. 船倉(선창)의 큰 바위 위, 18명이 둘러앉아 숨을 고른다. 첫 줄이 울릴 때 그 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강물이 받아 흘려보냈겠다. 바위가 잠깐 꿈틀하였겠다. 거문고는 이종악에게 속물이 되지 않게 하는 위안이고 초월이다. 줄이 울리는 동안 세속의 시비는 사라진다. 평생 지음(知音)을 찾았으나 결국 거문고 소리만이 자기를 알아주었다. 어쩌면 쓸쓸함이 묻어나온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은커녕 교유하면서도 늘 헛헛하다. 그 쓸쓸함이 줄의 떨림 안에 묻어있다. 줄의 떨림은 강에 닿고 강은 소리를 싣고 스스로 알아차림의 경지로 내려간다. 거문고 소리에 경계와 내면의 다짐이 실린다.

 

  〈선창계람〉의 악사(岳沙)부근 1910년대 지도 (오) 지금은 악사, 도연, 선찰사 등이 수몰됨  
  〈선창계람〉의 악사(岳沙)부근 1910년대 지도 (오) 지금은 악사, 도연, 선찰사 등이 수몰됨  

반변천의 상류에 위치한 선창은 수몰 전 위치가 임하면 악사(岳沙) 주변이다. 선창은 낙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유난하게 바위가 노출되었다. 배는 그 아래에 머문다. 여기서 내려서 낙연폭포와 오래된 사찰을 걸어서 유람한다.

 

6) 허주 일행이 저녁 무렵 낙연에 도착하다

 

  제11도 – 〈낙연모색(落淵莫色)〉 - 배에서 내려 도보로 유람한 낙연 폭포 주변에 저녁 날이 저무는 풍경  
  제11도 – 〈낙연모색(落淵莫色)〉 - 배에서 내려 도보로 유람한 낙연 폭포 주변에 저녁 날이 저무는 풍경  

선창에서 더 이상 배가 이동할 수 없어서 내려서 도보로 유람한다. 여섯 번째 코스인 제11낙연모색(落淵莫色)이다. 낙연폭포에서 노을을 감상한다. 낙연을 도연(陶淵)이라고 부른다. 폭포의 거센 물살로 인근 바위가 깎이면서 만들어진 못의 형태가 항아리를 닮았다고 도연이라 한다. 무릉도원 같아 속세와 절연된 신선 구역이다. 번거롭게 보일까봐 조심스러운 마음도 내비친다. 낙연은 상··하로 구분된다. 선비들이 모여 폭포의 장관을 바라보는 그림의 묘사는 위쪽 연못인 상연에 해당한다. 낙연폭포는 물이 많아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했고, 그 위로 드러누운 산이 와룡산으로 이어진다. 와룡산은 산골짝에서 쏟아내는 물이 많아 수다산(水多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제11도 〈낙연모색〉 그림에서 18명의 갓 쓴 선비들이 낙연폭포 상연(上淵) 공간에서 경관을 감상한다.  
  제11도 〈낙연모색〉 그림에서 18명의 갓 쓴 선비들이 낙연폭포 상연(上淵) 공간에서 경관을 감상한다.  

이종악의 국역 허주유고에 낙연폭포와 관련된 시를 두 편 가져온다. 이종악은 낙연폭포를 자주 찾았다. 1763년 계미년 반변천 12승경 유람 이전에도 낙연폭포를 지나면서 시를 남긴다.

 

삐죽삐죽한 바위엔 석양이 빗겨 있고 石角參差落照斜(석각참치낙조사)

푸른 연기 오르는 곳에 집이 두어 채 青烟生處數三家(청연생처수삼가)

아이 데린 여윈 말 탄 어떤 산골 나그네 小童羸馬何山客(소동리마하산객)

홀로 거문고 안고 백사장을 지나네 獨抱玄琴過白沙(독포현금과백사)

 

-이종악, 抱琴過落淵 甲戌(포금과낙연 갑술), 국역 허주유고, 65.

 

제목에 갑술이 있어서 1754년에 지은 시로 여긴다. 거문고를 안고 낙연을 지나는데 해가 지고 있다. 바위는 들쭉날쭉 뾰족한데, 그 위로 지는 해가 비껴 걸린다. 멀리 두세 채의 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이와 함께 여윈 말에서 나를 바라본다. 하얀 모래사장을 홀로 거문고를 안고 지날 뿐이다. 폭포 소리 속으로 나를 이끈다. 낙연폭포에서 바라보는 수직 리듬의 바위 군락 경관이 잘 묘사된 시이다. 경관을 머물면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지나가면서 선형으로 만난다. 거문고를 들었지만 오늘의 연주는 낙연폭포로 대신한다. 홀로 안고 지날 뿐이다.

 

그리고 낙연 주변 여러 곳을 읊은 시에서도 낙연도연을 제목으로 시를 남긴다.

 

깊은 골짝 내달릴 땐 그 기세 산 같더니 爭犇絶壑氣如山(쟁분절학기여산)

평평한 여울에 이르러선 도리어 한가롭다네 及到平流勢却閒(급도평류세각한)

큰 우레 소리 땅에서 솟나 싶었더니 疑是殷雷從地底(의시은뢰종지저)

살펴보니 바위 사이에 눈보라 흩뿌리누나 看來飛雪灑巖間(간래비설쇄암간)

 

-이종악, 落然(낙연), 국역 허주유고, 73.

 

드높은 저 산봉우리 몇 만 길인가 岳色崔嵬幾萬尋(악색최외기만심)

세상의 인정은 고금에 똑같다네 인정천지고유금

중원을 누가 수복하랴 통분은 강한(江漢)인데 中原誰復悲江漢(중원수복비강한)

비문(碑文)을 읽고 나니 감개가 깊다 讀罷碑文感慨深(독파비문감개심)

 

-이종악, 陶淵(도연), 국역 허주유고, 73.

 

같은 폭포를 두고 제목을 달리하여 시의 경지로 경관을 읊었다. 의심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우레를 청각으로 들었는가 싶었는데 눈보라 휘날리는 시각 경험으로 체험한다. 여름의 폭포가 겨울의 눈보라가 되고 땅 위의 소리가 땅 밑에서 솟구친다. 계절과 방향이 뒤바뀐다. 폭포 경관을 의심과 확인의 반복과정을 통하여 탁월한 감각으로 풍경을 노닌다. 물이 골짝을 다투어 내달리는 기세는 높이가 있고 무게가 있다. 평류에 닿으면 갑자기 한가로워진다. 격렬함에서 한가로움으로 이완의 광경을 만난다.

 

도연에서는 숭정처사유허비라는 비문을 읽는다. ‘숭정처사는 김진의 증손인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이라는 절의지사를 말한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항복에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1640년 와룡초당을 지어 은거생활을 한다. 그 와룡초당의 위치가 산은 와룡이며 물은 도연이다라고 한 와룡산정사기에 따르면, 위 그림의 폭포 오른쪽 송림 우거진 곳이라 비정하겠다.⁷⁾ 초당 주변의 송림은 萬松森立(만송삼립)’으로 불릴 정도로 울창하고 우겨졌다. 이보(李簠, 1629~1710)와룡산정사기에 따르면 표은 김시온 선생이 거닐던 곳으로 세상과 격리된 안으로는 그윽하고 깊으며[幽邃] 밖으로는 멀리까지 트여 넉넉한[寬遠] 장소이다.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넓은 시야를 동시에 갖춘 배산임수의 풍광을 엿본다. 산이 다한 곳에 대가 있고 그 위에 두 칸 규모의 정사가 있어 선생이 강학하고 휴식하던 곳이라 전한다.

 

7) 약산 선찰사와 그 앞의 선유정 그리고 맞은편 섬산

 

이종악과 그의 일행은 도연폭포를 지나 선찰사를 방문한다. 일곱 번째 코스인 제12선사심진(仙寺尋眞)이다. 그림에서 중심에 선유정이 있고 산쪽으로 선찰사, 강쪽으로 작은 섬산이 있다. 약산과 와룡산은 서로 마주본다. 특히 김진의 선유정은 꽤 많은 이야기를 지닌다. 영남의 큰 스승으로 이황(李滉, 1501~1570)과 조식(曺植, 1501~1572)을 말한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이다. 두 사람이 강학 공간을 만들며 후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시점이 1561년이다. 도산서당과 산천재가 같은 해에 완공되어 운영된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김진도 1567년경에 선유정(仙遊亭)을 짓고 그의 아들들을 가르치거나 향촌 교화를 위한 실천 공간으로 자리한다. 세속을 떠나 산수 자연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학문 태도는 이황(퇴계), 조식(남명), 김진(청계)에 의하여 시작된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일반화된 선구적인 학풍의 출발이다.

 

  제12도 〈선사심진(仙寺尋眞)〉 - 옛 고찰인 선사로 걸어 들어가 참된 이치나 진영을 찾아보는 유람의 여정  
  제12도 〈선사심진(仙寺尋眞)〉 - 옛 고찰인 선사로 걸어 들어가 참된 이치나 진영을 찾아보는 유람의 여정  

허주부군산수유첩선사심진의 경관 묘사를 보면 그림의 한가운데에 깎아지른 암벽 층에 선유정 정자가 날 듯 솟을 듯 전나무 수형의 오롯한 나무에 기댄 채 사뿐 자리한다. 이종악은 이를 백 길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선 정자라고 선유정이란 제목의 시를 남겼다. 정자의 위쪽이 선찰사이고, 정자의 앞쪽은 작은 섬처럼 산이 그려졌다. 바위 암벽 머리가 정자를 이고 있는 형상이다. 정자는 암벽보다 크지 않고 암벽의 크기나 형상의 흐름에 따라 조화를 이룬 배치이다. 정자가 수직 지형을 점유한 형국이다. 시는 다음과 같다.

 

백 길 푸른 바위 위의 작은 정자 百丈蒼巖戴小亭(백장창암대소정)

표연히 골짝에 임하니 나그네 마음 맑아지네 飄然臨壑客心淸(표연임학객심청)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선경(仙境)은 남아 先生去後烟霞在(선생거후연하재)

홀로 이곳이 제일이란 명성을 얻었네 獨擅名區第一名(독천명구제일명)

 

-이종악, 仙遊亭(선유정), 국역 허주유고, 74.

 

그림은 앙감(仰瞰)으로 고개를 들면서 경관을 묘사하였으나, 정자 마루에 앉아 펼쳐진 반변천 골짜기를 굽어보는[臨壑] 행위는 부감(俯瞰)의 시선으로 상상만으로도 통쾌하다. 세속의 시끄러움이나 말 많은 평가에 얽매이지 않는다. 내면의 번뇌 또한 씻어내고 정화되는 관조와 성찰의 미학이 돋보인다. 이러한 장소를 선택하여 경관의 진경을 밝혀낸 김진의 안목은 세월의 전후가 없다. 인물은 가도 그가 사랑한 풍경은 남는다. 안개와 노을[烟霞]은 후대와 선현을 잇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정자를 통하여 풍경의 원형이 계승되고 연속된다. 산수에 놓인 선유정은 정신의 정수를 머금고 지역의 상징과 랜드마크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진영(眞影)을 봉심(奉審)하러 가는 길 물가에 尋眞路入水之涯(심진로입수지애)

옛 절 고요히 백사장을 바라보고 있네 古寺蕭然面白沙(고사소연면백사)

앉아서 바라보니 산구름 창 밖에 이는데 坐對山雲窓外起(좌대산운창외기)

스스로 내 몸이 그림 속 집 안에 있는 듯 自疑身在畵中家(자의신재화중가)

 

-이종악, 仙刹寺(선찰사), 국역 허주유고, 74.

 

선유정 시를 이어서 선찰사를 읽는다. 참됨을 찾아 나선 구도의 길은 물가로 접어든다. 선찰사는 백사장을 눈으로 즐기는 정원이다. 산과 물이 만나는 백사장을 자연의 여백으로 삼는다. 추이대(ecotone)를 시각적으로 강조하며 진입 공간의 개방성을 강조한다. 산이 내뿜는 숨결인 구름이 공중으로 뚜렷하여 이승과 선계의 경계를 허문다. 자기 망각[自疑]을 통한 적막한 아름다움[蕭然]에 이끌린다. 내가 풍경이 되어 그림 속에 머무는 화중지경(畫中之境)의 묘미에 든다. 오래된 사찰의 어두운 색조와 백사장의 밝은 백색, 산 구름의 청회색이 대비를 이루며 경관이 더욱 명료해진다.

 

8) 칠탄에서 합류한 일행과 망천에서 작별하는 장면

 

  제8도 〈망천귀도(輞川歸棹)〉 - 망천에서 뱃머리를 돌려 노를 저야 돌아가는 장면  
  제8도 〈망천귀도(輞川歸棹)〉 - 망천에서 뱃머리를 돌려 노를 저야 돌아가는 장면  

망천리에서 작별하고 배로 돌아간다. 귀로의 첫 번째 출발 지점이고 여덟 번째 코스인 제8망천귀도(輞川歸棹)이다. 배를 돌려 돌아오는 여정을 이어나간다. 망천에서 김상훈·상직·상덕·상욱·응동·정동 등과 작별한다. 그림 왼쪽 바위 너머에 갓 쓴 선비가 보인다. 망천은 천전리(내앞지례리·추월리와 함께 의성 김씨 김진 후손의 세거지이다.

 

  (왼) 전송하는 일행 (가)거북 형상 바위 언덕의 몽선각 (오) 망천에서의 출발 직전 모습  
  (왼) 전송하는 일행 (가)거북 형상 바위 언덕의 몽선각 (오) 망천에서의 출발 직전 모습  

그림 중앙을 차지한 기와집이 월탄 김창석(金昌錫, 1652~1720)의 몽선각으로 그 뒤에 거주 중심 공간이 있는 것을 보면 초기 별서 원림의 개념으로 경영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한다. 권섭의 동남행추기에 보면, 1704년에 귀래정, 몽선각, 낙연, 백운정, 선어연, 선찰사, 선유정 등의 산수유람 기록이 나온다.

 

몽선각에 올라가니 늙은 주인이 지팡이를 끌고 나와서 나는 김창석의 아비로 그대 백부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였다네. 우리 아이의 편지를 받아 보고, 그대가 오늘 올 것을 알고 이미 앞 내에 그물을 쳐놓았네.” 하고는 바로 그물을 걷게 하여 물고기를 회치고, 굽고, 끓여서 대접해 주었으며, 몽선각에 쓴 시첩을 보여 주었다.

 

-권섭,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민속원, 2008, 291.

 

여기서 그대 백부는 권섭의 큰아버지인 수암 권상하(權尙夏, 1641~1721)를 말한다.⁸⁾ 권섭의 아버지는 권상명(權尙明, 1652~1684)인데, 나중에 백부인 권상하의 적통을 잇는다. 권섭의 친동생이 대사간 권영(權瑩, 1678~1745)이다. 김창석의 부친 김이기(金履基, 1628~?)170881세에 동지중추부사라는 종2품 품계를 받아 조상 3대까지 추증의 벼슬을 받는다. 이 경사를 기념하고 아버지의 축수를 위해 아들인 김창석이 몽선각에서 잔치를 연다. 그림을 보면 몽선각 옆에는 바위 언덕에 소나무 군락이 있다. 이 바위 언덕이 거북이 형상이고 몽선각 아래 강 언저리 버드나무 군락 사이에 농토가 있다.

 

이보(李簠, 1629~1710)몽선각기물가에 엎드린 거북이 형상의 큰 바위가 있는데, 하루는 그 바위에 발길이 미쳐 그 위에 올라가서 사방을 돌아보고는 여기야말로 정각(亭閣)을 지을 만한 곳이다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택리지복거총론 산수 편에 보면 안동 동남쪽 임하천을 설명하면서 몽선각과 도연선찰의 승경을 소개한다.⁹⁾

 

망천귀도그림을 보면 전송하는 사람과 배를 타고 출발하는 배의 모습이 왼쪽 아래로 묘사된다. 몽선각과 거주 공간을 감싸고 있는 중앙의 산이 약산(藥山)’이다. ‘약산 주변의 작은 봉우리가 좌우로 늘어서서 부모를 시종하는 형상이라는 표현과 맞아떨어진다. 김창석이 누각을 지을 때 꿈에 소동파를 만났고 이런 감흥으로 몽선각(夢仙閣)’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9) 돛대에 바람을 싣고 백운정을 지난다.

  

  제6도 〈운정풍범(雲亭風帆)〉 - 운정 부근에서 바람을 가득 머금고 나아가는 돛단배의 모습  
  제6도 〈운정풍범(雲亭風帆)〉 - 운정 부근에서 바람을 가득 머금고 나아가는 돛단배의 모습  

돛대에 바람을 싣고 백운정을 지난다. 아홉 번째 코스인 <운정풍범>이다. 왼쪽 암벽을 부암(傅巖)이라 한다(영가지(永嘉誌, 1608)』 「누정조). 그래서 그 아래 호수 같은 강물은 傅巖淵(부암연)으로 부른다.¹⁰⁾ 그 위에 서 있는 백운정은 안동팔경의 하나이기도 하다. 허주부군산수유람첩의 제6운정풍범(雲亭風帆)이다. 백운정은 반변천이 내려다보는 언덕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을 조망한다. 이곳은 예로부터 임하구곡의 경승지로 이름을 날린다. 정자를 바라볼 때의 수려한 경관이 돋보인다. 위의 <운정풍범> 그림은 백운정과 내앞마을의 풍광이 담겼다. 아래의 사진 자료와 비교한다.

 

  백운정과 내앞마을숲을 <운정품범>의 시점으로 바라본 사진 (출처 : 2017 원림복원을 위한 전통공간조겅 기법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백운정과 내앞마을숲을 <운정품범>의 시점으로 바라본 사진 (출처 : 2017 원림복원을 위한 전통공간조겅 기법 연구, 국립문화재연구소)  

백운정 원림은 따로 평론할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 일원으로 명승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처음 이곳을 물색하여 자리한 김진의 백운정시를 읽는다.

 

절벽 깎아 푸른 산머리에 정자를 지었더니 鑿壁開亭翠巘頭(착벽개정취헌두)

강산이 아름다워 눈에 산뜻해 江山明媚拂人眸(강산명미불인모)

햇살 비친 물위엔 물고기 떼 노닐고 日臨鏡面魚紋動(일임경면어문동)

구름 걷힌 하늘엔 기러기 떼 날아가네 雲掃天心雁字稠(운소천심안자조)

백 리 길 노랫소리 흐르니 만물이 모여들고 百里遊歌會物色(백리유가회물색)

이곳의 화초들도 영광스럽기 그지없네 一區花草亦光休(일구화초역광휴)

잔 들고 노닐자니 즐겁기는 한량없건만 樽前知有無窮(준전지유무궁락)

자손들 유령같이 취할까 그것이 두렵구나 祗恐兒孫醉似伶(지공아손취사령)

 

-김진, 백운정, 청계유고

 

지형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부암을 다듬어 푸른 산봉우리 끝에 정자를 세운다. 경관 포착의 능동 행위는 절벽을 깎는[鑿壁] ‘착벽의지로 표현된다. 경관 또한 보는 이로 하여금 능동의 시선으로 다가온다. 강산이 밝고 아름다워[明媚] ‘명미하다. 청량한 시각에 의한 촉감을 보여준다. 사람의 눈동자를 스치듯 비친다[拂人眸]. 햇살이 거울 같은 강물에 비치자 물고기가 일으키는 파문이 살아 움직인다. 수면이 윤슬과 파문으로 일렁이는 움직임의 영상미가 돋보인다. 하늘을 보니 구름 걷힌 허공으로 기러기 떼가 줄지어 난다. 이곳 백운정은 오자등과(五子登科)한 아들들이 찾아오니 만물의 물색이 기뻐한다. 풍류가 온 땅에 가득하니 정원의 화초들까지 그 기운을 받아 남다르게 빛난다. 이러한 지경에 술에 취하는 것은 좋으나 자손이 본분 잃고 놀기만 할까 경계한다. 윤리의 자기 절제 행위를 환기하는 마지막 시구를 읽는다. 전반적으로 전망의 극대화와 수변 경관의 반사 효과를 시로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자연을 품으로 가져오되 감각의 탐닉에 매몰되지 말라는 균형 감각을 일깨운다.

 

  (왼) 부암 위의 백운정  (오) 의성 김씨 세거지 내앞마을(川前里)  
  (왼) 부암 위의 백운정  (오) 의성 김씨 세거지 내앞마을(川前里)  

백운정에서 강 너머는 내앞마을 천전리이다. 김진의 조부가 이곳에 들어와 자리잡고 김진의 다섯 아들에 의해 안동 최고의 양반 마을로 자리잡는다. 세 아들이 문과 합격하고 두 아들이 생원시 입격하여 이들을 오자등과댁이라 부른다. 가족이 두루 번성하여 마을 자체가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림 위의 오른쪽에 의성 김씨 종가의 모습을 남겼다.

 

10) 오르고 내리며 유람과 아회의 현장

 

오다가 드넓은 호수처럼 펼쳐진 이호의 경관을 유람하며 노를 멈춘다[伊湖停棹]. 열 번째 코스인 제5<이호정도(伊湖停棹)>이다. 이호는 내앞마을 하류의 강물이다. 강물이 넓고 고요하여 호수처럼 잔잔하다. 그림 위에 유려한 곡선으로 산봉우리 두 개를 그렸다. 그 아래로 드문드문 소나무 숲 사이로 마을이 선명하다. 이호의 앞마을은 이덕(伊德)으로 불린다. 그림은 돛을 내리고 있는 멈춤의 시각 증거를 포착한다. 텅 빈 평면이 대담하다. 화폭 중앙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백이다. 호수만큼 드넓은 모래사장을 포함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폭 상단의 마을은 제법 평안하면서 일정 규모를 갖췄다.

 

  제5도 〈이호정도(伊湖停棹)〉 - 이호에 이르러 젓던 노를 멈추고 배를 대어 풍류를 즐기는 상황  
  제5도 〈이호정도(伊湖停棹)〉 - 이호에 이르러 젓던 노를 멈추고 배를 대어 풍류를 즐기는 상황  
  (왼) 소나무 숲 중앙에 일행을 맞이하러 나서는 사람들 모습 (오) 배를 정박하고 거문고를 뜯는 아회를 즐긴다.  
  (왼) 소나무 숲 중앙에 일행을 맞이하러 나서는 사람들 모습 (오) 배를 정박하고 거문고를 뜯는 아회를 즐긴다.  

이호에 배를 정박한 이종악 일행은 배 근처에 둘러앉아 우아한 모임[雅會]을 즐긴다. 강변 바짝 배를 멈춰 세운 배가 주변 풍광에 생동감을 안긴다. 일행은 배 위에도 일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의 간격은 특정 행위로 묶여 있음을 추정한다. 이종악이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는 고상한 모임에 심취한 풍경이다. 그림 위에는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러 뛰듯 나오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마을 입구의 소나무 숲 사람의 동작이 그림의 동세로 묘사된다. 마침 김익명(金翼溟, 1708~1775)이 이종악의 선유를 이태백의 고사를 들어 우러러 공경하고 부러워하는 시를 선사한다.

 

이태백이 옥 거문고 안고 탄 배 李白乘舟抱玉琴(이백승주포옥금)

봄바람에 금강 가에 와 대었네 春風來泊錦江潯(춘풍래박금강심)

내일 아침 다시 복사꽃 쫓아갈 테지만 明朝更逐桃花去(명조갱축도화거)

안개 낀 강물 아득하여 찾아갈 수 없네 烟水微茫不可尋(연수미망불가심)

 

-김익명, 원운, 허주유고, 110.

 

김익명은 18살이나 어린 이종악을 이태백에 올라 태우며 추켜세운다. 옥 거문고를 안고 봄바람에 금강의 물가에 닿았다는 것이다. 비단같은 강[錦江]이라는 잔잔한 시각 이미지에 옥 거문고[玉琴]라는 가락이 청각으로 다가선다. 세속을 벗어난 풍류의 도입이다. 무릉도원을 상징하는 도화라는 이상향을 내일 또 찾아 나서겠지만 아마 안개[烟水] 속에 가려져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말한다. 여전히 이상향은 소유할 실체가 아님을, 그것은 한순간의 찰나의 미학임을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한다.

 

돌아오는 길에 들린 이호에서의 일이다. 이종악은 김익명의 시의 (거문고 금), (물가 심), (찾을 심) 원운으로 삼아 차운한다. 운취와 풍류가 넘치는 멋진 주고받음이다.

 

홀로 천고의 아양금을 안고서 獨抱峩洋千古琴(독포아양천고금)

조각배 댄 곳 바로 금양 강구비였다네 扁舟爲泊錦江潯(편주위박금강심)

문밖에 이르러 감히 ()자를 쓰지 못하고 造門不敢題凡鳥(조문불감제범조)

돌아오는 심정 한스러운데 흐르는 물 몇 길이더냐 歸恨悠悠水幾尋(귀한유유수기심)

 

-이종악, 回到伊湖(회도이호)…」, 국역 허주유고, 109.

 

국역 허주유고회도이호차금강김장익명운이라는 긴 제목의 시이다. 물길이 크게 휘어지는 곳에서 삼가 금강 김익명 어른의 시에 차운한다[次錦江金丈翼溟韻]. 홀로 천고의 아양금¹¹⁾을 안고서 조각배를 댄 곳이 금양 강구비이다. 금양(錦陽)은 안동 임하면 금소리의 옛 이름이다. 밀암 이재(李栽, 1657~1730)가 강학하던 곳으로 당시 김익명이 살던 마을이다(국역 허주유고. 2008). 거문고를 들고 知音(지음)을 찾는 영혼이 경관으로 진입한다. 감히 凡鳥(범조, 자의 파자)를 쓰지 못한다는 말은 만나지 못했다는 죽림칠현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문밖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감히 못 들어갔다는 것은 예를 지킨 것이다. 이호라는 너른 호수에 정박을 하였으나, 직접 만남은 완성되지 못하고 글만 주고받는다. 이호 물가로 머무는 배로 돌아온다. 흐르는 강물의 깊숙함에 감흥을 투사한다. 노 젓는 소리는 아까보다 무겁다. 강물은 슬픔의 깊이만큼 한처럼 푸르고 깊다.

 

11) 선어반조의 찰나를 오래 간직하다

 

  제3도 〈선어반조(鮮魚返照)〉 - 선어연(선어대)의 경치에 저녁 노을과 석양이 아름답게 비치는 모습  
  제3도 〈선어반조(鮮魚返照)〉 - 선어연(선어대)의 경치에 저녁 노을과 석양이 아름답게 비치는 모습  

한참을 배에서 유람하며 돌아오다가 선어연에서 뒤를 돌아본다. 열한 번째 코스인 제3선어반조(鮮魚返照)는 해 질 녘 선어연을 지나는 풍경이다. 선어반조는 안동부 동쪽 15리에 위치한 선어연을 말한다. 뛰어난 풍광에 저녁노을과 석양이 아름답게 반사되어 비치는[返照] 모습을 그렸다. 이호를 거쳐 종착지인 반구정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하는 풍경이다. 옛 지명은 松石(송석) 또는 松項(송항)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용이 산다고 전해질 정도로 물결이 용의 꿈틀거림처럼 휘돌아 감는다. 불쑥 솟은 바위 절벽이 나타나는데, 선어대이고 선어대 아래 깊은 웅덩이가 선어연이다.

 

그림 상단 가파른 언덕의 돌무더기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위태롭다. 왼쪽 기슭으로는 울창한 숲이 꽉 채워져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 그 험하고 깊어 보이는 강 정중앙에 이종악과 선상 유람단 돛단배가 항진한다. 돛단배에 탄 사람을 휴먼스케일로 삼아 선어연의 규모를 읽는다.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 만드는 수평과 수직의 긴장과 수면 위의 고독을 가늠한다. 시가 있을 법도 하여 국역 허주유고를 찾는다.

 

더군다나 안동팔경의 제1선어모범(仙漁暮帆)’이다. 여덟 경관 중 가장 먼저 호명된 장소의 무게감을 엿본다. 귀래정에 아침 일찍 피어오르는 구름과 안개라는 귀래조운(歸來朝雲)과 임청각 옆에 우뚝 솟은 법흥사지 칠층전탑의 고고한 자태인 임청고탑(臨淸古塔)까지 3개의 경관이 임청각을 중심으로 걸쳐 분포한다. 선어연의 옛 지명인 송석(松石)의 배에서 주고받은 시가 있다. 먼저 류도원의 3살 터울 아우인 류장원(柳長源, 1724~1796)의 원운을 읽는다.

 

아침 해 동창에 뜨고 산새 지저귀니 曉日東窓山鳥咳(효일동창산조해)

그대 작은 배 띄워 강물 거슬러 올 줄 알고 知君小艇溯江來(지군소정소강래)

아이 불러 사립문 열고 기다리게 하나 呼兒爲啓柴門待(호아위계시문대)

도리어 왕공(王公)이 흥 다해 돌아갈까 걱정일세 却恐王君興盡回(각공왕군흥진회)

 

-류장원, 原韻(원운), 국역 허주유고, 109.

 

왕공(왕휘지)처럼 흥 다해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류장원의 시의 경지는 불안이 아니라 이종악의 풍격에 대한 예우이다. 아이를 불러 사립문을 열지만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이미 안다. 강제하지 않는 기다림이다. 하지만 언제나 열려 있다. 만나 즐거운 날을 나눌 수 있는 속마음을 비춘다. 서로의 흥을 존중하는 깊은 풍류의 관계 미학을 담은 장면이다.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가 술 마시다 친구가 생각나 배타고 달려 갔다가 문 앞에서 돌아왔다는 흥진이귀를 고사로 가져왔다.¹²⁾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갔다는 전거이다.

 

류장원의 시를 원운으로 삼아 차운한 이종악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강가 청산엔 새소리 듣기 좋은데 兩岸靑山好鳥喈咳(양안청산호조개해)

신선놀음 파하고 돛 달고 돌아올 제 仙遊會罷掛帆來(선유회파괘범래)

갈림길에서 헤어지는 심정 서글퍼 臨岐別意還怊悵(임기별의환초창)

지는 해 이내 속에 자꾸 되돌아보네 斜日烟波首重回(사일연파수중회)

 

-이종악, 松石舟中次柳叔遠韻(송석주중차류숙원운), 국역 허주유고, 108~109.

 

음력 초파일 직후이니 강 양쪽으로 이어지는 산은 초록의 잔치이다. 새소리 또한 청량하다. 함께 푸른 산의 풍광과 새소리를 즐겼던 선유의 동행자는 줄었다. 이제 돛을 달고 물결을 따라 귀로의 행로에 접어든다. 선어연을 지나 물길이 갈라지는 모퉁이로 돌아가면서 도리어 서글퍼진다. 서글픈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강변으로 안개와 노을이 자욱하여 선유의 흔적을 되돌아본다. 만나고 시와 음악으로 결속을 다지며 한층 높은 품격을 유지한 유람이 꿈결 같다.

 

12) 반구정에서 5일의 여행을 연등을 보면서 반주하다

 

  제2도 〈반구관등(伴鷗觀燈)〉 - 반구정에서 초파일 안동부성 민가에 내걸린 연등을 구경하는 풍경  
  제2도 〈반구관등(伴鷗觀燈)〉 - 반구정에서 초파일 안동부성 민가에 내걸린 연등을 구경하는 풍경  

선상 유람을 마치는 마지막 장소이며 열두 번째 코스는 제2도의 <반구관등(伴鷗觀燈)에서 만난다. 화첩에서는 두 번째이지만 선상 유람을 마치는 날의 풍경이다. 이 그림의 중심 건물인 반구정(伴鷗亭)은 임청각 별서이다. 안동 정상동 반변천 수계에 자리한다. 귀로에 들렸으니 헤어지는 문턱에서 만난 풍광이다. 4월 초파일 절기 근처라 안동 민가마다 연등을 걸었다. 반구정에서 등불을 바라보는 광경을 무수히 많은 빨간색 점을 찍어 표현한다. 등불의 군락이다. 산수화에서 전무후무한 불꽃 벌판이 생겼다. 윤색하지 않은 경탄의 순간을 표현하였다. 반구정 앞의 강과 들판을 지나 민가의 불꽃을 보면서 귀환이라는 유람의 끝이 다시 풍경으로 붙잡힌다. 풍경인지 의식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멈춘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고정된 관측점이란 무엇인가.

 

류도원은 어려움을 서로 다독여준 조력자이면서 무엇보다 풍류와 예술의 동반자이다. 이종악의 맏아들 이의수(李宜秀, 1745~1814)의 장인이자, 1773년 이종악이 세상을 뜰 때 크게 통곡하여 제문을 지어 바친 사람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이종악의 예술적 열정인 오벽을 상세히 기록한 사람도 류도원이다. 5일간의 낙동강 반변천 선상 유람을 마치고 반구정에 배를 댈 때, 류도원이 함께 한다. 성안의 집마다 연등 켠 것을 보고서야 초파일을 떠올렸다며 시를 남긴다.

 

함께 배를 탄 사람은 모두 뜻 맞는 이 同舟摠是意中人(동주총시의중인)

곳곳 강산에 빼어난 흥취 새로웠네 處處江山逸興新(처처강산일흥신)

반구정에 돌아와 뜬 달보고 누웠을 제 歸臥伴鷗亭上月(귀와반구정상월)

성 안 가득한 연등 또한 명절이구나. 滿城燈火又佳辰(만성등화우가진)

 

-이종악, 여숙문공주이귀(與叔文共舟而歸)…」, 국역 허주유고, 110.

 

배를 타고 유람한다는 것은 절친이 아니면 함께 하기 어려운 여정이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意中人]이 아니면 동승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미 배를 타며 함께 유람을 오르내린 이는 한결같이 자기 사람이다. 선상 유람은 뱃놀이라는 오래된 정원 향유 방법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이미 있던 사람들이다. 뱃놀이가 지니는 밀도 있는 교유는 선택적인 공간 특성을 가진다. 선상 유람의 대화는 은밀하고 깊은 모험이며 일단 서로 믿을 만한 상대여야 한다. 선상 유람의 내밀함과 격리성은 관계의 위상을 높이고 특권을 나누는 관계를 형성한다. 뱃놀이 정원에서의 우연한 동승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가는 곳곳 산수 강산의 빼어난 흥취에 즐겁다. 세속을 벗어난 흥취는 매번 새롭다[逸興新]. 그래서 경관에 물리지 않는다. 5일간 돌아와 누우니 반구정 위로 달이 떴다. 달이 뜬 수변 휴게 공간이다. 정자와 달과 몸이 한순간에 하나가 된다. 빛이 어우러지는 야간 경관(nightscape)이 연출[滿城燈火]된다. 민가 가득 켜진 연등 불빛이 강렬하다. 수변의 어둠과 대비를 이루는 경관 요소로 작용하는 야간 조명 경관이다.

 

마지막 코스가 반구정이다. 군자정과 귀래정, 반구정은 삼각 벨트 영역을 이룬다. 임청각의 형제가 군자정과 귀래정을 경영하였고, 반구정은 임청각의 별장으로 선비와 지방관의 문화 교류의 결절점이다.

 

임청각의 조경식물과 정원 식재 방법론

 

이 글을 시작한 오늘은 안동 법흥동 영남산 동남쪽 기슭을 다녀온지 2주년 기념일처럼 같은 날이다. 지금은 또 달라졌을 경관이다. 내가 답사를 간 날은 칠층전탑 탑동파 종택에서 임청각 일원이 연결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기 위한 분주한 시공 기간이었다. 박물관을 짓기 위한 기반을 다지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안동다목적댐에서 이곳까지는 십 리 길이다. 중간에 꽤 유명해진 월영교와 달빛대교를 지나 안동소수력발전소에 이르면 이제 임청각길의 본령에 들어온다. 150여 미터 거리를 두고 안동고성이씨 탑동파종택과 나란히 낙동강을 바라보며 위치한다. 군자정에서 안동법흥사지 칠층전탑이 보인다. 법흥사는 전탑만 남고 낙동강을 바라보는 종택에서 사람의 발길이 연못 주변 텃밭으로 찬찬히 오가는 선명한 움직임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재구성된다.

 

  (왼) 안동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의 옹벽한 환경과 (오) 철도가 제거된 탁 트인 전경을 본다. 2024.3.25. 현황사진
  (왼) 안동고성이씨 탑동파종택의 옹벽한 환경과 (오) 철도가 제거된 탁 트인 전경을 본다. 2024.3.25. 현황사진

임청각의 솟을삼문은 목재의 결이 선명하게 빛난다. 새로 시작하는 임청각의 또 다른 역사를 발견한다. 둘러보니 류도원이 지은 이산보에 대한 제문에는 꽃나무를 줄지어 심은[花木列植] 기록이 나온다. 이종악의 다섯가지 취미인 허주오벽의 하나가 화훼벽이다. 꽃나무를 줄지어 심었다는 표현은 정원 식재 디자인의 영역이다. 열식은 양식으로는 정형식재 유형이다. 단식, 대식, 열식, 교호식재, 집단식재, 요점식재 등은 한결같이 의도를 지닌 배식 방법이다. 임청각을 한 시대의 문화 거점으로 이끈 이종악은 화단을 만들어 작약을 재배하였다. 임청각 내의 건물을 따라 화단 공간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한다. 조선의 선비에게 작약은 매화, 복숭아와 더불어 사랑채의 마당에서 볼 수 있는 선비정원 식재의 대표 품종이다. 사랑마당은 주변 건물과 담, 석가산, 식재 등의 조경 요소로 영역이 한정된다. 그는 진산부원군 강희맹(姜希孟, 1424~1483)금양잡록을 공부하면서 작약 화단을 조성한다. 이는 이종악이 식물 지식을 체계 있게 학습하였음을 보여준다.

 

화단에 작약을 심었는데 심고 기르는 방법은 진산에게 배웠습니다.

藥增花壇 / 栽養之法 / 得諸晉山

 

-류도원, 제이산보문, 국역 노애집2, 강병욱 역,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동인, 2023, 102.

 

더군다나 임청각 주인이었던 이종악의 매화에 대한 전문적 관심 또한 이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제법 식물 관련 서사를 풍요롭게 발견할 수 있는 장면이다.

 

꽃나무 중에 분매를 더욱 좋아하여 / 반드시 좋은 품종을 구했는데 / 일찍이 동해를 유람하다가 / 기이한 매화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 인하여 우리 형에게 보내니 / 매화의 맑은 향을 절반 나누었고 / 우리 형이 매화를 매우 아꼈으나 / 애석하게도 일찍 죽었습니다

尤愛盆梅 / 必求品佳 / 嘗遊東海 / 載歸奇査 / 仍寄我兄 / 淸意一半 / 我兄甚愛 / 惜其夭短

 

-류도원, 제이산보문, 국역 노애집2, 강병욱 역,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동인, 2023, 102.

 

이종악의 매화 사랑은 분매로 이어진다. 노지 식재와 더불어 분에 심어 감상하는 분매를 선호한다. 품종 또한 가려서 반드시 좋은 품종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必求品佳] ‘필구품가의 태도를 지녔다. 입수 경위 또한 남다른 스케일을 보인다. 동해 유람 중 기이한 매화를 만나 현지에서 묘목을 채취한다. 그렇게 귀하게 가져와서는 류도원의 형에게 절반을 나눈다. 물건을 나누는 게 아니라 뜻을 나누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맑은 뜻 절반[淸意一半]’이라는 청의일반은 얼마나 고급스러운 서사인가. 식물을 통하여 돈독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이종악의 식물성 사유를 엿본다. 이종악은 자연에서 직접 산수를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였건만, 때로는 누워서 분매와 화목을 곁에 두고 산수화를 벽에 걸어 더욱 즐겨[尤樂山水] 누워서 노닐고자 감상하려는 와유[思欲臥遊]를 즐겼다. 실내 정원 또한 남다르게 구성하여 펼쳐두었을 이종악의 서재를 상상한다. 분매의 맑은 향을 따라 나서니 군자정 옆 연못으로 맑은 하늘이 펼쳐진다. 군자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맑은 뜻 또한 봄바람에 실려 시선을 이끈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까지 곁에 둔 군자정

 

  안동 임청각과 탑동파종택은 150여 미터 떨어져 있다. 임청각은 제자리를 찾는 복원 중이라 위성 사진에서도 빈 자리가 훤할 정도로 채울 일이 가득이다. (구글 어스로 제작하여 색상팔레트로 변환)  
  안동 임청각과 탑동파종택은 150여 미터 떨어져 있다. 임청각은 제자리를 찾는 복원 중이라 위성 사진에서도 빈 자리가 훤할 정도로 채울 일이 가득이다. (구글 어스로 제작하여 색상팔레트로 변환)  

군자정은 안채와 사랑채 외에 별도로 마련된 별당 정원이다. 별당은 집의 한쪽에 터를 잡아 아예 확장된 독립생활 공간으로서 역할을 하는 별채 공간이다. 누마루 구조 또는 정자 형식으로 만든다. 대개 지당이라는 점경 요소가 딸려 있다. 마음 수양의 공간으로 주자의 반무방당의 고사를 규모와 디자인의 근거로 삼는다. 이웃한 안동 고성이씨종택의 영모당도 별당 정원이다. 군자정이 담장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한정한다면 영모당은 한정하지 않는다.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경주 독락당과 강릉 오죽헌의 활래정이 별당 정원의 사례이다.

 

  임청각 배치도, 붉은선 안이 군자정과 방지 영역 (출처 :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 실측조사보고서, 2001)  
  임청각 배치도, 붉은선 안이 군자정과 방지 영역 (출처 : 안동 임청각 정침 군자정 실측조사보고서, 2001)  

군자정은 임청각 우측에 방형의 연못과 함께 영역을 형성한다. 대청의 원기둥은 손바닥으로 감싸면 둥글게 결을 느끼게 한다. 방의 각기둥은 모서리가 손끝에 닿을 때 차갑고 단호하다. 원과 각, 두 기둥은 같은 마루 위에서 서로 다른 사유의 자세를 취한다. 들문을 위로 걷어 올리면 순식간에 낙동강 쪽으로 군자정이 열린다. 벽이 사라지고 강바람이 마루를 가로질러 지난다. 방은 정자가 되고 정자는 강 위에 앉는다. 군자정 주변은 쪽마루를 돌려 난간을 설치하고 2곳의 계단으로 진입한다. 한국전통정원의 원림 구성에 연못을 두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수경관이나 조경 요소에서 성리학적 수양과 우주론, 도교적 이상향과 풍류의 미학까지 두루 아우른다.

 

군자정 옆 方池(방지)는 반무방당(半畝方塘)이다. 주희(朱熹, 1130~1200)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가져온 말이다. 나는 그 방지 앞에 한참을 섰다. 3월의 수면은 차가운 하늘빛을 그대로 담는다. 구름이 미끄러지듯 지난다. 영남산 능선이 물 위에 잠깐 흔들린다. “반 이랑 네모난 연못이 거울처럼 열려 있어[半畝方塘一鑑開]”로 시작하는 시가 관서유감이다. 이 시에서 방지는 수경 요소이면서 마음을 비추는 사유의 대상이다. 거울처럼 맑아야 하늘의 구름과 빛이 함께 배회[天光雲影共徘徊]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맑음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가[問渠那得淸如許]. 원두에서 활수가 흘러들어오기 때문이다[爲有源頭活水來].

 

이처럼 주희의 관서유감시는 강릉 선교장의 활래정, 안동 병산서원의 광영지, 안동 도산서원의 천광운영대, 성주 한주정사의 일감헌, 천안 애오려 원림의 일감소 등에서 한국정원의 주요한 이름으로 사용된 사례이다. 작고 네모난 연못인 방지원도의 개념 또한 반무방당의 시의 경지와 개념이 공간에 직접 차용되었거나 반영된 사례이다. 이처럼 관서유감의 어휘는 인문의 정신을 내면화하여 정자와 대의 이름, 연못의 형식으로 한국정원문화 곳곳에 새겨진다. 맑은 수면을 통하여 마음의 근원을 묻는 정원 공간은 인문의 사유가 형태가 되는 장소로 기능한다.

 

진정한 효심에서 비롯된 군자정 원림의 내공

 

임청각 군자정 원림의 확장은 이종악의 반변천 12경승의 선유 유람의 경지에 머물지 않는다. 가문의 올곧은 정신인 효와 의를 내공으로 품었기에 국난의 위기에서 찬란하게 발현된다. 세속의 명리에 얽매이지 않고 거문고를 타며 호연지기를 기르던 수양의 공간에서 새로운 결심이 들어선다. 이종악의 6세손인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이 군자정 누마루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본다. 이상룡은 더 이상 경치만 바라볼 수 없었다. 이 군자정 마루에서 구국의 결단을 내린다. 조상 대대로 400년 가까이 이어온 기득권과 99칸 대저택의 안위를 포기한다. 노비 문서를 불태운 뒤, 1911년 식솔을 이끌고 삭풍이 살벌하게 부는 만주 서간도로 떠난다. 군자정 마루에서 바라보던 낙동강 동호는 그날 이후 다른 빛깔로 흐른다.

 

이상룡의 결심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이상룡을 포함한 11명의 독립 유공자가 이를 증명한다.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 손자 이병화, 손자며느리 허은, 동생 이상동, 이봉희, 처남 김대락, 조카 이형국 등 한 집안에서 3대에 걸쳐 항일 의병과 독립운동에 나선 사례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상룡은 만주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독립군을 양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다. 이들은 항일 단체의 최전선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헌신한다. 일제는 임청각의 항일 의지를 억압하고 민족의 혈맥을 끊겠다며 마당 한가운데로 철도를 놓는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임청각 군자정 원림은 낙동강을 떠났다. 정원의 경계를 압록강 너무 만주 벌판으로 더욱 웅장하게 확장한다.

 

효심에서 정원문화가 잉태되고 그 정원에서 ()가 자란다. 임청각 군자정 원림은 ()()가 역사로 뻗어나가는 독특한 원림 문화를 지녔다. 무려 11명이라는 위대한 독립 유공자를 배출해 낸 고결한 정신이 배양된다. 산수 경영을 사유와 올곧은 정신으로 향유하며 뜰과 마음을 함께 가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허주 이종악이 12승경으로 확장하여 넓혔던 선유 정원의 경계는 훗날 치열한 독립 투쟁의 요람으로 만주 벌판으로 확장된다. 임청각 군자정 원림의 조경 유산은 이러한 올곧은 정신의 랜드마크에서 그 깊이를 찾는다.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아름다운 전통 조경 유산이다. 군자정 마루와 낙동강 반변천 12경승에서 나던 시와 거문고 소리는 여전하다. 군자정 마루에서 낙동강 쪽으로 몸을 튼다. 3월의 강은 낮고 조용하다. 이종악이 거문고를 타며 바라보던 東湖(동호)의 물결이 지금도 저기 있다. 이상룡이 떠나던 날 아침에도 군자정 마루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강물이 흐른다. 강은 오늘도 흐른다.

 

  안동 임청각 종합정비계획(안동시, 2018, 333쪽 – 조감도(정면에서 본 뷰)  
  안동 임청각 종합정비계획(안동시, 2018, 333쪽 – 조감도(정면에서 본 뷰)  

 

안동 임청각을 찾았던 20243월은 철거한 철로와 주변 종합정비계획에 따른 복원 공사가 본격적으로 동력을 받고 있던 때였다. 2년 지난 지금, 그 복원 과정이 정비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상처를 덧입었는지 나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2018년에 수립된 종합정비계획의 조감도를 보면서 아쉬운 점을 발견한다. 석주로라고 이름 붙인 저 임청각 앞길은 처음부터 지하로 내려가야 마땅하다. 새로 짓는 박물관 또한 지상의 풍광을 해치지 않는 자세로, 가능하다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길을 그대로 둔 채 복원이라 부르는 것은 옹색하다. 형식을 고치고 정신을 되살리지 못하면 그것은 복원이 아니라 단장(端粧)이다. 길이 트이는 날, 군자정 마루에서 낙동강까지 닿는 그 거리를 이상룡의 결심이 다시 걸어올 것이다. 임청각 군자정 원림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¹⁾  평천장(平泉莊)은 당()나라 중기의 명재상 이덕유(李德裕, 787~850)가 조영한 당대 최고의 원림(별장)이다. 정치가의 이상향을 구현하고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반영한 정원이다. 이덕유가 자신의 저서인 평천산거계자손기(平泉山居戒子孫記)에 후손에게 강력한 계율을 남겼다. “후대의 이 평천을 파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며, 평천의 나무 하나, 돌 하나를 남에가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가꾼 평천장의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조차 절대 남에게 주거나 팔지 말고 대를 이어 온전히 보존하라는 강력한 유언이다. 유언이 글로 남았으니 그 강력함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²⁾ 권섭,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민속원, 2008, 352-355. 강심대는 원지정사에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소주(泝舟)] 부용대와 옥연정사 앞의 넓은 강줄기로 보인다. 다음날 용수에서 자고 농청대를 올랐다. 농청대는 옥연정사 바로 앞에 있으므로 강심대는 원지정사와 농청대(옥연정사 앞) 사이의 수면 또는 그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비정한다.

³⁾ 최열, 옛 그림으로 본 조선 -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혜화1117, 2024, 434.

⁴⁾ 이종악·서수용 역, 국역 허주유고, 임청각, 2008.

⁵⁾ ’ : 성인 남성이 팔을 위로 높이 올렸을 때의 높이, 또는 양팔을 양옆으로 벌렸을 때의 길이를 기준으로 통상 8() 또는 10자를 1길이라고 한다. ‘3길 남짓한쪽배는 3미터를 1길로 잡는다면 약 9미터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아주 작은 낚싯배보다는 조금 크고, 돛을 단 중형급 배보다는 작은 나룻배(쪽배)의 느낌을 준다. ‘남짓한이라는 표현이 붙어 있어, 딱 떨어지는 9미터라기보다는 그보다 조금 더 긴, 하지만 여전히 쪽배라고 부를 만큼 아담한 형태를 묘사한다.

⁶⁾ 이순임, ()문화와 누정()문화의 상관성 연구 - 무등산권을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박사논문, 2013. 이에 따르면 임청각 안동의 입향조인 이증의 아버지 좌의정 이원이 할아버지인 이암의 차 생활 전통을 기록으로 전해준 인물이라고 한다. 이암은 정몽주의 문인이었으며 두문동 차 정신을 고스란히 간직한 인물이다. 이암의 차 생활을 청담(淸談)’ 정신이라고 평한다. 이처럼 이암에서 손자 이원의 차생활은 후손에게 전해진다. 이원의 막내아들 임청각 이증에게 청담 정신의 차 생활이 전해진다. 이원의 청담 정신 차 생활은 김종직-남효온-정희량-김시습-정약용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⁷⁾ 이보, 경옥선생유집, 이원걸 역, 2008.

⁸⁾ 수암 권상하는 조선 성리학의 거대한 줄기인 이이(율곡) 김장생(사계) 송시열(우암)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도통(道統)을 이어받는다.

⁹⁾ 安東東南又有臨河川卽靑松邑溪下流之會潢水者也臨川有鶴峯金誠一故居至今門族蕃衍爲名村傍上有夢仙閣陶淵仙刹之勝

¹⁰⁾ 부암(傅巖)과 부암연(傅巖淵)傳巖(전암)傳巖淵(전암연)으로 표기한 문헌이 있어서 안타깝다. 최열의 옛 그림으로 본 조선 경기, 충청, 전라, 경사, 혜화1117, 2024, 439쪽의 내용이 그러하다. 책에 있는 이메일 주소로 내용을 알렸다.

¹¹⁾ 아양(峩洋)’ : 거문고 명인인 백아(伯牙)가 높은 산을 연주하면 종자기(鍾子期)좋구나.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도다.”라고 말하고, 흐르는 물을 연주하면 좋구나. 양양(洋洋)하여 강하(江河)와 같도다.”라고 평했다는 고사에서 전고한다. ‘아양금이라는 말이 연주를 알아줄 지음(知音)을 그리워하는 거문고라는 의미이다.

¹²⁾ 왕휘지가 산음(山陰)에 살 때 밤에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깨어 술을 마시다 문득 섬현(剡縣)의 벗 대규(戴逵)가 생각났다. 곧바로 배를 타고 밤새 가서 대규의 문 앞에 이르렀으나, 들어가지 않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까닭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흥을 타고 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간 것이다. 반드시 대규를 볼 필요가 있겠는가[乘興而來, 興盡而歸, 何必見戴].“ -임탄, 세설신어


(온형근, 시인::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茶敦])

『월간::조경헤리티지』은 한국정원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당대의 삶에서 향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습니다. 다양한 접근 방법으로 짧은 단상과 긴 글을 포함하여 발행합니다.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설계 언어를 창발創發합니다. 진행하면서 더 나은 콘텐츠를 개발하고 생산하면서 주체적, 자주적, 독자적인 방향을 구축합니다.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는 '방달초예반발(放達超睿反撥)'의 정신을 지향합니다." 
매임 없는 활달한 시선으로 전통의 경관을 응시하며, 보편적 슬기를 뛰어넘는 통찰로 그 속에 담긴 옛사람의 마음을 읽어냅니다. 나아가 고착된 현실의 언어를 거슬러, 오늘날의 현대적 언어로 우리 정원의 미학을 다시 다스리고 되살리는 평론 작업을 추구합니다.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월간 조경헤리티지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다른 뉴스레터

© 2026 월간 조경헤리티지

한국정원문화를 당대의 삶으로 벅차고 가슴 설레이며 살아 숨쉬게 하는 일

뉴스레터 문의namuwa@gmail.com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8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