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12호] 수야가 코스모님께

현재에 머무르는 동시에 머무르지 않는 법

2025.04.24 | 조회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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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뉴욕에서 두 여자가 매달 주고받는 편지로 삶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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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코스모님 :)

 

우리의 오프라인 데이트 이후의 날들도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고 계신가요? 이제 서울에서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족과의 아쉬운 시간들은 어떻게 잘 마무리하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모쪼록 따스한 기억들 야무지게 챙겨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코스모님이 지난번 편지에서 순간에 충실하게 보내는 나날의 소중함을 이야기해 주셨잖아요. 저는 요즘 산책을 참 많이 하며 지내고 있어요. 무언가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걷는 일이야말로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아요. 예전부터 걷는 행위를 참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시간과 장소가 정해진 일정이 빼곡히 있는 일상에서는 하루종일 맘편히 걷기 어려울 때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맑은 날 여유있게 즐기는 긴 산책은 요즘 저의 일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자주 산책하는 집 근처 공원. 얀양천을 끼고 긴 산책로가 있어서 원하는 만큼 걸을 수 있어요.
자주 산책하는 집 근처 공원. 얀양천을 끼고 긴 산책로가 있어서 원하는 만큼 걸을 수 있어요.

걷기의 유용함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연구 결과가 나와있어서 두말하면 입아픈데요. 몸과 마음, 특히나 뇌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산책의 가장 좋은 점은 '현재에 머무르면서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 두가지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산책을 하면 그 공간의 온도, 습도, 바람과 같은 날씨 뿐 아니라 주변의 소리와 냄새까지 섬세하게 받아들여져서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실존의 감각이 강화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게 참 좋더라고요. 동시에 내 의지와 힘으로 땅을 밟고, 밀며 앞으로 나아가니 눈 앞의 풍경이 계속 바뀌면서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미래로 나아가는 기분이 드나봐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아주 가끔은 세시간도..^^) 한바탕 산책을 신나게 하고 나면 복잡했던 머릿속이 어느 순간 정리되어 있다는 점도 좋아요. 처음에는 분명 어떤 고민거리나 아젠다를 가지고 나가거든요. 그런데 한참을 걷기에 열중하다보면 마치 발로 구겨진 마음을 펴고 있었던 것처럼 그 고민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더라고요. 풀리지 않는 문제의 해결 방안이나 생각지 않았던 좋은 아이디어가 문득 떠오르는 경험도 여러번 했고요. 그럴 때는 내가 걷고 있다는 의식마저도 잊은 채 주변 환경이 주는 새로운 풍경과 감각에 몰입해있었을 때가 많았던 것 같아요. 신기하죠?

망원 한강공원의 초입에 있는 작은 광장. 4월의 어느 날, 버스킹을 하는 청년과 커플이 만들어내는 무드가 좋더라고요.
망원 한강공원의 초입에 있는 작은 광장. 4월의 어느 날, 버스킹을 하는 청년과 커플이 만들어내는 무드가 좋더라고요.

며칠 전에 <가치 있는 삶> 이라는 철학 인문서를 한 권 읽었는데요. 마리 루티라는 프랑스 출신의 인문학자가 쓴 책이에요. 이 책의 구절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었어요.

 

"... 이러한 경험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순간은 우리가 눈앞의 대상이나 활동에 너무 몰두하여 주변 환경을 깜빡 잊거나,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있음을 강렬히 느낄 때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보다 더 큰 어떤 존재에 사로잡힌 것처럼 느끼곤 한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진 행위자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외부 세력의 포로가 된다. 우리는 세상의 일에 완전히 매료되어 일시적으로나마 평상시의 관심사를 잊게 된다. 이러한 즉각적인 자아 경험은 자아와 세계의 구분이 사라질 수 있게 우리를 압도하고 세계 속으로 완전히 삼킨다. 자아와 세계는 모두 온전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지만, 이 불안정은 우리가 자아와 세계의 첨예한 통찰을 경험할 수 있게도 한다.

마리 루티, <가치 있는 삶>

 

깨달음과 통찰은 대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안정과 불안정의 경계, 움직임과 멈춤의 경계에서 주로 오는가 봐요. 그리고 그 경계의 지점에 가기 위해서는 현재에 오롯이 몰두하는 감각이 필요한가 봅니다.

걷다가 꽃을 만나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어요..
걷다가 꽃을 만나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어요..

최근의 저 역시 주어진 하루에 순수하게 몰입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거든요. 원래 그 전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이 일을 하면 나중에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던 것 같아요. 한정된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책을 읽거나 콘텐츠를 접할 때에도 늘 생산성과 연결시키려고 하고, 취미 생활을 할 때조차도 트렌디하고 그럴듯한 것을 골라 사회적 스펙으로 이용하고 싶어했음을 조심스럽게 고백해봅니다. 그런 목적의식을 가지다보니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몰입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어요. '쓰임'을 잠시 내려놓고 '무용함'에 집중하며 마음껏 산책할 수 있어서 행복한 요즘입니다.

오늘 편지에서는 저도 모르게 걷기 예찬을 너무 많이 해버린 것 같은데요. 브루클린에는 어떤 산책 스팟들이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이제 곧 뉴욕으로 돌아가시면 그 곳에도 완연한 봄이 와있겠지요? 한국에서 잔뜩 충전한 에너지를 가지고 뉴욕에서도 활기찬 일상 이어가시기를 진심으로 바랄게요!  그럼 우리는 다음달 편지로 다시 만나요-! :)

 

오늘도 가뿐하게 만삼천보를 걷고 온,

수야 드림


P.S %NAME% 님은 어떤 산책 코스를 좋아하나요? 혹시 숨겨둔 나만의 걷기 좋은 장소를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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