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iling#25 | 🍂가을에는 ○○한다🍂

발행인의 말

🍔가을에는 ○○한다

가을이 되니까 가을 특집을 하자, 라는 건 짧고 게으르고 관성적인 생각이죠. 아이디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짧고 게으르고 관성적이지만 실제로 많이들 그렇게 합니다. 관성이 주는 재미도 있거든요. 12월 30일에서 1월 1일 넘어갈 때 사실 큰 변화는 없죠. 다른 날들 넘어가는 것과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연말 되면 괜히 올해의 ○○○ 이런 거 뽑아보고 싶고, 또 새해 되면 사주팔자 한 번 봐야할 것 같고, 뭐 그런.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인간사라는 거, 별 거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냥 옹기종기 모여서 별 일 아닌 일들로 투닥거리고 가끔 횡재하고 가끔 울고, 뭐 그런. (그 재미로도 살아가지더라고요?)

여하간에. 가을에 어울리는 음악 플레이리스트 같은 더 게으른 것을 하려다 멤버들이 "그런 건 다른 데서 이미 다 하고 있다!"라고 한 덕에 그럼 '가을'에 대한 자유주제로 써주세요, 라고 해보았습니다. 어떤 글들이 도착해있을까요? (저도 아직 안 읽음.) 한 번 다같이 체크해보자고요.

(참? 소음발광은 이번 호에 첫 등판인가?)

🍔단편선 발행인

🍂가을에는 ○○한다#1

🐮가을에는 환기를 한다

환기는 매일 한두 번씩 밥 먹듯 해야 하는 일이지만 생각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봄에는 미세먼지와 황사가 무섭고 여름에는 열기와 습기가 무섭습니다. 특히 여름엔 문을 꼭 닫고 사는 편입니다. 보물을 지키는 고대의 정령처럼 집 안의 차고 마른 공기를 수호합니다. 저희 집은 공항 근처라 모든 창이 두 겹입니다. 밀봉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단단히 봉해진 상태입니다. 집 밖을 나설 때 은밀히 이루어지는 거래 외의 통상은 모두 금하고 있습니다. 가끔 답답해질 때면, 외기를 들이는 대신 저를 내보냅니다. 습기에 절은 몸을 끌고 계단을 올라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누가 당신을 반겼으면 하나요? 바로 Willis Haviland Carrier(1876.11.26 ~ 1950.10.7) 선생님입니다. 한여름 저희집은 캐리어님의 사당으로―저희 집 에어컨은 LG 것이지만―운영됩니다. 겨울에는 그래도 가끔 환기를 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제게 남아 있는 장난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음료가 담긴 캔으로 누군가를 놀라게 해 본 적이 있으시다면, 친한 친구의 옷 속에 얼음을 넣어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창문을 조금 열고 '9'까지 다이얼을 돌린 전기장판과 이불 사이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으시다면, 한겨울 대뜸 창문을 여는 제 마음을 아실 겁니다. 하지만 역시나 본격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제게는 효율과 합리를 중시하는 공교육의 정신이, 제 안의 어나더브릭인더월을 처단하는 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을에는 환기를 합니다. 세 계절 하지 못한 환기를 보상하듯, 온종일 문을 열어둡니다. 집 앞 고물상의 쇠 찌그러뜨리는 소음도, 서향 방 창문 낮게 깔리는 직사광선도 모두 받아들이며.

Pink Floyd -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Two

🐮천용성

🍂가을에는 ○○한다#2

🐚가을에는 누군가를 생각한다

곡식을 걷듯, 가을에는 음악을 걷습니다. 〈홍차왕자〉와 〈Ghost Dance〉, 〈다가당〉 모두 늦은 여름에 쓰기 시작해서 가을에 완성했습니다. 내년에 나올 EP를 위한 곡들도 가을 버프와 원년 멤버 원정이의 기운을 받아 순조로이 만들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앉아있던 쇼파〉는 늦가을 발매 예정인 곡입니다. 예전에 전복들에서 드럼을 쳤던 성현이의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쓴 노래입니다. 가을에는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할머니도 생각 나고, 요즘엔 잘 못 만나는 전 멤버 현우(a.k.a 제이슨)도 생각납니다. 현우네 집에서 기타 치고 놀던 날 가벼운 마음으로 받았던 데모를 붙입니다.

https://soundcloud.com/osoriworks/cosmic-abalone-a-sofa

🐚전복들 고창일

🍂가을에는 ○○한다#3

🦋가을에는 대대대청소를 한다

가을에는 대대대청소를 한다. 대청소에서 대가 두 개나 더 붙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청소라고 할 수 있다. 몸과 마음까지도 정화되는... 어떠한 의식 같은...

이불 커버를 벗긴다. 고양이가 올라간다. 고양이를 내린다. 새 이불 커버를 깐다. 일이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 다시 고양이를 내린다.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어렵다. 아무리 깨끗이 청소를 해도 다시 이 대대대청소는 돌아오겠지. 먼지 털다가 갑자기 이상한 깨달음을 얻는다.

노래를 튼다.

Takashi Kokubo - Oasis Of The Wind II

🦋보일

🍂가을에는 ○○한다#4

🍔가을에는 크루아상을 먹는다

그렇게 자주 가진 못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라이즈오토그래프컬렉션에 들른다. 라이즈오토그래프컬렉션은 홍대입구역과 합정역 사이에 위치한 호텔이다. 숙박이 목적이 아니다. 호텔 로비에 있는 타르틴 베이커리에 가기 위해서다. 다른 종류도 있지만 늘 집는 것은 크루아상. 따듯한 커피 한 잔 시키고 크루아상을 베어 물면 뭐랄까, 적당한 수준의 사치를 부리는 느낌이랄까, 어떤 안도감을 준다. 안도감? "그래도 내가 이 정도는 내 돈으로 사 먹을 수 있어." (호텔 빵집치곤 별로 안 비쌈.) "나도 이런데 가끔 오기도 한다구." (정작 숙박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그런 감정들일까.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이 노동자니, 철거민이니, 빈민이니 뭐니 이야기하고 다니는 게 같잖지 않아? 역시 인간은 모순적이야, 하고 넘기면 다인 걸까?)

그러나 어찌 되었건 라이즈오토그래프컬렉션 로비의 타르틴 베이커리에서 판매하는 크루아상은 언제나 신기할 정도로 좋은 밸런스의 맛이고, 그것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일상적 사치의 마지노선이라는 마음으로.

Juliette Greco - La Javanaise

🍔단편선

🍂가을에는 ○○한다#5

🌞가을에는 콩국수를 먹는다

아직 여름을 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야속하게도, 여름은 떠날 채비를 마쳤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콩국수를 먹는다.

콩국수를 못하는 식당은 잘 없다. 평균적으로 맛있기 때문에 어떤 식당이든 좋다. 하지만 여름의 끝을 장식하기 위한 콩국수이니만큼 특별히 공과 시간을 들이고 싶다. 그럴 땐 장전동 마산분식과 중앙동 해밀콩국수를 찾는다.

마산분식의 콩국수는 한 그릇에 4,500원이다. 싸고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해밀콩국수는 두 배나 비싸지만 그만큼 진한 콩국을 맛볼 수 있다. 소금이나 설탕 없이 콩국 본연의 맛을 느끼며 먹는 것도 좋다. 어떻게 먹어도 콩국수는 맛있다. 콩국수에선 여름 냄새가 난다.

맥주와 차를 섞어 마시며 보낸 광안리의 밤, 습한 공기를 맡으며 걸었던 시민공원의 새벽, 몰아치는 비를 맞으며 달렸던 회동 수원지. 모든 것을 보내 줄 시간이다. 짧은 추억의 아쉬움을 중얼거리며 마지막 콩국수를 먹는다. 안녕 여름. 또 만나.

Attacking Forces - 검은바다

🌞소음발광 강동수

🍂가을에는 ○○한다#6

🐤가을에는 버드피딩을 준비한다

옆집 감나무의 가지가 잘렸다. 가지에 앉아 울던 새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소리를 잃고 조금 무기력해졌다. 새가 오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버드피딩Bird feeding 용품을 구입했다. 예전에는 해외 배송이라 구입하기가 어려웠는데 최근 국내에도 다양한 제품들이 수입되었다. 모이 두 봉지와 유리창에 붙이는 모이통을 샀다. 높은 곳에 붙여 천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든 제품이다. 새들은 모이를 먹고, 나는 새소리를 들을 것이다. 서로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는 배부른 가을을 기대한다. 많이 와라. 해바라기 씨앗도 준비할게 얘들아.

Benjamin Francis Leftwich - Pictures

🐤전유동

🍂가을에는 ○○한다#7

🐶가을에는 알게 된다

마크 트웨인 Mark Twain :
배가 안전하게 뜰 수 있는 최소한의 깊이를 뜻하는 뱃사람 용어. 톰 소여, 허클베리 핀을 탄생시킨 소설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가 스스로 지은 새 이름. 그리고 밴드 신나는섬의 정규 2집 [집으로]의 이야기 속 주인공.

유년의 집을 떠나, 기나 긴 여정을 거친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와 황혼에 머문 마크트웨인. 이 곡은 허클베리 핀의 뗏목처럼 인생을 부유하며 떠돌다 '어른'이 된 마크가 어린 시절의 마크에게 들려주는 노래이다.

마크 트웨인 〈신나는 섬〉 앨범 소개 中

해는 서편 먼 산 너머
잠든 강물 끝에 쉬다 가고
새는 강 너머 어딘가
쉼 없이 흘러 흘러온 듯
강물에 실려 알게 된 건
내가 닿을 곳이 아니라
하루는 그저 이렇게 간다는 것
흔들며 손짓하며 뒤돌아 보내며
그저 하루가 또 저물 뿐
마크 트웨인 〈신나는 섬〉

가을이 오면 알게 된다. 평범하고 시시한 매일을 보내는 것이 대단한 모험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라는 것을. 사실 삶의 대부분은 그런 하루의 연속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하루가 오늘도 저물어가고 있음을.

신나는섬 - 마크트웨인

😙후하 🐶성진영

🍂가을에는 ○○한다#8

🦦가을에는 반바지와 스웻셔츠 그리고 캔버스 단화

햇볕은 여전히 따가워도 불쾌하진 않은 낮. 조금씩 서늘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기분 좋은 바람의 밤. 이 두 가지를 가장 완벽하게 만끽할 수 있는 방법. 무릎 위로 올라가는 신축성 좋은 반바지, 잠옷으로 입어도 어색하지 않을 낙낙한 사이즈의 빈티지 스웻셔츠 그리고 캔버스 단화. 가을의 설렘을 몸에 두르는 저의 선택 되겠습니다.

포인트 1.

이렇게 옷을 입고 야외 테라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손으로 대충 뜯어 먹는 게 더 맛있을 크루아상 혹은 크로크무슈와 거리 구경, 사람 구경, 추억 팔이, 남 걱정하기. 후후후.

포인트 2.

클럽 빵,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카페 언플러그드의 교차점에 있는 커피랩에 간다. 음료를 주문하고 바로 옆 빈티지 옷가게 에이징 퍼센트에서 옷을 구경한다. 자리로 돌아와 커피를 마시며 거리 구경, 어쩌다 마주치는 지인과 인사, 같이 온 친구와 수다. 배가 고프면 옷가게 바로 옆 우동 집이나, 우동집 바로 위 '또보겠지 떡볶이', 아니면 그 골목에 있는 '진만두'에서 저녁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