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의 말
🐮 계절의 계획
가을이 온 것 같네요. 하늘이 높아지고 바람이 차졌어요. 긴 비가 그치고 나니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기후학적 가을은 일평균 기온이 20도 밑으로 내려간 첫날부터라고 합니다. 절기상 가을은 이미 8월 7일, 입추를 지나며 시작됐고요. 저의 가을은, 아직 오지 않은 가을과 서둘러 온 가을 사이에서, 이제 막 시작 된 것 같습니다. 코가 간지럽고 살이 마르기 시작했어요. "벚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한 게 얼마 전인데 벌써 가을이라뇨.
작은 고무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죠. 화분을 들이고 식물에 관한 책을 몇 권 구입했어요. 처음 읽은 것은 임이랑 씨가―밴드 디어클라우드의 베이시스트―지은 『아무튼, 식물』입니다. 그는, 식물을 기르기 전까지는 봄이 싫었다고 합니다. "계절이 바뀐다는 것은 그저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었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해낸 것들과 실패한 것들의 명암을 뚜렷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이 문장을 발견하고 무척 반가웠어요. 같은 이유로 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울해하곤 했거든요.
그래도 이번 가을은 좀 낫습니다. 뼈와 살 사이를 비집고 오는 바람에 "헉"하고 숨 멎는 일이 몇 번 있었지만, 괜찮습니다. 지키지 않아도 아무 책망이 없을 장난 같은 계획을 얼마 전 세웠거든요. 이행의 의무가 전혀 없는 그런 계획이요. 하지만 저는 그것이 이뤄지길 소망하고, 그래서 시간이 가기를 은은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이런 좋은 방법이 있는 줄 알았으면, 열심히 계획을 세우며 살 걸 그랬나 봐요.
🐮천용성
전복들 고창일의 육아일기 『기타팝파』 #6
🐚 Plan B
전생의 부부가 남매로 태어난다면서요? 그렇담 담이는 누나 팡이를 오래 짝사랑했던 친구가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담이는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는데 (최근 아빠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긴 합니다. “읍빠”) 누나 팡이가 유치원을 다녀오거나, 유치원 버스를 기다릴 때면 아이돌 팬 마냥 힙시트를 양발로 차며 소리를 지릅니다. 누나가 침대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면 헐리웃 액션 스타 보듯 소리를 지르고, 기어이 다가가서 애정을 표합니다. 반면 팡이는 좀 쿨합니다. 누가 좀이라도 귀찮게 굴면 제 방으로 가버리고, 혹여 따라오는 기미가 보이면 “안돼! 여기는 공주님 방이야” 외치며 문전박대를 해요. 팡이 혼자일 때는 제가 놀이터에서 아무리 힘껏 놀아줘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 “언니, 오빠는 어떻게 하면 생겨?” 같은 말을 하곤 했는데 정작 동생이 생기고 나니 조금 냉랭합니다. 놀이터에서 만나는 다른 동생들에게만 세상 친절해요.
그러던 팡이가 요즘은 조금 변했습니다. 귀찮아하는 건 비슷한데 함께 노는 걸 조금씩 츤츤하게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담이 너 저리 가. 저기 가서 내 귀여운 인형이랑 놀던가, 흥” 하며 아끼는 인형을 던져주기도 하고, 엄빠 몰래 열심히 놀아주기도 합니다. 놀아주고 있는 걸 들키면 화들짝 놀라서 자리를 떠나곤 해요. 팡이는 담이의 울음소리를 저희 부부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꽤나 구체적이에요. “아빠 담이는 지금 비행기를 태워달라는 거잖아.” “엄마 담이는 오랜지색 마트 떡뻥(아기들이 먹는 무색소 무미의 과자)은 싫어해.” 같은 저희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의 해석까지 척척 해냅니다. 맞는지 아니었는지는 몇 년 뒤 담이에게 꼭 물어보겠습니다.
신혼여행에서 생긴 팡이도 네 살 터울로 낳은 둘째 담이도 계획하지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팡이에게도 담이는 계획되지 않은 동생이고 앞으로도 저와 아내는 필요 이상의 계획적인 삶을 살지는 않으려 합니다. 원하는 게 이미 이뤄져도 이뤄진 줄 모르고 살거나 무엇을 원했었는지조차 까먹게도 하니까요.
아이 둘을 낳았다고 애국자라는 얘기를 듣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저는 애도 둘 낳았고 군대도 다녀왔지만, 애국자도 아니고 삶에 국가의 담론을 담고 싶지도 않습니다. 함께 고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도 있을 일에 세상은 여기저기 너무 많은 Plan A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아요. 소소하게라도 지금보다 앞으로 더 오래 살고 싶은 이유가 더해진다면, 그래서 신혼부부와 신생아가 많이 늘어난다면 참 좋겠습니다. 다양한 대안 가족이나 입양에 대한 사회적 고민도 더 활발해지면 더 좋겠어요. 팡이랑 담이는 거실에서 아파트 놀이터를 내다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친구들이 나와 놀고 있으면 당장에라도 뛰어 나가 놀겠다는 마음으로 보고 있지만, 놀이터에 아이들이 차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습니다. 미래의 팡이와 담이의 동생들은 누군가의 Plan 밖 놀이터에서 자유롭게 태어나 더 신나게 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복들 고창일
📺오소리뉴스📺
🐮천용성 @yongsung000
[공연] 9. 17(금), 19:30, 프리즘홀(홍대), Connect
🐤전유동 @jeonyoodong
[공연] 9. 12(일), 18:00, 생산소(부여), 옥수수파티
[공연] 9. 17(금), 19:30, 프리즘홀(홍대), Connect
[공연] 9. 24(금), 19:00, 네스트나다(홍대), 뉴비떼잔치
😙후하 @hoohaa.seoul
[공연] 9. 11(토), 카페 언플러그드(홍대)
[공연] 9. 26(일), 아이다호(망원)
⚡소음발광 @soumbalgwang_official
[이벤트] 9. 24(금), 오방가르드(부산), 소음발광 2집 [기쁨, 꽃] 음감회 in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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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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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스와니
간만에 댓글 남겨봅니다 현실이 바빠서 그동안 정독을 못했는데 요즘 몰아서 읽고 있어요 소소하지만 따뜻한 일상이야기들이 오늘 비가와서 그런지 더 안온하게 느껴집니다. 담이,팡이 아빠 육아일기 오늘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런 담이와 팡이 '읍빠'글자에 음향이 덧입혀있는듯 귓가에 맴도네요 창밖 놀이터에서 이쁘게 뛰노는 모습도 접하게 되기를 글 읽는내내 미소가 지어져서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애독자
대구자전거동호회
대구는 분무기로 뿌리듯 젠틀레인이 잔잔하게 내리고 있어요. 회사가 아니었음 놀이터의 아이들 처럼 나가 비를 맞고 싶어요.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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