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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수학 전공 교황이 AI 회칙을 쓴 이유

135년 전 산업혁명에 던진 같은 질문이 돌아왔어요

2026.05.24 |
from.
Kwangseob

들어가며

구독자님, 1891년 5월 15일, 교황 레오 13세는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노동 착취에 대해 가톨릭 교회 최초의 사회 회칙[1]​을 발표했어요. <새로운 사태에 관하여(Rerum Novarum)>라는 이 문서는 "기계가 사람을 대체할 때, 사람의 존엄은 누가 지키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죠.

정확히 135년이 지난 2026년 5월 15일, 교황 레오 14세가 자신의 첫 회칙에 서명했어요. 제목은 <위대한 인간성(Magnifica Humanitas)>. 주제는 AI 시대의 인간 존엄 보호예요. 그리고 이 문서의 발표 자리에는 구글이나 OpenAI가 아닌, Anthropic의 공동창업자 크리스토퍼 올라(Christopher Olah)가 서게 돼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건 종교 뉴스가 아니에요. 14억 신자를 가진 세계 최대 제도 조직이 AI 거버넌스 논쟁에 공식 포지션을 잡는 순간이에요.

🏭 1891년, 기계가 사람을 밀어낼 때

19세기 후반, 유럽의 공장 지대는 전쟁터였어요. 산업혁명이 만들어낸 생산성은 경이로웠지만, 그 이면에는 하루 16시간 노동, 아동 착취, 빈곤의 고리가 있었죠. 소수의 자본가에게 부가 집중되고, 대다수 노동자는 생존선 아래로 밀려났어요.

당시 유럽 사회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어요. 사회주의자들은 사유재산 폐지를 주장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의 자정 능력을 믿었어요. 교회는 어느 쪽에도 서지 않았죠. 정확히는,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레오 13세의 <Rerum Novarum>은 그 공백을 메운 문서였어요. 핵심 메시지는 명확했어요. 사회주의도 무제한 자본주의도 답이 아니며, 노동자의 존엄과 권리가 어떤 경제 체제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구체적으로 정당한 임금, 노동시간 제한, 노동자의 결사권을 명시했어요. 교회가 노동 문제에 공식 입장을 낸 건 역사상 처음이었어요.

이 문서의 힘은 도덕적 권위에서 나왔어요. 당시 가톨릭 신자 수는 유럽 인구의 절반에 가까웠거든요.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교황의 한마디가 수억 명의 도덕적 기준선을 움직인 거예요. 흥미로운 건 <Rerum Novarum>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쪽 모두를 비판했다는 점이에요.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것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도 모두 인간 존엄에 어긋난다고 본 거죠. 실제로 이 문서는 이후 유럽 각국의 노동법 개혁과 복지국가 체제의 사상적 토대 중 하나로 작동했어요. 브리태니커는 이 문서를 "현대 가톨릭 사회 교리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해요.

🤖 2026년, AI가 사람을 밀어낼 때

135년이 지나 세상은 달라졌지만, 구조는 놀라울 만큼 닮았어요.

19세기의 증기기관이 육체노동을 대체했다면, 2026년의 대규모 언어 모델[2]​은 지식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했어요. 공장 노동자 대신 사무직 전문가가 위협받고, 기계 대신 알고리즘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죠. 소수의 빅테크 기업에 부와 영향력이 집중되는 양상도 산업혁명 시대의 자본가 계층과 겹쳐요.

교황 레오 14세, 본명 로버트 프리보스트(Robert Prevost)는 이 구조적 유사성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어요. 시카고 태생의 지금 교황은 빌라노바 대학교에서 수학 학사 학위를 받은 뒤 한때 고등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친 사람이에요. 교황 중 수학을 전공한 건 사실상 역대 최초예요. 하버드의 수학자 마틴 노왁은 교황명 Leo(3글자)와 서수 XIV(=14)를 합치면 3.14, 즉 원주율 π가 된다며 "교황 파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어요. 이후 20년 넘게 페루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 역대 최초의 미국 출신 교황이면서 동시에 페루와 이중 국적을 가진 유일한 교황이기도 해요.

취임 직후 추기경단 앞에서 레오 13세의 이름을 딴 이유를 직접 설명했는데, 핵심은 이거였어요: "우리 시대에도 또 하나의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고, AI의 발전이 인간 존엄과 노동의 정의에 새로운 도전을 던지고 있다." TIME은 취임 첫 해인 2025년에 이미 레오 14세를 'AI 분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목록에 올렸어요. 수학을 전공한 교황이 AI 윤리를 말한다는 조합 자체가 뉴스였던 거죠.

<Magnifica Humanitas>의 서명일이 5월 15일인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Rerum Novarum>의 서명일과 정확히 같은 날짜예요. 바티칸은 의도적으로 135년의 시간을 이어 붙인 거예요.

5월 25일 발표 현장도 전례를 깨요. 보통 회칙은 추기경들이 대신 발표하는데, 이번에는 교황이 직접 참석해서 연설하고 최종 축복을 내려요. 교리 담당 추기경 페르난데스, 통합적 인간 발전 담당 추기경 체르니와 함께 평신도 연사 두 명, 더럼대의 윤리신학자 애나 롤런즈와 산타클라라대의 신학윤리학자 레오카디 루숌보, 이 나란히 서요. 네덜란드 공영방송의 바티칸 특파원 안드레아 브리데(Andrea Vreede)의 말이 정확해요.

"추기경들이 하면 아무도 안 들어요. 교황이 있으면 모든 카메라가 모이죠."

⚖️ 왜 하필 Anthropic인가

발표 현장에 서는 기술 업계 인사가 크리스토퍼 올라라는 점은 주목할 만해요.

올라는 Anthropic의 공동창업자이자 해석 가능성(interpretability)[3]​ 연구를 이끄는 인물이에요. AI가 왜 특정 결정을 내렸는지를 역추적하는 분야의 선두 연구자예요. 구글 브레인에서 딥드림(DeepDream) 시각화를 만들었고, OpenAI에서 해석 가능성 팀을 이끌다가 2021년 Anthropic 창업에 합류했어요. TIME 선정 2024년 AI 분야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포함된 인물이기도 하죠.

바티칸이 구글이나 MS, OpenAI가 아닌 Anthropic을 선택한 건 맥락을 알아야 이해가 돼요.

바티칸과 빅테크의 역사부터 볼게요. 바티칸은 이미 2020년에 MS, IBM과 함께 <로마 AI 윤리 선언(Rome Call for AI Ethics)>[4]​을 발표한 바 있어요. 투명성, 포용성, 책임, 공정성, 신뢰성, 보안이라는 6대 원칙을 세웠죠. 이후 이 선언에는 50개 이상의 조직이 서명했고, 2024년 히로시마에서는 불교, 힌두교, 이슬람, 유대교 등 11개 세계 종교가 함께 서명하는 행사로 확대됐어요. 바티칸은 AI 윤리 논의에 있어 수년간 대화를 쌓아온 조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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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번에는 존 파트너인 MS나 IBM이 아닌 Anthropic일까요? 여기서 Anthropic의 현재 상황이 결정적이에요. 2026년 2월, 미국 국방부는 Anthropic에게 자사 AI 모델의 '모든 합법적 사용(all lawful use)'을 허용하라고 요구했어요. Anthropic은 자율 무기 개발과 미국 시민 대상 대규모 감시에 대한 사용 제한은 양보할 수 없다고 거부했죠.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Anthropic을 '공급망 위험(supply chain risk)'으로 지정(이건 원래 적대국 기업에 적용하는 조치예요.)하고, 전 연방기관에서 즉시 사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어요.

Anthropic은 3월에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 위반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샌프란시스코 연방법원의 리타 린(Rita Lin) 판사는 가처분 결정을 내리면서 "미국 기업이 정부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적국 수준의 딱지를 붙이는 건 오웰적 발상"이라고 썼어요. 바로 어제(5월 19일)에도 워싱턴 D.C. 연방항소법원에서 구두 변론이 열렸을 만큼, 이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에요.

정리하면, Anthropic은 지금 "AI에 윤리적 경계선을 긋겠다"는 입장 때문에 미국 정부와 법정 싸움을 하고 있는 유일한 프론티어 AI 기업이에요. 바티칸이 이 시점에 Anthropic의 인물을 단상에 올린 건, 단순한 기업 초청이 아니라 AI 거버넌스 논쟁에서 어느 편에 서는가를 보여주는 신호라고 볼 수 있어요.

오스왈드의 시선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GTM 전략 수립에서 자주 봐왔던 패턴 하나를 떠올렸어요.

"표준 선점(standard pre-emption)"이라는 게 있어요. 시장이 아직 표준을 정하지 않았을 때, 특정 플레이어가 먼저 기준을 제시하고 그 기준 위에 생태계를 쌓는 전략이에요. USB 규격을 인텔이 먼저 제안했던 것처럼요.

바티칸이 하는 게 정확히 이거예요. AI 윤리 거버넌스라는 아직 '표준'이 없는 영역에서, 14억 신자를 기반으로 먼저 프레임을 설정하고 있어요. 2020년 로마 선언은 프로토타입이었고, <Magnifica Humanitas>는 정식 론칭인 셈이에요. 회칙이라는 가톨릭 최고 권위 문서 형식을 쓴 것도 우연이 아니에요. 이건 '의견'이 아니라 '교리에 준하는 가르침'이거든요.

물론 반론은 있어요. 바티칸의 선언이 실제 규제력을 가지느냐고 물으면, 직접적으로는 아니에요. EU AI법이나 미국 행정명령 같은 법적 구속력은 없죠. 하지만 1891년 <Rerum Novarum>도 법적 구속력은 없었어요. 그런데 그 문서가 20세기 유럽 복지국가의 도덕적 기반이 된 건 부정하기 어렵죠. 바티칸의 영향력은 법이 아니라 프레이밍에서 나와요. 어떤 행위가 '허용 가능한 것'이고 어떤 행위가 '선을 넘은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감각을 형성하는 힘이에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발표 현장에 교황이 직접 참석하고, 추기경 대신 평신도 연사를 세우고, AI 기업 창업자를 나란히 앉히는 이 구성은 콘텐츠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설계예요. 기업 전략을 세우며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메시지를 누가·어디서·어떻게 전달하느냐가 메시지 내용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바티칸은 이걸 135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치며

정리하면 이래요.

  1. 바티칸은 기술 혁명기마다 '인간 존엄과 노동'이라는 같은 프레임으로 개입해왔어요. 1891년 산업혁명 때도, 2026년 AI 혁명 때도요.
  2. 「Magnifica Humanitas」는 종교 문서이면서 동시에 AI 거버넌스 논쟁에 대한 포지션 선언이에요. Anthropic 초청은 그 방향을 보여주는 신호예요.
  3. 바티칸의 영향력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도덕적 프레이밍에 있어요. 그리고 135년 전 그 프레이밍은 실제로 세상을 바꿨어요.

5월 25일 회칙 전문이 공개되면, AI 전쟁·감시·노동에 대해 바티칸이 어떤 구체적 기준선을 긋는지 직접 확인해 보시길 추천해요. 특히 자율 무기 금지와 노동자 보호에 대해 어떤 수준의 구체성을 담는지가 이 문서의 실질적 영향력을 가늠하는 열쇠가 될 거예요. 종교와 무관하게, AI 거버넌스의 다음 프레임이 어디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서가 될 거예요.

참고자료 & 더 읽기

핵심 출처

배경 지식

각주

  1. [1] 회칙(Encyclical):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보내는 공식 교서예요. 교황 문서 중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 형식 중 하나로, 해당 교황의 핵심 우선순위를 담아요. 대통령의 취임 연설과 비슷한 무게감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2. [2] 대규모 언어 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 ChatGPT, Claude 같은 AI 서비스의 기반 기술이에요.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학습해 인간처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AI 모델을 말해요.
  3. [3] 해석 가능성(Interpretability): AI가 특정 판단을 내린 이유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역추적하는 연구 분야예요. 자동차 블랙박스처럼 AI의 내부 작동 과정을 들여다보는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4. [4] 로마 AI 윤리 선언(Rome Call for AI Ethics): 2020년 바티칸이 MS, IBM 등과 함께 발표한 AI 윤리 프레임워크예요. 투명성, 포용성, 책임, 공정성, 신뢰성, 보안의 6대 원칙을 담고 있어요. 2024년까지 50개 이상 조직이 서명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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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안광섭은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이자 OBF(Oswarld Boutique Consulting Firm) 리드 컨설턴트이다. 대학에서 경영데이터 관리, 비즈니스 애널리틱스 등 데이터 분석을 가르치는 한편, 현장에서는 GTM 전략과 인공지능 전략 컨설팅을 이끌며 기술과 비즈니스의 접점을 설계하고 있다. AI 대화 시스템의 기억 아키텍처(HEMA) 연구로 학술 논문을 발표했으며, 매일 글로벌 AI 논문을 큐레이션하는 Daily Arxiv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KBMA와 기술경영전문대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지은 책으로 《생각을 맡기는 사람들: 호모 브레인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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