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지우지 않음에서 오는 따뜻함이 있다

2025년이 되어서야 <빌리 엘리어트>를 본 사람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2025.07.04 | 조회 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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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구독자.

 

7월이 되어서야 메일을 보내 미안해. 6월이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간 나는 활동하고 있는 서울인권영화제에서 상영회와 서울 퀴퍼 부스 운영도 하고, 페스티벌도 다녀오고, 대학원 첫 학기를 마치기도 했어. 20대 초부터 꿈이었던 대학원 생활인데 막상 가보니 엄청나게 대단할 것도 없고 또 그렇게 두려워할 것도 없었어. 돈도 작업도 어떻게든 되더라고. 그동안 넌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 별다른 근황이 없는 것 같아도 하루하루 들여다보면 또 별게 있었기도 하잖아.

 

이번 레터에선 종강 뒤에 보게 된 아주 유명하고도 아주 소중한 영화를 꺼내보고자 해. 바로바로 <빌리 엘리어트>! 놀랍게도 나 이 영화 이번에 처음 봤어. <빌리 엘리어트>에 대해 내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더라고. 먼저, 이 영화의 감독이 스티븐 스필버그라 알고 있었어. 개인적으로 스필버그 영화들이 썩 취향이 아니어서 <빌리 엘리어트>도 ‘음~ 그냥 그렇겠지’ 하고 넘겼었거든... 스필버그 영화는 잘 만든 건 알겠지만 통하는 지점이 많이 없는 듯한 느낌. 하지만? 감독은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vid Daldry)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영화 포스터만 보고 약간 중산층 집안 백인 아이가 발레에 재능을 펼치는 그런 따뜻 영화인가 했는데… 이 또한 나의 편견… 직접 보고 나니 80년대 잉글랜드 탄광촌의 파업 이야기가 담긴 거의 켄 로치 영화더라고. 역시 뭐든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한다. 안 그랬음 내가 편견 덩어리인 걸 모를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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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빔프로젝터를 틀어 놓고 보는데 정말 정말 좋더라. 내가 만일 방황하던(인생이 계속 방황의 연속임을 몰랐던) 10대나 20대 초 즈음 보았다면 오열했겠군 싶은 영화였어. 일단 춤을 너무 사랑하는 빌리와 스스로 지닌 편견과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빌리의 꿈을 결국 지지해 준 가족들, 빌리가 꿈을 펼칠 수 있게 물심양면 돕는 이웃들까지… 

 

<빌리 엘리어트>는 보기 드물게 따뜻하고 세심한 진심이 담긴 영화라 느꼈어. 그리고 나는 그 따뜻함이 ‘지우지 않음’에서 온다고 생각해.

 

먼저 영화는 빌리의 빛나는 꿈을 이유로 주변 환경을 지우거나 단순한 장애물로 그리지 않아. 영화의 배경은 발레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1980년대 잉글랜드 북부 탄광촌 더럼. 당시 탄광 폐쇄에 맞서 장기적인 파업을 하고 있던 지역인만큼 영화엔 팍팍한 현실들이 담겨 있어. 빌리는 광부인 아버지와 노조에 소속되어 파업 투쟁을 하는 형, 치매 증상이 있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어. 빌리의 어머니는 빌리가 더 어렸을 적 병으로 돌아가셨어. 하지만 어머니는 종종 빌리의 기억으로 화면에 등장해 빌리에게 따뜻한 잔소리를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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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가 춤이 너무 좋아 화장실에서도 춤을 추고 길에서도 춤을 추고 다닐 때, 빌리의 집안과 동네는 파업으로 인해 어려운 상황임을 영화는 드러내. 또 빌리가 발레하는 걸 반대하는 아버지와 형도 딱딱한 악인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정과 마음이 느껴지게끔, 그도 변화하는 인간임을 보여줘. 마초 사회에서 살아왔고 탄광 폐쇄와 파업까지 겪어내고 있는 아버지와 형이 빌리가 발레를 한다는 걸 곧바로 지지하기란 어려웠을 것 같아. 조금은 어른이 되고 주변에서 하나둘 직업을 가지고 자리 잡는 걸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아. 자기가 제대로 뒷받침 해줄 수도 없고 예술이라는 것이 평생 이 아이의 삶을 보장해 줄 수도 없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꿈을 걱정 없이 응원해 주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결국은 빌리를 사랑하기에 빌리가 사랑하는 춤을 누구보다 응원해 줘. 나중엔 빌리의 오디션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도 있는 돈을 털고 이웃들도 물심양면 응원과 도움을 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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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남성이 발레를 배우는 건 게이 같다는 편견을 뭉개고 넘어가지 않아. ‘빌리는 게이가 아니야!’라던지 아예 그런 편견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는 이 이슈에 관해 분명히 짚으면서도 은근하고 자연스러운 태도를 지니고 있어. 노동 문제든 젠더나 퀴어 문제든 이를 바깥의 이슈로 보고 타자화하지 않고 자전적인 이야기가 섞였나 생각이 들 정도로 ‘그냥 우리 얘기’를 하는 느낌을 받았어. 특히 빌리 주변에 빌리를 편견 없이 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안심되고 좋았어. 복싱 수업을 듣던 빌리에게 먼저 발레 수업 같이 듣자고 해 준 친구 데비도,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고 빌리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준 윌킨슨 선생님도, 왕립발레학교 오디션장에서 만난 친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까지도. 나는 또 편견이 있어가지고 왕립학교 심사위원들이 빌리의 탭댄스 섞인 발레를 이해해 주지 않음 어쩌지 걱정했는데. 그들도 춤을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나 봐. 이해를 잘 해주더라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캐릭터는 빌리의 친구 마이클이었어. 보통 또래 남자 아이들끼리는 남성성을 더 부각하려 하고 그에 벗어나면 놀리는 경우가 많잖아. 하지만 마이클이란 친구로 영화는 나의 편견을 또 깨. 빌리가 발레복 입는 게 이상할 것 같다고 걱정을 토로할 때 마이클이 놀리면 어떡하지 했는데, 오히려 마이클은 ‘왜? 멋있을 것 같은데?’라고 말해주더라고. 빌리가 자신의 집에 놀러 왔을 땐 립스틱을 칠하고 여성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줘. 마이클은 스스로 퀴어임을 알고 드러내는 인물이야. 그리고 마이클은 빌리를 여러모로 참 좋아해. 또 빌리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건 바로 발레 선생님의 딸 데비! 영화는 여성과도 남성과도 빌리를 엮으며 발레리노가 게이가 아닐 수도 게이일 수도~ 하지만 그게 뭐가 문제죠? 라는 태도를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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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보면 지금 나는 나름 꿈꿨던 곳에서 나름 꿈꿨던 걸 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자유로워진만큼 하루하루를 성실히 채워나가지 못하고 있는 듯해. 그래서 지금 이 기회를 게으름으로 놓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이 생기더라고. 어쩌면 잘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빌리처럼 그냥 순수히 좋아서 열정적으로 설렜던 마음을 기억하려고. 웃기지만 초심을 간직하며 이 영화처럼 사랑과 따스함이 가득한 영상을 만들어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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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재미로 하루를 살아가는지 궁금해. 앞으론 꼭 허술하더라도 꾸준히 편지를 보낼게. 그럼 답장 줘!

 

p.s.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O.S.T.는 절반 정도가 T.Rex의 노래로 채워져 있어. 그중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Cosmic Dancer>의 노래를 보내.

 

Fro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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