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네가 보내준 플레이리스트 잘 들었어. 두 번째 곡으로 넣은 ‘Caveboy - Something Like Summer’가 참 좋더라. 이렇게 플레이리스트를 주고받으니, 아주 어릴 적 좋아하는 노래를 CD에 구워서 친구 생일에 선물했던 기억이 난다. 난 정말 유구하게 저런 하이틴 로맨스 시리즈와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덕분에 저런 유치하지만 풋풋한 하이틴 서사가 여름이랑 참 잘 어울린다는 걸 알게 됐어.
나는 지금 방학이 끝나기 전 밀린 일들을 쳐내느라 정신이 없어. 다행이게도 얼마 전 다녀온 대만에서만큼은 한껏 여유를 즐기다 왔어. 스무 살인가, 스물한 살인가 그때 처음 대만에 다녀왔었는데. 그때 기억이 좋아서인지 작년부터 대만이 되게 가고 싶었거든. 우연히 첫 번째도, 이번 여행도 다 8월 대만이었다. 여름 대만. 정말 덥지만 우리나라도 이제 비슷하게 덥기도 하고, 여름에만 풍길 수 있는 초록빛 생기 같은 게 좋아서 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대만은 식물로 가득 찬 도시잖아. 그래서 여름이란 계절이 대만에선 그 생명력을 오롯이 뿜어낼 수 있는 것 같아.
이번 여행은 정말 느슨한 계획만 가지고 갔는데, 타이베이 필름하우스만큼은 꼭 가자고 내가 강력 주장했어.
여행 가서 다른 나라 영화관 구경하고 오는 게 재밌더라고. 시원한 곳에서 2시간 정도 쉴 수도 있고. 또 대만의 시네마테크에선 어떤 영화를 상영할지, 극장 문화는 어떨지 궁금했어. 하지만 언어의 장벽이 있기에 영자막이 있는 일본 영화 <At the bench>를 그곳에서 보게 되었어. 한국에서도 개봉했더라고.
재개발을 앞둔 구역에 마지막으로 남은 벤치에 얽힌, 벤치 위에서 오간, 벤치에 관한 이야기를 세 명의 감독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야. 에피소드 중엔 벤치가 외계에서 온 존재들의 아버지라는 설정과 그가 좀 더 이곳의 벤치로 남아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제일 좋았어. 상영관엔 사람들이 꽤 많았고 먼지 냄새가 났고, 웃음소리가 들렸어. 영화가 소소히 웃겨서 앞에 계신 관객분께서는 계속 키득키득 웃더라고.
사실 필름하우스에서 본 영화보다 더 인상 깊고 궁금했던 건 타이베이 시립미술관에서 보았던 실험 다큐멘터리야. 시립미술관 3층에 올라가 보았던 개인전 <Even When Our Shouts Are Out of Sync>에 전시된 <Writing the Time Lag>이란 작품이었어. 이 전시를 보고 대만으로 유학 가고 싶어졌어. 잘 몰라서 그런 걸 수 있겠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연결감이 신기했어. 대만과 한국의 역사가 분명 다르지만 맞닿은 부분이 많고, 감독이 동시대 동아시아의 여성이기에 비슷한 감각들이 있었던 것 같아. <Writing the Time Lag>는 2014년 대만 해바라기 운동 이후 시작한 작업이래. 나도 이 운동이 무언지 잘 몰랐어서 밑에 설명을 좀 적어볼게.
대만 해바라기 운동은 2014년 3월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대만 대학생과 사회운동 세력이 대만의 국회인 입법원을 점령한 사건이다. 하나의 중국으로 향하는 길을 반대하며 대만 청년층이 이 사건에 참여한 이유는 대만 내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가 추진해 온 중국과의 관계 개선, 협력 강화가 대만에 대한 중국의 지배권을 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작가는 이후 예술학교를 휴학하고 대만 정당과 워싱턴 D.C.에서 정치 활동도 하고, 다양한 분야를 탐험하면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작업을 계속 해오고 있대. 아래는 미술관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작가의 말을 번역한 거야.
<Writing the Time Lag>는 대만의 해바라기 운동 이후 대만 국민의 정체성 변화를 기록하려는 의도로 시작되었지만, 저는 자연스럽게 시위에서 발생한 성차별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참여형 영상 방식을 활용하여 많은 대만 원주민 퀴어와 여성들을 인터뷰했습니다. <Writing the Time Lag>를 위해 저는 친구들과 스스로에게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반드시 여성으로만 구성된 제작진과 함께 촬영해야 해."
저는 <Writing the Time Lag>를 몇 년마다 재편집하기로 결심했고, 그 결과 2016년, 2019년, 그리고 2021년 버전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형식 덕분에 저는 현재에 서서 과거를 돌아보고, 대만의 정치적 담론과 제 자신의 입장이 2년마다 어떻게 변했는지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헉, 작가 홈페이지에 영상을 볼 수 있는 링크가 올라와 있다. 이 글 쓰면서 찾았어.)
영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작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이 첫 화면이었어. 첫 화면엔 어떤 부분이 어떤 시기에 편집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다이어그램이 있고, 그 옆엔 이런 글이 쓰여 있어.
In the future, this film may change again; Taiwan might no longer exist as it does today, or perhaps it will have achived its own independence.
This is why we are compelled to document our time lags.
미래에 이 영화가 다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대만은 오늘날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쩌면 독자적인 독립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시차를 기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2014년은 우리나라도 세월호참사를 비롯해 많은 슬픔과 투쟁이 있던 시기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한국의 역사를 거칠게 돌아보면 반복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있었던 것 같고, 이를 받아들이는 내 심정과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아. 그러니 이를 다큐로 담는다면 계속 다시 편집하고 싶지 않을까 싶네.
(이건 얼마 전 우연히 본 대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관한 글인데, 정말 공감되고 좋아서 뜬금 없이 링크를 걸어둬. 서로 침범하고 경계가 흐려지는 다큐멘터리와 '현대미술' 영역의 관계에 대해 호기심, 불만, 의문 같은 게 있다면 정말 추천해! <다큐멘터리의 ‘현대 미술 전환 (contemporary art turn)? 대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TIDF) ‘굿바이 리얼리티’ 이후의 과제(2022)>, Tung Yung-wei)
나도 플레이리스트를 받았으니, 하나 건네볼게 ^ㅡ^
플레이리스트는 어떤 하나의 콘텐츠를 주제로 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알고 느낀 대만을 담고자 했어. 그래서 플레이리스트의 첫 시작은 해바라기 운동 당시 만들어졌던 노래, Fire EX의 ‘Island's Sunrise’야. 이 노래가 만들어진 계기가 되게 인상 깊은데.
2014년 해바라기 운동이 침체기에 빠지자, 학생 단체들은 예술의 힘을 활용하여 지지를 결집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국립타이베이예술대학교(이하 미술학, 영화학, 뉴미디어학, 애니메이션학)의 학생 단체들은 행사에서 공연 중이던 Fire EX의 리드 보컬에게 이 운동을 위한 노래를 써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Fire EX는 이에 공감하며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리드 보컬 다청은 작사, 작곡 영감을 얻기 위해 입법원을 찾았습니다. 그날은 3월 23일 '위안 점거' 시위가 있던 날과 겹쳤습니다. 학생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린 페이판은 시위와 폭력적인 진압이 TV에 중계되는 것을 보고 다청에게 "지금 제 생각은 우리에게 조금의 부드러운 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양다청은 48시간 만에 "Island Skylight"라는 곡을 작곡하고 Fire EX와 함께 편곡 및 녹음을 진행했습니다. 3월 27일, 그는 공동 창작 학생들과 함께 입법원에 가서 이 곡을 라이브로 가르치고 학생들과 시민들의 합창을 녹음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함께 "Island Skylight"를 완성했습니다.
그 뒤는 정의농, 선셋 롤러코스터처럼 한국 아티스트와 콜라보를 해서 알게 되었던 대만의 아티스트와 여행 이후 새로 알게 된 노래들, 남색대문의 노래들로 채워 넣었어.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간 사진과 영상들은 다 직접 찍어온 것들이랍니다! 재밌게 들어주길. 9월이 되면 정말 바빠질 것 같은데, 그때도 새로운 노래를 찾아 들을 여유 정도는 남겨두었음 좋겠다.
그럼 9월에 꼭 다시 볼 수 있길 바라며. 안녕!
Fro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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