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로운 모모레터로 인사드려요. 올해부터는 매달 한 번, 첫주 목요일에 구독자님을 찾아 뵈려고 해요. 뉴스레터를 보내드리는 플랫폼도 달라졌어요. 새롭게 시작된 모모레터는 제가 쭉 맡아서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피스모모의 아영이예요.
내가 쌀 씻는 방법
피스모모 사무국은 점심마다 함께 밥을 해먹는데요. 가끔 쌀을 씻을 때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열두살의 제가 엄마의 식사준비를 거들고 있었는데요. 엄마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물어보셨어요. “이렇게 쌀 씻는 건 어디서 배웠어?”
제가 쌀을 물에 조금 불렸다가, 한 차례 헹군 후에, 물을 조로록 따라내고, 적당히 남은 물에 빨래를 비벼빨 듯 촥촥 비벼 씻고 있었거든요. 오돌토돌한 스테인리스 요철에 쌀의 때를 벗기듯, 차르륵-착,차르륵-착, 쌀 씻기는 소리가 꽤나 경쾌했더랬죠.
엄마의 질문에 내가 이 쌀 씻기를 어디서 배웠나 생각해야 했어요. 엄마의 쌀씻기는 저와 달랐거든요. 엄마는 쌀과 쌀이 서로 부드럽게 부대끼도록 헹궈내고, 뽀얀 쌀뜨물을 받아 모아두었다가 화분에 주셨어요. 뭔가 우아하고 고요한 느낌의 쌀씻기였는데, 그에 비해 저의 쌀씻기는 굉장히 우렁찼지요.
그러게, 내 쌀씻기는 대체 어디서 온 건가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어요. 할머니의 방식이더라고요. 주말마다 할머니댁에 가서 하루, 이틀 자고 오곤 했는데요. 할머니는 분홍색 플라스틱 바가지에 쌀을 박박 비벼 씻어 밥을 지어주셨답니다. 내가 쌀이라면 아플 것 같은 느낌, 목욕탕에서 머리가 흔들리도록 때를 박박 밀리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 바가지엔 오돌토돌한 줄무늬 요철이 있고요. 바닥엔 울긋불긋 꽃무늬 스티커가 붙어있었어요.
두 분의 쌀 씻기 방식은 달랐지만 한 가지 똑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쌀을 헹궈내는 손이 서툴러 쌀을 한 웅큼 흘려버리는 제게 한 톨, 한 톨 다 주워 다시 헹구도록 하셨다는 것. "이 한 톨이 얼마나 귀한 건데, 그렇게 흘려버리면 못 쓴다."
자급자족할 수 있나요?
대한민국의 식량자급율은 OECD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합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3개년 평균 곡물자급률은 19.5%였는데요. 2008년 31.3%와 비교하면 큰 폭으로 하락한 수치입니다. 식량자급률이라고 하는 것은 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식량의 전체 양 중에서 그 국가가 자체적으로 생산, 공급할 수 있는 비율을 의미하는데요. 식량자급율이 30%라고 하면 먹거리의 30%만 국내에서 생산되고 나머지 70%는 국외에서 수입한다는 이야기예요.
2022년 기준 밀은 전체 소비량의 1.3%, 옥수수는 4.3%, 콩은 28.6%의 자급률을 보이고 있는데요. 쌀의 자급률은 같은 해 기준 105%로 국내 수요를 초과했어요. 다행이다 생각하실 수 있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첫째, 식생활의 변화로 인해 국내 쌀 소비량이 계속해서 감소추세(1인당 쌀 소비량: 1960년대 130kg / 2023년 56kg)에 있다는 점, 둘째, 국제무역협정 과정에서 한국은 쌀에 대한 관세율 513%를 유지하는 한 편, 중국, 미국, 베트남, 태국, 호주의 5개국 등으로부터 40만 8,700톤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하게 되었다는 점이예요. 쌀이 지나치게 많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국내에 쌀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요? 우선, 쌀값이 떨어지겠지요? 식생활의 큰 변화로 인해 2000년대 이후부터 쌀값 폭락 상황은 계속해서 심화되었어요. 정부는 쌀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제도들을 운영해왔는데요. 결과적으로 쌀값은 안정되지 못하고 폭락하는 사태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1995년 20kg에 3만143원이었던 쌀값은 2022년에도 4만6869원이었습니다. 30년 가까운 시간동안 가격이 거의 오르지 않았어요. 이 가격으로 보면, 한국사회에서 쌀은 시장재가 아니라 공공재로 기능해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쌀만 특별대우 하냐고?
실제로 한국에서 생산되는 타 농작물과 비교했을 때, 쌀은 현격하게 다른 대우를 받아왔어요. 박정희 정부는 쌀자급률 100%를 목표로 높은 가격에 농민들이 재배한 쌀을 사들였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농산물 개방이 시작되었지만, 쌀만큼은 예외였지요.
대선 후보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직을 걸고 쌀 개방을 막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거든요. 쌀에 지나치게 큰 국수주의적 정체성을 부과하면서 ‘쌀’은 국가가 책임진다는 암묵적인 사회계약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물론, 김영삼 대통령은 당선 이후 공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쌀농사의 정부의존도가 높아지는 상황이 지속되었고, 정치재이자 공공재가 되어버린 쌀농사의 결과는 빚이 되었습니다. 2024년, 나주의 한 농부님이 기록한 가계부에 따르면 일 년 내내 20마지기의 논에서 쌀을 짓고 남은 것이 92만원의 적자였다고 해요.
2024년 3월, 윤석열 대통령은 양곡관리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바 있고, 12.3 친위쿠데타로 윤석열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인 12월 19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역시 양곡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의 가장 큰 핵심은 쌀이 과잉생산되거나 쌀값이 폭락했을 때, 정부가 쌀을 매수하는 것을 재량에서 의무로 변경하는 것이었거든요. 정부의 쌀값 안정을 위한 제도적 개입을 의무화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시장의 실질적인 쌀 소비량과 상관없이 정부가 쌀을 매입하는 것은 포퓰리즘 법안이고 혈세낭비라는 이유로 양곡법 개정안을 거부했어요. 2021년 양곡법에 따른 쌀 매입을 망설이다 때를 놓친 문재인 정권의 패착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가중시킨 원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쌀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너무 많은 짐을 지워온 책임은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와서 그 부담을 농민들에게만 지울 수는 없는 것이지요. 특히, 쌀값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정부는 쌀에 대한 책임이 분명히 있고 그 책임을 이행해야 합니다.
쌀의 소비량이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끼니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에서 누구도 배고프지 않은 사회를 만들 책임은 모두의 것이며, 선출된 권력은 그 책임을 이해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쌀, 밀, 먹거리 그리고 세계평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의 곡물수출이 차단되면서 전 세계의 밀가루 값이 치솟았습니다. 식량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들의 경우,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상황을 맞기도 했고,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했어요. 이 세계는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모두는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식량자급에 위협을 겪기도 하지만, 식량부족이 전쟁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요.
2018년 세계은행과 유엔이 공동으로 발간한 보고서 “Pathways for Peace(평화로의 경로)”는 기아와 식량 불안정이 사회의 취약성과 분쟁, 폭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무력 분쟁이 식량 위기와 기아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지요. 또한 기후위기로 인해 심화되는 식량 불안정 상황이 무력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적 요인이 될 뿐 아니라, 식량 가격 급등을 포함한 경제적 충격이 무력 분쟁의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음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2024년 4월에 발표된 세계 식량 위기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59개 국가와 지역에서 약 2억 8,2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위기(acute hunger)를 경험했다고 해요. 이는 2022년 대비 2,400만 명이 증가한 수치입니다. 특히, 32개국에서 5세 미만 어린이 3,600만명 이상이 급성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고요. 2023년에는 특히 무력분쟁과 재난으로 인해 난민이 된 사람들 중 급성 영양실조가 악화되었다고 해요. 이런 식량위기의 주요 원인은 무력분쟁과 식량 수출입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충격, 그리고 기후위기입니다.
양곡관리법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갈등은 한국 사회만의 것이 아닙니다. 무역을 통해 맞물린 온 세계가 개별 국가의 정책과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이지요. 당장 WTO 체제안에서 정부의 의무 매입과 관련한 이의제기가 발생할 수도 있고요. 현재 한국이 유지하고 있는 513%라는 쌀 관세율을 조정하라는 국제적 압박이 생길 수도 있어요. 한국은 유엔 식량원조협약(FAC)에 가입한 이후,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꾸준히 식량지원을 해왔다고 해요. 2025년부터는 연간 10만톤의 쌀을 11개국의 난민과 취약계층 약 260만명에게 지원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기후위기 속에서 국내 쌀의 잉여생산량이 세계의 빈곤완화에 더 기여하는 동시에 국내 농업생태계를 안정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더 다양하게 찾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겠고요.
하지만 오늘날의 정치현실은 참 기가 막힙니다. 2024년 12월 27일, 경찰 차벽에 막혀 남태령에 멈추었던 농민들의 트랙터를 기억하실거예요. 그 날 피스모모도 남태령과 사당, 한남동까지 현장에 함께했는데요. 그 트랙터들의 행렬을 보고 국민의 힘 소속의원 김민전은 말했습니다. “한 번도 농사짓지 않은 트랙터가 대한민국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너무 놀랍지만 또 놀라운 일은 아니죠. 백골단을 국회에 들여 기자회견까지 하게 한 사람이니까요.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국가폭력의 대표적 상징을 몰랐다고 말하면 다 괜찮은 것이 되나요? 굉장한 실력자들이 정치를 하더라도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사회안에 효능감 있는 변화를 가져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이 어려운 일의 의미와 무게를 모르는 사람들이 국회의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여러가지로 마음이 힘듭니다.
꼭꼭 씹어 야무지게 삼키는 평화
평화는 무엇일까요? 때때로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평화를 오늘 저녁 식탁에서 아주 가까이 느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삼각김밥을 드시든, 찌개백반을 드시든, 집밥을 지어드시든, 쌀 한 톨, 한 톨을 꼭꼭 씹어드시면서 그 쌀을 생산한 농민들, 그 사람들의 얼굴을 헤아려보고, 그 쌀이 지어진 논과 반찬이 재배되었을 밭, 비닐하우스와 그 비닐하우스에서 노동했을 이주노동자들의 얼굴, 그 사람들의 얼굴을 헤아려보는 거예요.
엄마가 쌀 한 톨, 한 톨, 다시 주워 씻으라고 하실 때, 싱크대에 흩어진 쌀알을 주워넣는게 얼마나 귀찮았는지 몰라요. 그거 몇 톨 쯤 흘려버린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시나 생각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 아이는 자라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나이가 좀 들었고요. 쌀을 씻는 과정에서 쏟아버리지 않을 만큼 능숙해졌으며, 혹시라도 쌀이 조금이라도 쏟아지면 한 톨, 한 톨 아주 악착같이 주워담아 헹궈냅니다.
이 모두 엄마와 할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 덕분이고요. 이 세상을 조금씩 알아오면서, 쌀 한 톨이 그냥 쌀 한 톨로만 보이지 않게 되어버린 덕분이지요. 그 쌀 한 톨이 저의 밥상에 오기까지 얼마나 수고로운 단계들이 있는지 목소리내주신 분들 덕분에 그 쌀 한 톨의 무게를 알아버렸고, 한 번 알아버린 이상 모르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달까요.
2025년 1월 14일, 노벨상 수상자 153명이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전세계 7억명이 굶주리고 있으며, 기후위기로 인해 식량생산량은 더 감소할 것이므로 각국 정부는 식량위기 예방을 위해 혁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메시지였어요. 기후위기 다음은 식량위기일 것이라는 경고였지요. 경고할 때, 그 경고를 귀담아 듣고 예방할 수 있다면 이 세계는 얼마나 더 평화로워질까요? 하지만 돈과 권력이 만나 쉴 틈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은 그런 경고에 멈추어서지 못하는 듯해요.
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피스모모가 만들어가고 싶은 평화의 모습은 참 다채롭고, 그 다채로운 평화를 만들어가는 속도는 빠르지 못합니다. ‘모모’라는 이름을 붙일 때부터 ‘빠름’과는 거리가 생겨버렸나봐요. ('모모'라는 이름에는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운다'의 의미와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답니다.) 앞으로도 피스모모는 계속 조금 느리게, 그러나 충분하게, 평화를 사유하고 또 만들어가고자 해요. 청소년들과, 교사들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활동가들과 함께 평화에 대해 서로 배우는 시공간을 만들어내면서요. 새해를 맞아 피스모모 정기후원자가 되시는 것은 어떠세요? 피스모모의 여정에 든든한 동료가 되어주실 분들을 늘 기다리고 있답니다.
지난 월요일이 입춘이었는데, 이번주 내내 매섭게 춥네요. 이 추위가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바라고, 쌀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위해, 또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는 모든 손길들에게 다정한 안부를 전합니다.
피스모모 아영 드림
참고자료
https://www.nongmin.com/article/20240710500506
https://www.nongmin.com/article/20241223500079
https://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39916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8594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46
https://www.khan.co.kr/article/202406281229001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7514
http://kwangju.co.kr/article.php?aid=1132066800159245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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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한거 축하해요^^
피스모모
고맙습니다. 보내주신 커피와 케이크도 잘 받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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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eun
정말 너무하네요.. (글 너무 잘써서ㅠㅠ) 쌀과 평화를 이렇게 다정하게 이야기하다니♥ 이 노래가 생각났어요. 쌀 한 톨의 무게 / 홍순관 쌀 한 톨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무게를 잰다 바람과 천둥과 비와 햇살과 외로운 별 빛도 그 안에 스몄네 농부의 새벽도 그 안에 숨었네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었네 버려진 쌀 한 톨 우주의 무게를 쌀 한 톨의 무게를 재어본다 세상의 노래가 그 안에 울리네 쌀 한 톨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평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농부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 쌀 한 톨의 무게는 우주의 무게
아영
다정한 푸른, 덕분에 이 노래를 귀기울여 듣게 되었네요. https://youtu.be/UVL2VTkZTVU?feature=shared 푸른을 생각할 때마다 쌀 한 톨의 무게, 딸기 한 알의 무게를 함께 떠올리게 돼요. 늘 고마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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