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레터

술냄새와 계엄의 밤

지난 12월 3일, 저는 국회 앞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와중, 제 옆에 술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중년의 남성분이 오셨는데요.

2025.0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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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평화와 서로 배움의 이야기, 피스모모의 이야기를 전해요. (피스모모 평화/교육연구소, 피스모모 평화페미니즘연구소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구독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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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부터는 모모레터라는 이름으로 매달 한 번, 첫 주 목요일에 구독자님을 찾아뵙게 됩니다. 올 해의 모모레터는 제가 쭉 맡아서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피스모모의 아영이에요. 


술에 취했어도 말은 바로 하시더라고요. 

 

지난 12월 3일, 저는 국회 앞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와중, 제 옆에 술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중년의 남성분이 오셨는데요. 몸을 가누지 못해  저를 포함한 옆 사람들의 어깨에 계속 부딪히시더라고요. 그 분은 비틀거리면서도 마주 선 경찰들에게 양 팔을 마구 휘두르며 말했습니다. 

“야! 너네 이러다가 공범된다. 너네들 지금 판단 잘해야 해! 문 열어, 임마!” 

 

그 분은 그 말이 끝날때마다 저를 돌아보며 “안 그래요?”하고 동의를 구하셨어요. 맞는 말씀이시니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 분이 제 쪽으로 얼굴을 돌리실 때마다 겨울바람에 섞여 비릿해진 안주냄새가 푹푹 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코와 입을 가리게 되더라고요. 아, 정말 아저씨 옆에 있기 싫다는 마음이 올라오고, 속까지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 분과 떨어진 곳으로 옮겨갈까, 계속 서 있을까 갈등하던 와중에 어떤 문장이 떠올랐어요.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조야하면서 장엄한

 

권보드래님의 책 <3월 1일의 밤>에 담긴 문장입니다. 31운동에 대해 저자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일본군에 조사를 받게 되자, 아이고 나는 독립의 뜻을 모르고 그냥 따라 외쳤다, 독립만세를 안 외치면 집에 불지른다고 누가 협박해서 외쳤다, 시위에 가긴 갔지만 화장실 가느라 일찍 빠져나왔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기록들을 소개합니다. 조야하기 짝이 없죠.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은, 자기 손가락을 베어 피로 독립만세 깃발을 만들고, 등사기를 구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해 돌렸으며, 옆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음에도 다음날 다시 시위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년 전,  <3월 1일의 밤>을 읽고 서평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요. 당시 제가 썼던 글의 일부를 여기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만세의 뜻도 모르고 만세를 불렀거나(128쪽), 만세를 부르며 지나 가는 행렬에 왜 만세를 부르는가 물었더니 ‘웃음’만 돌아왔다는 것으로 보아 왜 만세를 하는지도 모른 채 만세를 불렀거나(129쪽), 만세를 어떻게 부르는 것인지 몰라 보통학교 학생들을 찾아가 만세 부르는 법을 배우거나 (130쪽), 다른 지역이 다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 지역만 안 부를 수는 없 다는 경쟁심리(137쪽) 또는 독립이 되면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133쪽)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으며,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집을 불에 태운다는 협박(335쪽)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동시에 폭력을 행사하려는 군중을 설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격을 가하려는 경찰을 설득한 유봉진(56쪽)이었으며, 스스로를 국민의 대표자로 자임하며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 던 양봉식(59쪽)이었거나, “나는 총알이 맞지 않으니 마음대로 쏴보라”며 저고리를 풀어헤친 오광옥(120쪽)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3·1운동 의 얼굴들을 이렇게 불렀다.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 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7쪽)”

문아영,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미래>

 

한국의 공교육 속에 성장한 저에게 3.1운동은 교과서에 담긴 독립운동가들의 얼굴로 기억되는 역사였어요. 적어도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부끄럽게도 교과서가 담아낸 얼굴들 너머에 수많은 얼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한독립만세의 행렬을 채운 수천, 수만의 얼굴들이 교과서에서 보여 주던 얼굴들만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어째서 그 때에야 알아차렸을까요? 

아저씨의 술냄새, 안주냄새가 저에게 이 문장을 떠올려주었습니다. 조야하지만 장엄한 얼굴, 자신의 일상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얼굴. 12월 3일의 밤, 제 코에 훅훅 와닿던 뜨끈하고 얼큰한 술기운으로부터 평화를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온 감각으로 새롭게 경험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리하여,

확장된 심성(enlarged mentality)이란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행위의 핵심이 각 개인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습니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외견(appearance)'이란 바로 개별적 존재들이 공적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술 취하신 그 분의 모습은 분명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다소간 불편감을 주셨지만 그리하여 국회를 봉쇄한 경찰을 훈계하던 그 분의 목소리가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그 날 밤의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저를 붙들고 있습니다. 제가 느낀 불편함과 그 분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지금 이 사회의 복잡한 여러 현실들과 겹쳐 보였거든요. 운동에도, 활동에도 취향이라는 것이 작용하고, 각자 ‘결’이 맞는 누군가를 편안해 하며, 그 ‘결’이 맞지 않음으로 인해 함께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들이 있죠. 

다만, 이 불편함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견뎌질 수 있는 것이며 또 견뎌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종종 묻게 됩니다. 불편함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인가, 불편함을 두고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들을 통해 모두가 변화되어 가는 것인가와 같은 연쇄 질문들이 따라오고요. 그 불편함에 대한 문제제기가 어떤 특정한 올바름을 기준 삼았을 때, 놓치게 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제 코를 찌르던 냄새로부터, 저의 불편함으로부터 아렌트가 말했던 ‘확장된 심성(enlarged mentality)’에 대해 생각합니다. 다소 거칠고 불완전한 평범한 얼굴들, 일상 속 너무 다른 결을 가진 개별의 존재들이 지극히 조야한 모습으로 장엄한 비전을 선언할 때, 그 모순처럼 느껴지는 복합적인 순간, 그 순간에 평화가 모두의 것일 가능성이 숨어 있는 것일테니까요. 

 

변화가 많을 3월입니다.

모두 몸, 마음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피스모모 아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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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권보드래(2019), <3월 1일의 밤: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문아영(2019),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미래>, 통일과평화(11집 2호)

김선욱. (2014). 한나 아렌트의 공화주의와 한국 정치. 사회와 철학, 28, 207-244.

임미원. (2018). 한나 아렌트의 ‘시작으로서의 자유’ 및 ‘다수성’ 개념. 법철학연구, 21(2), 21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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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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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샘의 프로필 이미지

    진샘

    1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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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답글 (1)
  • mirae2525의 프로필 이미지

    mirae2525

    0
    about 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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