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부터는 모모레터라는 이름으로 매달 한 번, 첫 주 목요일에 구독자님을 찾아뵙게 됩니다. 올 해의 모모레터는 제가 쭉 맡아서 이야기를 전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피스모모의 아영이에요.
술에 취했어도 말은 바로 하시더라고요.
지난 12월 3일, 저는 국회 앞에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와중, 제 옆에 술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중년의 남성분이 오셨는데요. 몸을 가누지 못해 저를 포함한 옆 사람들의 어깨에 계속 부딪히시더라고요. 그 분은 비틀거리면서도 마주 선 경찰들에게 양 팔을 마구 휘두르며 말했습니다.
“야! 너네 이러다가 공범된다. 너네들 지금 판단 잘해야 해! 문 열어, 임마!”
그 분은 그 말이 끝날때마다 저를 돌아보며 “안 그래요?”하고 동의를 구하셨어요. 맞는 말씀이시니 고개는 끄덕였지만, 그 분이 제 쪽으로 얼굴을 돌리실 때마다 겨울바람에 섞여 비릿해진 안주냄새가 푹푹 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 코와 입을 가리게 되더라고요. 아, 정말 아저씨 옆에 있기 싫다는 마음이 올라오고, 속까지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그 분과 떨어진 곳으로 옮겨갈까, 계속 서 있을까 갈등하던 와중에 어떤 문장이 떠올랐어요.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
권보드래, <3월 1일의 밤>
조야하면서 장엄한
권보드래님의 책 <3월 1일의 밤>에 담긴 문장입니다. 31운동에 대해 저자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일본군에 조사를 받게 되자, 아이고 나는 독립의 뜻을 모르고 그냥 따라 외쳤다, 독립만세를 안 외치면 집에 불지른다고 누가 협박해서 외쳤다, 시위에 가긴 갔지만 화장실 가느라 일찍 빠져나왔다고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기록들을 소개합니다. 조야하기 짝이 없죠.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들은, 자기 손가락을 베어 피로 독립만세 깃발을 만들고, 등사기를 구해 독립선언문을 인쇄해 돌렸으며, 옆 사람이 총에 맞아 죽었음에도 다음날 다시 시위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년 전, <3월 1일의 밤>을 읽고 서평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요. 당시 제가 썼던 글의 일부를 여기 공유합니다.
“사람들은 만세의 뜻도 모르고 만세를 불렀거나(128쪽), 만세를 부르며 지나 가는 행렬에 왜 만세를 부르는가 물었더니 ‘웃음’만 돌아왔다는 것으로 보아 왜 만세를 하는지도 모른 채 만세를 불렀거나(129쪽), 만세를 어떻게 부르는 것인지 몰라 보통학교 학생들을 찾아가 만세 부르는 법을 배우거나 (130쪽), 다른 지역이 다 만세를 부르는데 우리 지역만 안 부를 수는 없 다는 경쟁심리(137쪽) 또는 독립이 되면 ‘빼앗긴 땅’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133쪽)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으며,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집을 불에 태운다는 협박(335쪽)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동시에 폭력을 행사하려는 군중을 설유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격을 가하려는 경찰을 설득한 유봉진(56쪽)이었으며, 스스로를 국민의 대표자로 자임하며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 던 양봉식(59쪽)이었거나, “나는 총알이 맞지 않으니 마음대로 쏴보라”며 저고리를 풀어헤친 오광옥(120쪽)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러한 3·1운동 의 얼굴들을 이렇게 불렀다. “조야하면서 장엄하고, 난폭하면서 고귀하 고, 무지하면서 드높은, 이들은 누구인가?(7쪽)”
문아영,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미래>
한국의 공교육 속에 성장한 저에게 3.1운동은 교과서에 담긴 독립운동가들의 얼굴로 기억되는 역사였어요. 적어도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부끄럽게도 교과서가 담아낸 얼굴들 너머에 수많은 얼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한독립만세의 행렬을 채운 수천, 수만의 얼굴들이 교과서에서 보여 주던 얼굴들만이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어째서 그 때에야 알아차렸을까요?
아저씨의 술냄새, 안주냄새가 저에게 이 문장을 떠올려주었습니다. 조야하지만 장엄한 얼굴, 자신의 일상에서 평화를 만들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얼굴. 12월 3일의 밤, 제 코에 훅훅 와닿던 뜨끈하고 얼큰한 술기운으로부터 평화를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간다는 의미를 온 감각으로 새롭게 경험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그리하여,
확장된 심성(enlarged mentality)이란
한나 아렌트는 정치적 행위의 핵심이 각 개인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습니니다.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외견(appearance)'이란 바로 개별적 존재들이 공적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술 취하신 그 분의 모습은 분명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다소간 불편감을 주셨지만 그리하여 국회를 봉쇄한 경찰을 훈계하던 그 분의 목소리가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그 날 밤의 기억은 지금도 여전히 저를 붙들고 있습니다. 제가 느낀 불편함과 그 분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지금 이 사회의 복잡한 여러 현실들과 겹쳐 보였거든요. 운동에도, 활동에도 취향이라는 것이 작용하고, 각자 ‘결’이 맞는 누군가를 편안해 하며, 그 ‘결’이 맞지 않음으로 인해 함께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경험들이 있죠.
다만, 이 불편함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견뎌질 수 있는 것이며 또 견뎌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종종 묻게 됩니다. 불편함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인가, 불편함을 두고 그것이 초래하는 변화들을 통해 모두가 변화되어 가는 것인가와 같은 연쇄 질문들이 따라오고요. 그 불편함에 대한 문제제기가 어떤 특정한 올바름을 기준 삼았을 때, 놓치게 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제 코를 찌르던 냄새로부터, 저의 불편함으로부터 아렌트가 말했던 ‘확장된 심성(enlarged mentality)’에 대해 생각합니다. 다소 거칠고 불완전한 평범한 얼굴들, 일상 속 너무 다른 결을 가진 개별의 존재들이 지극히 조야한 모습으로 장엄한 비전을 선언할 때, 그 모순처럼 느껴지는 복합적인 순간, 그 순간에 평화가 모두의 것일 가능성이 숨어 있는 것일테니까요.
변화가 많을 3월입니다.
모두 몸, 마음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피스모모 아영 드림
참고자료
권보드래(2019), <3월 1일의 밤:폭력의 세기에 꾸는 평화의 꿈>, 돌베개
문아영(2019), <오래된, 그러나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미래>, 통일과평화(11집 2호)
김선욱. (2014). 한나 아렌트의 공화주의와 한국 정치. 사회와 철학, 28, 207-244.
임미원. (2018). 한나 아렌트의 ‘시작으로서의 자유’ 및 ‘다수성’ 개념. 법철학연구, 21(2), 21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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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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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e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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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민호쌤, 아영입니다. 이렇게 사려깊고 다정한 답장을 받게 되어 기쁘고 고맙습니다. 마음을 넓히는 일이 참 쉽지 않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마음이 억지로? 넓어지는 그 과정에서 마음이 아프고 뻐근해지잖아요. 참 힘이 많이 들고요. 민호쌤의 마음이 제게도 전달되어 오는 듯 해요. 민호쌤 덕분에 몰랐던 노래를 알게 되었어요. 저녁에 louder than words를 검색해서 몇 번 반복해 들었거든요.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았는데, 정말 좋네요. We bitch and we fight Diss each other on sight But this thing we do These times together Rain or shine or stormy weather This thing we do With world-weary grace We've taken our places We could curse it or nurse it and give it a name It's louder than words This thing that we do Louder than words The way it unfurls It's louder than words The sum of our parts The beat of our hearts Is louder than words Louder than words The strings bend and slide As the hours glide by An old pair of shoes, your favorite blues Gonna tap out the rhythm Let's go with the flow, wherever it goes We're more than alive It's louder than words This thing that we do Louder than words The way it unfurls It's louder than words The sum of our parts The beat of our hearts Is louder than words Louder than words 함께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라고 느껴요. 참 쉽지 않죠. 😢 이 노래는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부침을 겪는 모두에게 위로이자,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가사처럼 때론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그 어떤 말보다 더 깊게 전달되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새 봄과 함께 상처받은 마음들에 연한 새 살이 돋아나기를 바라요. 소중한 민호쌤께 깊이 다정한 마음을 전합니다. 늘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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