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딜 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지난 3월 24일 저녁,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의 한 사거리에서 폭 20m, 깊이 20m의 대형 싱크홀이 발생했습니다. 싱크홀 발생 당시 그 위를 지나던 한 차량은 튕기듯 밀려나갔고, 뒤를 따르던 오토바이는 순식간에 싱크홀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간발의 차로 싱크홀을 피한 다른 차량의 블랙박스에는 그 아찔한 순간이 모두 담겼습니다.
그 날 저녁 내내, 오토바이 운전자 분의 생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이후 들려오는 뉴스들은 낙관을 어렵게 했어요. 다음 날 오후,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속보를 보게 되었습니다. 낮에는 자기 사업을 하고 저녁엔 배달업을 하며 정말 열심히 살아온 서른 네 살 그의 죽음이 너무 아픕니다. 생면부지의 저에게도 이리 아픈데, 그를 목숨처럼 사랑하던 이들의 애통함은 어찌할까요.
디딜 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기대를 저버린 현실은 재난이 되었습니다. 유족분들은 예방할 수 있었다고, 서울시의 무책임한 행정으로 귀한 사람을 잃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고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지진 때문이 아니었고, 2년 전, 2주 전, 분명한 조기경보가 있었음에도 서울시의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는 2년 전 용역보고서를 통해 명일동 사고 지점 인근이 지반 연약 및 침하량이 큰 '요주의 지역'으로 분류된 것을 알고 있었고, 공사 시에 특별 안전조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기점검은 실시되지 않았고, 9호선 지하철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사고 2주 전 싱크홀 바로 옆 주유소에서 지반 균열을 두 차례나 신고했음에도 현장 점검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무너지지 않아도 되었던 일상을 무너뜨린 것은 평온을 가장한 방임이었던 것이지요. 디딜 땅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무너뜨린 것은 서울시가 맞습니다.
이 싱크홀 사고를 마음에 담고 보낸 두 주간, 저는 지금 이 지구가 거대한 싱크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끝날 기미 없이 거센 산불을 마주하며 속이 타던 와중, 3월 28일에는 미얀마와 태국 메솟에 계시는 활동가분들과 온라인 회의를 하다 실시간으로 지진이 발생하는 상황을 목격하기도 했거든요.
디딜 땅이 사라진 세계
디디고 선 땅이 꺼지고, 불타고, 흔들리고, 그 땅을 기반 삼아 세워진 것들이 무너지는 날들. 자연재난으로 무너지고 있는 세계의 한 편에는, 인간들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무너지는 세계가 있고, 상호호혜에 기반한 협력관계들은 관세에 의해 무너지며, 동맹이라고 믿었던 세계도 무너지고,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계약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세계들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헌법재판소가 선고기일을 공지했는지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하던 3월 내내, 저는 제가 기대했던 한국 사회의 토대가 어쩌면 전혀 그 기대와 다른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요. 모두가 설마하면서도 숨길 수 없는 불안에 시달렸으니까요. (아, 모두는 아닐 수 있습니다. 윤석열이 복귀하지 못할까봐 걱정하시는 분들도 이 사회에 꽤 계십니다.)
헌법재판소의 침묵 앞에서, 헌법이란 무엇이며, 사회계약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만들어진 민주주의가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곳이 “지금,여기”라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웠어요. 약속이라고 믿었던 것이 약속이 아닌 것같은 세계에서 그럼 무엇을 디디고 서서 이 사회를 가꾸어갈 수 있는 것일까요? 이런 제게 피스모모의 동료 대훈은 헌법에 구멍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덮어둔 시간들이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헌법은, 드워킨의 말을 빌리자면, 합리적이고 건전한 의지를 지닌 개인들이 정치적 공동체 내에서 윤리적 및 도덕적 신념에 대해 의견이 다를 경우, 이들이 어떻게 강제력 있는 국가 속에서 상호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난 12월 3일로부터 하루, 하루 지날수록 민주주의에 기반한 사회계약으로서의 헌법에 대한 제 기대가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미국의 성문 헌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정치 기술자들의 탁월한 작품인 미국 헌법은 안정과 번영의 근간이 되었다. 그리고 2세기가 넘게 영향력이 막강한 야심찬 대통령들의 힘을 성공적으로 견제했다. 하지만 이러한 헌법에 내재된 결함이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미국에서 정치적 소수는 민주주의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헌법 덕분에 다수를 계속해서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때로 다수를 ‘지배’할수도 있다. 소수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는 소수의 지배를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도구가 극단주의자나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소수의 손에 들어갈 때, ‘특히’ 위험하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Tyranny of the Minority),
스티븐 레비츠키 & 대니얼 지블랫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헌법적 강경 태도(constitutional hardball)를 통해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경고합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헌법을 따르지만 그 정신을 교묘하게 훼손시키는 방식,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방식으로요. 헌법과 법률이 아무리 잘 설계되었다고 해도 모호성과 애매성, 잠재적 허점은 존재하고,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이를 왜곡하고 제정 목적에 반하는 법 집행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헌법적 강경 태도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독재를 이룩한 생생한 사례로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을 꼽을 수 있습니다. 2010년 총리가 된 그는 모든 합법적 수단으로 독재를 실현했거든요. 이 과정을 지켜본 헝가리의 한 헌법재판소 판사는 오르반이 ‘합헌의 허울을 쓰고 헌법적 방안을 동원하여 … 위헌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내일입니다.
4월 1일, 마침내 헌법재판소가 선고기일을 공지했습니다. 기다렸던 소식이지만 만우절임을 고려하여 혹시 가짜뉴스인가 멈칫했음을 고백합니다. 계엄도 가짜뉴스처럼, 선고기일도 가짜뉴스처럼 느껴지는 이 초현실적인 현실에 멀미가 날 것 같은 날들, 이제 내일 이 시간이면 선고 결과를 알게 되겠지요. 낙관하면서도 마음의 심연 어딘가에 두려움이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날들 속에 중얼중얼 저도 모르게 자꾸 읖조리는 시구절이 있었어요. 4월의 모모레터는 이 시로 마무리해볼게요.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문태준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새순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추웠던 겨울, 미세먼지로 가득한 봄의 초입에서 저마다의 거리와 저마다의 광장을 채웠던 수많은 작고 여린 새순 같은 사람들 덕분에 무너지는 세상을 기워내고, 떠받치며 살아볼 수 있어 참 고맙고 다행입니다.
일흔일곱번째 4월 3일에
피스모모 아영 드림
참고자료
로널드 드워킨 저, 박경신 역(2015), <정의론>, 민음사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저, 박세연 번역(2024),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어크로스
[월간정세변화] 헝가리, 오르반 총리를 중심으로 대내외 혼란 가중
박정원(2024), <헝가리 오르반정부의 ‘적대의 정치’에 관한 연구>
이호선(2018), <헌정질서 상의 정의와 사회계약론>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r72yzr2dvno
https://www.mk.co.kr/news/realestate/11276844
문태준(2004), <맨발>,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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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ntijeju
몸과 마음으로 읽게 되는 글이었어요. 읽는 내내 연결되고, 돌아보는 순간들을 느낄 수 있어 참 고마웠습니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봄의 초입에서 저마다의 거리와 저마다의 광장을 채웠던 수많은 작고 여린 새순 같은 사람들 덕분에 무너지는 세상을 기워내고, 떠받치며 살아볼 수 있어 참 고맙고 다행입니다" 라는 표현에서 '수많은 작고 여린 새순같은 연결, 행동,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한 생명이 사라지는 안타까움을 가슴으로 연결하는 순간들... 그것이 목격하고 기억하는 의미일것이라 생각합니다. 4.3 사건으로 희생된 한 생명, 한 생명... 코로나 시기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대구의 고등학생... 그 삶 하나 하나는 불러 기억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 우리 사회 공동체에 어떻게 '디딜 땅'을 만들것인지를 고민하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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