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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 북리뷰

[북리뷰] 인간 속의 동물, 동물 속의 인간

《인간은 동물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2026.01.14 | 조회 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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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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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철학을 당신에게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오래된 정의인 ‘합리적 동물’ (내지는, 더 오래된 정의인 ‘날개 없는 두발 동물’) 따위를 생각하곤 합니다. 그 구체적 형태가 어떻게 되었건, 일차적으로 우리는 동물을 유개념(genus)으로 갖는 종개념(species)으로서 인간 개념을 떠올려 왔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 이해에 맞서, 동물의 개념이란 인간의 자기 이해에 대한 일종의 투사(projection)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인간은 동물이다》의 저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바로 그 철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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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은 우리 지면에서 여러번 소개한 적 있는 독일의 선도적 철학자입니다. 셸링을 전공한 전형적인 ‘대륙철학’ 전통에 속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유럽과 영미권의 철학 전통을 넘나들며 여러 논쟁적인 입장들을 방어하고 있는 오늘날의 스타 철학자입니다.

새로 번역된 그의 근간 《인간은 동물이다》에서, 그는 단지 동물 개념이 인간의 자기 투사라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전도된 이해로부터 우리의 윤리적 삶에 대한 시사점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무지의 윤리학’이랄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최종적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하는 무지의 윤리학이란 무엇이며, 어떤 이유에서 그는 우리가 무지의 윤리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2026년 첫번째 북리뷰에서는 《인간은 동물이다》가 펼치는 핵심 주장과 이를 위한 논증을 세심히 살핍니다.

책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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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동물이다》는 크게 세 장(chapters)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1장, 〈우리, 그리고 다른 동물들〉에서는 그의 전체 논증이 바탕하는 주장인 ‘동물 개념은 인간의 자기 투사이다’에 관해 논합니다. 이어 제2장, 〈삶과 영혼의 의미〉에서는 그의 실천적 입장인 ‘자유주의적 다원주의’가 설명됩니다. 끝으로, 제3장 〈무지의 윤리학을 향하여〉에서는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결정적 관점인 ‘무지의 윤리학’이 소개됩니다.

각각의 장은 철학의 핵심적 주제인 언어철학,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을 미묘한 방식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제1장에서는 인간과 동물 개념에 대한 고찰로부터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이끌어낸다면, 제2장에서는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가 어떤 실천적 관점을 시사하는지 다루고, 제3장에서는 이 실천적 관점이 (제1장이 시사하는) 어떤 인식론적 문제와 연관되는지를 보론하고 있는 식입니다.

이는 국내에 소개된 앞선 저작들인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나 《나는 뇌가 아니다》에서 가브리엘이 보여준 면모를 계승합니다. 이들에서 이미 가브리엘은 언어철학과 형이상학, 인식론의 문제들이 어떤 윤리적 입장을 요구하는지 보인 바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이다》의 구성은 이와 꼭 닮아 있습니다. 철학의 궁극적 목표란 결국 실천적 지침을 주는 데에 있다는 정신을 꾸준히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는 말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상과 자연상의 재정립이며, 그 재정립이야말로 이 책의 과제다.

14면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동물로 간주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15면

가브리엘은 ‘인간상과 자연상의 재정립’이라는 과감한 주제를 책의 과제로 꺼냅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그러나 동물에 속하는 종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특히, 인간은 합리적인 면모를 갖는, 동물 중에서도 으뜸인 종으로 생각되곤 합니다. 이때 우리가 실제로 어떤 분류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 가브리엘이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전통적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중적 이해를 요구합니다. 이를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연 현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는 우리가 의식과 정신을 지닌 덕분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과연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삼인칭 관점, 곧 외부에서 우리를 보는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예컨대 당신과 나)도 있다. 우리는 인간 게놈을 비롯한 생화학적 구조만 공유한 것이 아니라, 주체라는 점도, 바꿔 말해 그때그때 우리 각자의 일인칭 관점(주관성)을 채택한다는 점도 공유한다.

22-23면

요는 이렇습니다. 한편으로, 인간은 과학에 의해 탐구될 수 있는 자연 속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자연 속의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관성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 밖의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발견에 대해,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은 과감한 주장을 내놓습니다.

인간은 대표적인 동물이다. 동물임에 관한 우리의 앎은 우리의 자기 탐구에서 나온다.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동물들》에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동물이 어떤 관계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동물들》에 대한 숙고는 항상 또한 우리에 대한 숙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동물로 파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임의 원형(Protyp)이다. 나는 이렇게 주장하고자 하는데, 동물 개념은 《동물들》에 관해서보다 인간에 관해서 더 많은 말을 해준다. 수천 년 전부터 우리는 그릇된 방식으로 우리와 동물들을 구별해 왔다.

26면

말인즉, 우리는 우리의 주관성 밖에 놓인 우리의 특성들을 동물적 특성들로 고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동물의 원형이고, 따라서 동물의 개념은 인간의 비주관적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것이 가브리엘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여기까지의 주장에서 멈춘다면, 가브리엘의 논증은 단지 형이상학적 주장에 멈출 것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동물》에 불과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우리의 개인적, 사회정치적 생존 계획으로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삶은 생존 그 이상이다.

27면

여기에서 이미 가브리엘은, 그가 본론에서 논할 주제인, 인간학적 윤리학의 스케치를 그립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동물 외적’ 본질을 삶의 의미에 두고, 인간이 동물과 구별하여 스스로를 규정하는 바에 바탕해 인간학적 윤리학을 세우자고 주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간학적 윤리학은 어떤 형태를 갖게 될까요? 가브리엘은 바로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 속의 의미는 각자에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기반을 둔, 우리 모두가 공유한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28면

그는 그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라는 이념을 여기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다른 가치에 따라 살아가지만, 동시에 동등한 이유에 바탕한 가치를 삶의 질서로 두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의 핵심 아이디어입니다.

한편, 그는 그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인식론적 문제에 바탕해 정당화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안다. 우리는 복잡성, 불확실성, 무지를 감당해야 하며, 이는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의 한 면모다. 그 감당을 위해서는 무지의 윤리학이 필요하다.

30면

왜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택해야 하는지를, 그는 일종의 오류가능론적(falliabilist) 관점에 바탕해 변증합니다. 우리는 실재의 전면모를 포착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각자의 가치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다른 가치가 옳았을 여지를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브리엘은 《인간은 동물이다》에서 다음을 주장하고자 시도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동물임에 대한 자기 탐구를 통해 우리 안팎의 자연이 낯설기 그지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더없이 낯선 자연을 지배할 수 없으며 또한 지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자연을 완전히 해독하여 우리의 통제 아래 둘 수 없다.

30면

우리, 그리고 다른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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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야기했듯,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을 동물의 일종으로 규정해 왔습니다. 그러나 가브리엘이 말하듯,

[…] 유념해야 할 것은, 잘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인간의 정의가, 바꿔 말해 가장 오래된 인간학이 이미 인간을 생물 혹은 동물로, 존(zôon) 혹은 아니말(animal)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 진화론의 지식과 진화론의 뒤를 이어 급격히 발전하며 분화하는 생명과학들[…]의 지식보다 훨씬 더 앞선 시기에 벌써 인간은 생물 혹은 동물로 간주되었다.

36면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동물이 무엇인지를 자연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이전에 이미 인간을 동물의 일정으로 규정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출발합니다. 그의 발견에 따르면, 우리의 인간 이해가 자연과학의 발전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은 우리의 동물 이해가 인간 이해에 바탕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동물의 의미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가브리엘은 개별적인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사실이 그가 어떤 식으로 실제 실현되는지와 무관하다는 점을 통해 뒷받침하고자 시도합니다:

[…] 인간은 동물로서 출생한 다음에, 혹은 자궁 안에서 동물로 발달한 다음에 사회적 훈련을 통해 문화적이며 정신적인 꼴을 갖춘 인간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아무튼 생물이기만 하다면 […] 이미 온전한 의미에서 인간이다.

45면

우리는 이성적 동물, 인간을 낳는 동물 따위로 인간을 이해하곤 하지만, 실제로는 이성적이지 않거나 인간에 대한 생식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어떤 개체를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이는 어떤 개별자가 인간으로 분류되는 것이 인간의 정의와 무관하며, 따라서 인간의 정의는 인간을 앞서 규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에 의해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일까요?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동물인 것이 아니라 자기 정의를 통해 동물이 된다. 〈우리는 누구 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틀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 부분인 동물성을 뗴어낸다.

46면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 짓는 인간학적 차이는 그 자체로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에 의해 설정된 것이다. 반면에 그런 차이를 설정하는 능력, 곧 자화상을 그리는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51면

즉, 인간은 자기 이해를 먼저 갖고 있고, 이에 바탕해 인간과 동물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가브리엘은 그의 투사 논제(내지는 투사 주장)를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끌어냅니다:

투사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화상을 그리는데, 그 자화상에서 동물임은 결핍이다. 왜냐하면 동물임은 인간의 특별함을 통해 보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품는 견해에 따르면, 다른 동물들은 그 특별함이 결여된 인간, 그러니까 결함 있는 존재다. 하지만 이로써 사람들은 다른 생물들의 특수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인간의 보금자리, 곧 우리의 환경을 자연 그 자체와 동일시하게 된다.

81면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말하자면 인간 우선적(human-first) 관점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개념이 동물 개념을 통해 분석된다기보다, 동물의 개념이 제약된 인간 개념으로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물은 어떤 부분이 제약된 인간인 것일까요? 가브리엘은 그 제약된 부분을 도덕적 성향에서 찾습니다. 도덕 규칙을 조직화하여 삶의 지침으로 삼는 인간과 달리, 여타 동물들은 그러한 조직화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가브리엘이 보기에, 인간의 동물 외적 본질이란 다름 아닌 도덕적 규범을 조직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다만 이 지점에서 가브리엘은 일종의 자가당착, 내지는 오류를 저지르는 듯 보입니다. 결국 그는, 인간을 ‘도덕적 동물’이라는 새로운 규범 안에 가두게 되는 귀결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은 그의 새로운 규정으로부터 나름의 실천적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이란,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자연적 사실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기초해, 그는 제3장에서 다시 논할 그의 도덕적 실재론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합니다:

새로운 도덕적 실재론의 핵심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의 기반인 가치 경험은 환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식 형태이며, 그 인식 형태 덕분에 우리는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규범적 지침들에 접근할 수 있다는 통찰이다.

157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인간의 도덕성은 자연의 일부이며, 그것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도덕성을 실재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의 언급에서도 드러납니다:

가치들은 엄연히 실재의 일부이며, 환원 불가능한, 곧 가치중립적인 층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의미장들을 이룬다.

160면

우리는 이 논점을, 마지막 장에서 다시 살필 것입니다.

삶과 영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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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도덕성이 자연의 일부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논하는 것이 제2장의 주제입니다:

[…] 이하에서 나는, 삶의 의미는 좋은 삶이며, 좋은 삶이란 우리가 인간적이며 도덕적인 진보를 함께 일궈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펼칠 것이다. 우리의 덧없는 삶의 목표이자 의미는 사회적 자유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여 모든 인간 각각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의 근본이념이다.

193면

즉, 그는 우리가 ‘사회적 자유’라는 것에 바탕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좋은 삶의 형태일 것임을 주장하고자 합니다.

이때 ‘사회적 자유’란, 여러 인격체들에 의해 규제되는 형식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회적 자유에 바탕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까요? 가브리엘은 다음의 변등을 시도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항상 사회적 자유다. 사회에서 물러나 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일 자유조차도 사회적으로 규제된다. 왜냐하면 예컨대 산속 동굴 안의 은둔자를 방해하거나 기꺼이 홀로 사는 사람을 강제로 결혼시키는 부적절한 행동을 타인들이 하지 말아야만 그 자유를 행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195면

사실, 여기에서 다시 가브리엘은 일종의 비약을 저지릅니다. 여기에서의 주장은 사실상 ‘인간의 자유가 사회적 자유이므로 인간은 사회적 자유를 추구하는 식으로 자유를 규정해야 한다’ 따위의 주장과 같아집니다. 그러나 이는 윤리학에서 ‘자연주의적 오류’라고 일컬어지곤 하는 대표적인 오류추리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는 자연적 사실이 어떠한지와 별개의 실천적 사실에 의해 규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가브리엘은 그의 논점을 밀고 나갑니다.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이념을 주장합니다:

사회적 자유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삶의 구상을 허용하고 더 나아가 지원하는 것이다. 타인들이 삶의 의미를 실현할 능력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누구나 고유한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200면

여기에서의 기술은 그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앞선 인용에서보다 더 잘 드러냅니다. 여러 인격체들이 자신의 삶의 형태를 추구하며 살아가도록 허용하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한편, 이때의 ‘삶의 형태’란 중의적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삶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의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삶의 형태를 마음에 품기도 합니다. 이를 가브리엘은 각각 다음과 같이 개념화합니다:

생명과학이 성공적으로 또 흔히 인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연구하는 유기적 삶을 나는 생존꼴(Überlebensform)이라고 부른다. 예컨대 의학은 유기적 시스템들[…]의 생존꼴을 연구한다. 의학이 이뤄 내고자 하는 바는 유기적 과정들을 일으키기, 촉진하기, 혹은 […] 사멸시키기다.

221면

[…] 교향곡을 듣는 미적 경험, 단테의 『신곡』 읽기, 클럽에서 즐기는 광란의 저녁, 독일 연방 의원 선거, 정치가 인간으로 인한 기후 변화에 굼뜨게 대응하는 것에 항의하는 활동을 포함[하는] 모든 것을 생존과 (따라서 우리의 생존꼴과) 구별하여 우리의 삶꼴(Lebensform)이라고 부르자.

222면

둘 중 가브리엘이 존중하고자 하는 것은 ‘삶꼴’에 해당합니다. 즉, 가브리엘은 우리의 삶꼴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의 이념에 따라 발휘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란 모두 다르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규범도 공유하지 못하는 파편화된 사회를 귀결짓는 것은 아닐까요? 이에 대해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유주의의 결정적인 통찰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는 깨달음이다. […] 그러나 저 자유주의적 통찰로부터, 삶 속의 의미를 경험하는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237면

우리가 사랑할 때, 그리고 사랑 덕분에, 경험하는 바가 삶 속의 의미라는 것이 울프의 근본 주장이며, 우리는 그 주장에 동의해야 마땅하다.

240-241면

즉, 우리는 ‘사랑’이라는 가치에 따라 삶꼴을 꾸리며, 이를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채택한답시고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

243면

삶의 의미는 우리가 함께 행복할 자격을 갖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행복에 도달하는 것에 있다.

282면

결론짓자면, 가브리엘에 따를 때, 우리는 사랑에 바탕한 각자의 삶의 의미를 존중하는 형태의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관점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에 답하기 위해 가브리엘은 말을 이어갑니다.

무지의 윤리학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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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서는 무지를 다룬다. 무지를 아는 것도 앎의 일종이다. 우리가 많은 것을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안다.

321면

가브리엘이 그의 실천론을 정당화하는 바탕에는, 제1장에서 시사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인 한편, 우리는 자연에 대해 전부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지의 가능성에 바탕한 관용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 가브리엘이 취하고자 하는 최종적 변증입니다.

먼저 그는,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주장과 무언가가 참이라는 주장이 철회 내지는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가브리엘이 말합니다:

앎 주장과 진실 주장의 수정 가능성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많은 것을 최종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은 물론 사실이지만, 또한 우리는 다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를 남김없이 모조리 알지는 못한다는 점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앎을 획득하는 과정은 영영 종결되지 않으며, 최종적이며 총괄적인 실재 인식은 있을 수 없다.

324면

사실,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옳은 결론을 잘못된 방식으로 변증하고 있습니다. 참인 명제의 수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명제의 수를 초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결론에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앎 주장과 진실 주장이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바탕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주장이 철회 내지는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단지 우리가 어떠한 사실에 대해 잘못 알거나 잘 알고 있더라도 이에 대한 믿음을 철회할 수 있다는 사실만을 함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의 결론 자체는 받아들임 직합니다.

사실, 그의 결론은 전통적으로 ‘진리-지식 간극(truth-knowledge gap)’이라고 일컬어져 온 간극의 존재를 존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실재에 대해 오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이 사실만으로 진리와 지식 사이의 간극이 정당화됩니다. 가브리엘은 사실상 단순한 결론을 위해 긴 길을 돌아오고 있는 셈입니다. 여하간, 그의 결론 자체는 받아들일 수 있는 논제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의 결론으로부터 어떤 실천적 논제가 정당화되는지 봅시다:

무지의 윤리학의 출발점은, 우리 자신이 많은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식의 진보 덕분에 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329면

무지의 윤리학은 《우리 안팎의》 자연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낯설고 앞으로도 낯설 것임을 인정한다. 왜 낯서냐 하면, 우리가 기껏해야 추측만 할 수 있는 것이 무한정 많기 때문이다. 우리의 앎과 무지의 범위를 명확히 특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는 바와 모르는 바의 경계선을 선험적으로, 곧 순전히 개념적으로 그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연에 관해 추측하게 된다.

330면

그런데 우리가 기껏해야 추측만 할 수 있는 사항들은 엄청난 귀결을 가지며, 그렇기 때문에 무지의 윤리학은 한낱 인식적 절제를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다름을 깊이 존중할 것을 권고한다. 우리가 동물로서 의존하지만 영영 통제하고 길들이지 못할 자연의 다름을 존중할 것을 말이다.

330면

즉, 그에 따르면 우리의 진리-지식 간극은 우리로 하여금 지식에 바탕한 자연의 통제를 수행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지식에만 바탕해 자연을 통제하는 것은, 길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한 길들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기에서 ‘자연’을 통해 의도했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두번째 자연, 내지는 도덕성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의 생태주의적 예시를 들어 자신의 논제를 옹호하고자 시도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보자. 다른 생물을 괴롭히고 영양 섭취를 위해 죽이는 것은 도덕적으로 배척해야 한다는 견해를 품고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만약에 식물도 의식을 지녔고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이 밝혀진다면, 심각한 난관에 봉착할 터이다. […] 이 경우라면, 고통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 채식을 고수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될 터이다[…].

330-331면

이는 그의 의도와는 다소 멀어지는 예시이지만, 그의 논점을 파악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말인즉, 우리가 도덕적 직관에 바탕해 어떠한 행위를 수행할 때, 그러한 수행은 실재와의 간극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논의를 마무리했어도 충분했을 것이지만, 가브리엘은 그의 변증을 여하간 이어갑니다. 그가 말합니다:

우리의 기관들과 장치들이 그때그때 파악하는 바는 원리적으로 실재 전체가 절대로 아니다. 그것들이 파악하는 바는 이를테면 자연 전체나 우리 삶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제한적이며 열려 있는 전체들이며, 그 전체들은 계속 바뀐다. 왜냐하면 내가 감각으로 지각하는 자연적 실재 안에서 모든 것은 변화하고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340면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원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파악하고자 하는 실재는 계속 흐르며,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전체로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요입니다.

다시, 이것만으로 그의 변증은 멈추어도 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논의를 이어갑니다. 그는 제1장에서 논한, 인간의 동물적 요소와 비동물적 요소의 괴리가 실재의 변화무쌍함을 시사하는 양 말합니다:

자연과 정신의 본질적 차이는, 자연은 우리에 의해 인식되는지 어떤지에 무관심하다는 점에 있다. 자연은 그냥 있는 그대로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348-349면

그런데 우리의 자연 지각도 자연의 그-자체임에 속한다. 왜냐하면 우리 유기체의 자연적 조건들이 전제로 갖춰져 있지 않다면, 우리의 자연 지각은 일어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지각은 전혀 《순전히 주관적이지》 않다.

350면

자연과 달리 정신은 본질적으로 정신 자신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무언가다.

350면

여기에서 가브리엘은, 자연은 우리의 인식과 독립적이며, 정신만이 우리의 인식에 관련된다는 이원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원론은, 정신의 확실성을 정신에 대한 참된 인식으로 생각하는, 소박한 형태의 이원론과는 구별됩니다. 이를 그는 다음과 같은 ‘얽힘’의 구조로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정신 자신에게 정신이 열려 있는 책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자연과 뗄 수 없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정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자연의 얽힘도 있다. 바꿔 말해 정신의 자연과 자연의 정신도 있다.

352면

자연의 그-자체임과 정신의 자기를-마주함의 구별은 무지의 윤리학을 위한 기반, 바꿔 말해 인식적 겸손을 위한 기반, 곧 우리의 앎 주장의 한계와 수정 가능성을 인정하는 태도를 위한 기반이다.

354면

여기에서 주장되는 얽힘의 구조는, ‘다른 마음들(other minds)’에 대한 열린 태도를 요청하기 위해 제시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마음들, 나아가 나의 마음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류 가능하며, 따라서 자연 밖의 인간성인 도덕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가브리엘의 의도로 파악한다면, 그의 장황한 서술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자연 밖의 인간성인 도덕성에 대해서마저도 우리는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근거로, 그는 우리가 자연과 얽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정신에 대해서도 오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임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는 다음의 논제에서도 드러납니다:

근본적 타자성이란, 우리 각자 안의 타자와 밖의 타자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차원들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에 타인들과 타자가 우리에게 열린 책이고 완전히 인식 가능하다면, 그들은 정말로 다르지 않고 예측 가능할 터이다.

372-373면

즉, 우리는 다른 마음들에 대해, 그것이 정신일지라도, 자연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종의 겸손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가브리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란 자신의 양심은 오류를 범할 수 없는 목소리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으면서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로 하는 것이다. 관건은 타인들이 옳을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써 실재를 여러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392면

여기에서의 기술은 그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대한 변증을 강력하게 수행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도덕성이 옳을 여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여러 형태의 삶꼴에 대한 존중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정이 어떠했건, 그는 결과적으로 우아한 방식으로 그의 논증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을 고려할 때, 일견 가브리엘은 무제약적인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타인들에 대한 개방성은 근본적인 악이 행해지는 지점에서 한계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사회가 윤리학적 숙고를 거쳐 그 개방성의 한계를 보여 주는 규범적 모퉁잇돌들을 놓고 그것들을 통합하여 도덕적 진보를 이뤄 내는 것이 중요하다.

403면

어떤 악은 말 그대로 허용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적 삶 속에서 발견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가령, 무차별적 학살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배웠습니다.

놀랍게도, 이와 같은 깨달음의 가능성을 가브리엘의 이론은 설명합니다. 우리는 마치 자연과학적 진리를 오랜 경험을 통해 탐구한 것처럼, 오랜 역사를 통해 도덕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독특한 실재론적 다원주의가 그리는 지도는, 이와 같은 우리의 정신적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맺는말

가브리엘의 저술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폭넓은 철학 지식에 바탕해, 한편으로는 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논쟁적이고 흥미로운 주장을 변증해 내는 것이 그의 저술이 갖는 특징입니다. 다방면에 밝은 철학자들이 으레 저지르는 것처럼, 가브리엘 역시 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논리적 비약이나 정당화될 수 없는 주장을 내보이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적 행동들은 우리 시대에 어떤 식으로 철학을 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의 논증과 대화하며, 그의 주장에서 어떤 것을 취할 수 있고 어떤 것을 거부해야 할지 생각해 보는 것 역시 좋은 철학적 훈련이 될 것입니다. 새해 첫 철학책으로 일독을 권합니다!

도서 정보

《인간은 동물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저, 전대호 역.

열린 책들, 2025.

20,0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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