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개인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취향에 따라 표현할 뿐 아니라,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과 개인화된 인공지능을 통해 정보를 접하고, 정보를 더 ‘효율적으로’ 생산합니다. 수없이 많은 추천 영상을 넘기며 ‘좋아요’를 통해 알고리즘을 개선하고, 챗봇과 대화하며 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매일의 일과같아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풍경이 자랑할 만한 문명의 첨단이며, 여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운 도태와 같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각자가 추천받는 콘텐츠가 얼마나 쿨한지를 자랑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에게 나의 콘텐츠가 더 잘 도달할지, 어떻게 하면 인공지능 챗봇을 더 잘 이용할 수 있을지 연구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런 풍경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가치는 없을까요? 한병철은 오늘날의 정보 기술 발전에 과감히 반기를 듭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로써 덜 윤리적이고, 덜 기쁜 사람들이 됩니다. 나의 취향과 나의 상상을 공고히 함에 따라 관조를 통해 참된 실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점차 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 《신에 관하여》에서 한병철은 그의 주장을 시몬 베유와의 대화를 통해 정립해 나갑니다. 때로는 베유를 그대로 인용하고, 때로는 베유를 논박하기도 하며, 한병철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나아가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의 구성
《신에 관하여》는 시몬 베유의 두 주저인 《중력과 은총》과 《신을 기다리며》, 그리고 베유의 비망록에 관한 서평의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저자는 베유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지만, 단순히 베유의 글을 읽고 소개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와 대화하고, 때로는 비판하기도 하며 저자 자신의 견해를 발전시킵니다.

책은 짧은 서문에 이어지는 총 일곱 장으로 구성됩니다. 장이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아래에서도 볼 수 있을 것처럼) 내용 간에 단절이 있다기보다는 같은 주제가 여러 키워드를 경유하며 변주되는 형식을 취합니다. 굳이 장의 역할을 따진다면, 〈주의〉는 문제제기 장의 역할을, 〈무위〉는 종합 장의 역할을 하고, 사이에 놓인 다섯 장이 각자의 주제를 이끈다고 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와 같이 매끄럽게 각 장의 역할을 나눌 수 있는 조직적인 책은 아닙니다.
책이 조직화된 형태를 띄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이 한편으로 이 책을 더 생동감있게 만듭니다. 베유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며 이에 따르는 저자의 설명 및 비평을 제시하는 저술 방식은 마치 (실제로는 주제에 따라 여러 곳의 문장을 순서 없이 가져온 것이지만) 하나의 책을 함께 강독하며 베유에 관한 강의를 듣는 듯한 독서 경험을 제공합니다. 앞서 발간된 다수의 철학적 에세이에서도 드러났던 한병철 특유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책 속으로
이제 각 장으로 들어가, 한병철이 어떤 방식으로 그의 견해를 논하고 있는지 함께 보지요.
주의
오늘날 종교가 처한 위기를 단순히, 특정한 미음 내용들이 타당성을 상실한 탓으로, 우리가 더는 신을 믿지 않는 탓으로, 또는 교회가 신뢰를 상실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구조적인 이유들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그 이유들이 신의 부재를 일으킨다.
11면
한병철은 ‘종교의 위기’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날 종교가 그 힘을 크게 잃은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 원인을 단순히 우리 지식의 발전 내지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 상실로 여기는 통념에 대해, 한병철은 그것이 더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는 사회구조적 기제에 의한 것임을 지적합니다.
책에서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 중 첫번째로 제시되는 것은 바로 ‘주의(注意)’의 몰락입니다.
한 가지 이유는 주의의 몰락이다. 종교의 위기는 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보기와 듣기의 위기인 것이다. 신은 죽지 않았다. 과거에 신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냈는데, 신의 드러남을 마주할 인간이 죽었다.
11-12면
즉, 종교가 위기에 처한 데에는 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인간이 잃은 탓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그는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오늘날 주의가 처한 위기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신에 모든 것을 먹고 소비하려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게걸스러운 지각은 주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지각은 제공되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오로지 금식하는 영혼만이 바라볼 수 있다. 금식할 때 영혼은 자가포식(Autophagie)을 작동시켜 자신의 저급하고 게걸스러운 부분을 먹어 치운다. 오로지 이 같은 영혼의 자가포식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신에게로 이끈다.
13면
그렇다면 왜 그는 이를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보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 먼저 한병철은 ‘처분 가능한’ 사물들에 관해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들을 처분 가능한, 즉 우리 손에 거머쥘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한병철에 따르면 신적 경험을 위한 관조는 처분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경험에 익숙해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처분 불가능성이야말로 관조적 주의가 향하는 상대의 본질이다. 처분 불가능성이 주의를 심화한다. 관조적 주의는 사냥꾼의 빠릿빠릿함과 정반대다. 추구하거나 사냥하지 않고, 경청하고 하염없이 머무른다. […] 종교적 주의는 “추구하기”가 아니라, “달라붙기”가 아니라 “바라보기”다.
15면
반면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는 우리를 ‘처분 가능한’ 것들에 익숙해지도록 길들인다는 것이 그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자극에 절여진 채 주의 집중 능력을 잃은 사람들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디지털화는 신재의 총체적 처분 가능화를 급격히 가속한다. 디지털화는 우리를 만사가 곧바로 처분 가능하고 도달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것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 자극으로서의 정보는 주의를 산산이 조각낸다.
16면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지속하는 참된 것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 짧다. 금세 자극성을 소진하고 빛바랜다. 따라서 우리는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를 수 없다. 극도로 짧게 유지되는 정보의 현재성은 주의를 토막낸다. […] 깊은 관조적 주의는 지속하는 것을 향한다. 머무르고 존속하는 것을 향한다. 참된 것은 지속하는 것이다. 정보의 지배는 우리를 영구적인 현재성 현기증에 빠뜨림으로써 지속하는 것을 파괴한다. 관조적 주의를 기울일 능력, 바라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 참된 것에, 지속하는 질서에 접근할 수 없다.
17-18면
그렇다면 왜 주의 집중을 위해 처분 불가능한 대상의 경험이 필요한 것일까요? 한병철은 다음과 같은 미묘한 논증을 펼칩니다.
상대가 처분 불가능할수록, 상대를 향한 주의는 더 참을성 있게 된다. […] 기도로서의 깊은 주의는, 처분 가능한 대상을 향하지 않은 열망을 영양분으로 삼는다. 깊은 주의로서의 기도가 향하는 상대는 우리를 중독시키지 않는다. 우리에게 달려드는 대신에 부재를 향해, 처분 불가능성을 향해 물러난다. 신은 부재함으로써 빛난다.
18면
말하자면 이런 것일 터입니다. 우리가 참을성 있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곧바로 접근할 수 없는 대상 앞에 있을 때이며, 따라서 이를 훈련하기 위해서는 처분 불가능한 대상을 경험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곧바로 접근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한병철은 이를 자연스럽게 인정합니다.
관조적 주의는 어떤 의지도 없다는 점에서 행위하지 않는다. 즉, 무위한다.
22면
나아가, 한병철은 처분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우리의 무위를 일종의 미덕으로 소개합니다.
의지나 근육의 힘만 발휘할 줄 아는 자는 중력에 종속된다. 탈진하여 바닥에 떨어진다. 오직 은총만이 우리에게 날개를 준다. 무위가 영혼에 날개를 달아준다. 의지를 발휘하는 것만으로는 천국을 향해 날아오를 수 없다. […] 무위가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니라 애쓰지 않음이다. 무위하는 자는 신성한 것에 다가간다.
25면
정리하자면, 주의의 상실은 처분 불가능한 대상에 대한 무위의 태도에 우리가 훈련되어 있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한병철은 (이후의 주제가 될) 이것이 단순히 종교의 문제가 아닌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일찍부터 밝힙니다.
주의는 선사된다. 주의는 선물, 순수한 증정품이다. 주의는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주의는 비대칭적 면모를 띤다. 반면에 대칭으로서의 경제는 우리에게서 너그러움을 앗아간다. 타인을 향한 주의는 윤리 그 자체다.
40면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와 생산에 예속시킨다. 자본주의는 영성마저도 장악한다. […] 마음 챙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영성이다. 마음 챙김은 영성을 전적으로 생산과 성과에 종사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노동 자체가 신령하게 승화할 가능성은 배제된다. 노동 자체의 신령화라는 미래 과제가 멀리 내팽개쳐진다.
43면
대칭 강박이 어떤 점에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며 이것이 주의의 상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이후의 장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질 것입니다.
탈창조
다음 장, 〈탈창조〉는 아감벤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한병철은 아감벤의 ‘탈창조’ 개념이 베유에게서 온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탈창조의 개념이 우리의 신적 경험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논합니다.
아감벤은 에세이 〈바틀비 혹은 우연〉에서 “탈창조(Entschöpfung)”에 관한 생각을 펼치는데, 그 생각은 베유의 탈창조(Dekreation)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아감벤은 시몬 베유를 어떤 식으로도 언급하지 않지만, 그녀에게서 그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47면
탈창조는 우리를 창조된 것에서 벗어나 신적인 창조 행위에 다가가게 한다. 반대로 창조된 것에 매달리는 사람은 신적인 창조에서 멀어진다. 우리가 신을 사랑하여 피조물로서의 우리 자신을 탈창조하면, 즉 나를 포기하고 무가 되면, 우리는 신의 절대적 역량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공동창조자가 된다.
50면
여기에서 ‘탈창조’란 무언가를 생산하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다시 오늘날의 소비사회가 갖는 면모와 연관됩니다:
오늘날 진정성 강제 아래에서 우리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애쓴다. 진정성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닐 것을, 아무도 아닌 자일 것을, 자기 포기를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탈창조와 대립된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생산 논리를 따르는 창의성 명령도 우리를 눈멀게 하여 참된 창조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53면
즉, 스스로를 공들여 다듬고 다른 이들에게 뽐내는 것을 미덕으로 취급하는 소비사회의 모습이 탈창조의 이념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한병철이 종교가 처한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두 번째 요소와 연결됩니다:
종교가 처한 위기의 구조적 원인으로 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대폭 강화된 자아를 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주의는 오로지 자아 주위를 맴돈다. 우리는 충성스럽게 자아를 숭배하고 예배한다. 누구나 자기를 섬기는 사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기를 섬기는 사제란 자기를 부리는 사업가를 뜻한다. 누구나 자기를 생산하고 자기를 공연한다.
53면
그렇다면 왜 자아의 강화는 종교에 위기를 야기하는 것일까요? 한병철이 이어서 말합니다:
자아일 능력, 나라고 말할 능력은 장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커다란 장애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아는 세계를 보는 시각을 대폭 좁히기 때문이다. 신을 향한 사랑으로 나의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아무도 아닌 자,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됨으로써, 나는 신의 맑은 눈이 되고, 신은 그 눈을 통해, 나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을 왜곡되지 않은 온전한 모습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영혼에서 벗어나 물러나는 것, 영혼을 비우는 것, 그리하여 신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행운을 사물들이 겪는 것이다.
55면
즉, 자아의 강화는 ‘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도록 나의 시야를 좁혀, 결과적으로 ‘신의 관점’으로 세상을 관조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관조적 태도의 상실이라는, 첫 번째 문제와 다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아에 의한 관점과 신의 관점이라는 구분은 ‘상상된 실재’와 ‘참된 실재’라는 구분으로 다시 제시됩니다. 한병철은 이어서 말합니다:
내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 내가 상상한 실재가 아닌 참된 실재가 드러난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에 기초하여 세계의 실재성을 만들어낸다. 그 실재성은 나의 실재성이다. 우리는 그 실재성을 사물들 안에 집어넣는다. 참된 실재, 참된 질서는 오로지 나를 완전히 꺼버릴 때만 경험된다. 구속은 어떤 구속이든지 실재를 왜곡한다. 내가 물러남으로써, 나를 철회함으로써, 나를 취소함으로써, 나는 사물들에게 왜곡되지 않은 실재성을, 아름다움을 되돌려준다. 탈창조가 창조를 해방한다.
57면
여기에서 한병철은 ‘진리-지식 간극’이라고 말해지곤 하는 인식론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인식론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실제 세계의 모습과 차이 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식론의 과제는, 우리가 어떻게 실제 세계의 모습을 알 수 있는지에 관한 권리 주장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한병철은, 베유의 입을 빌려, 이와 같이 주장하는 셈입니다. 우리의 지식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실제 세계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의 관점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는지는 분명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포기한다면, 그때 우리는 ‘어떤 관점도 얻지 못한 채’ 아무런 지식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한병철이 그와 같은 절망적 결과를 희망하는 것은 아닐 터입니다. 그렇다면 한병철은 탈창조가 어떻게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더 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에 관한 충분한 설명은 제공되고 있지 않지만 말입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옵시다. 탈창조에 관한 마지막 단락들에서 한병철은 시간적 사실들의 문제에 천착합니다. 먼저 그는 이렇게 화두를 엽니다:
기획으로서의 미래, 나의 욕구와 바람에 기초한 미래는 상상력 덕분에 생겨난다. […] 미래는 나의 원초적 욕망을, 자기를 의지하기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나의 존재 가능성들을 향하여 미래를 기획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원초적 욕망은 내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막는다.
57면
즉, 한병철에 따르면 미래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에 따른 것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심스러움이 있지만, 일단 넘어가도록 합시다. 여기에서의 언급은 과거 사실에 관한 베유의 관점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니 말입니다. 한병철에 따르면, 베유는 과거 사실의 중요성을 과거의 처분 불가능성으로부터 논증합니다:
미래와 달리 과거는 의지를 벗어나 있다. 과거의 것에는 처분 불가능성이 내재한다. 의지는 과거의 것을 되찾을 수 없다. 시몬 베유는 과거의 것에서 더 높은 실재성을 보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과거의 것에 깃든 처분 불가능성 때문이다.
58면
그러나, 한병철은 과거나 미래 사실이 아닌 각각의 현재들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고 반론합니다:
베유의 견해와 달리, 기쁨의 참된 원천은 한순간 번득이는 과거가 아니라 순간 자체다. 우리가 어떤 곁눈질도 없이 온전히 순간에 거주할 때, 우리는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 찬다. 우리가 기쁨을 얻는 것은 미래 때문도 아니고 과거 때문도 아니다. 미래는 염려다. 순간은 기쁨이다. 우리가 순간에 완전히 녹아들 때, 내다보지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을 때, 우리는 영원을, 순수한 기쁨을 경험한다.
59면
이 반론이 실제로 베유에게 유효한지는 책에 인용된 구절들만 보아서는 사실 분명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베유와 한병철의 의심스러운 관점이 옳다고 할 때, 미래 사실에 비해 과거 사실이 더 큰 실재성을 갖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래를 상상하는 것보다 과거를 회고하는 것이 더 큰 기쁨을 준다는 베유의 언급은 이와 같은 관점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나 이에 관해 더 상세한 논변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병철은 빠르게 결론부로 나아갑니다. 한병철이 짧은 대화로부터 얻어내고자 하는 결론은 시간 관념 자체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 베유에게 관건은 결국 시간을 초월하기다. 나는 시간에 속박되어 있으므로, 시간을 극복하기는 결국 나를 꺼버리기를, 즉 탈창조를 전제한다. […] 나 없이 관조적으로 바라볼 때, 순간과 영원이 결합한다.
59-60면
결국 한병철에게 참된 실재란 수많은 가능성도, 세계에 대한 여러 관점들도, 세계가 지나가는 시간들도 모두 벗겨진 순수한 현실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그 현실이 곧 신의 관점에서 바라본 실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은 시적 표현으로 한병철은 정리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탈창조함으로써 없앤다. 이는 참된 창조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 우리는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비운다. 그리하여 생겨나는 빈자리는 신성한 빛으로 채워진다. 신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없애는 자는 깨끗한 유리창처럼 투명해지고, 신의 빛이 유유히 흘러 그 유리창을 통과한다.
61-62면
빈자리
한 조각글에서 시몬 베유는 빈자리의 신역학(Theodynamik)을 펼친다.
65면
이어지는 장에서 한병철은 시몬 베유의 ‘신역학’을 논합니다. 이때 ‘신역학(theodynamics)’은 ‘열역학(thermodynamics)’의 상대 표현인데, 열역학을 자연 법칙의 대표격으로 두고 이에 맞서는 원리로 신역학을 세우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고려되는 자연적 원리란 어떤 것일까요? 한병철이 이어서 말합니다.
인간 영혼은 권력의 열역학을 따른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을 쥔 사람은 공간적으로 커지는 느낌을 받는다. 자기가 확대된다고, 또는 팽창한다고 느낀다. 권력의 증가는 자아의 확장으로 표출된다.
66면
즉,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 자아를 더 비대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한병철이 베유의 입을 빌려 주장하는 인간 정신의 자연적 기제입니다.
이 기제를 거스르는 질서가 있다면, 이는 자신의 권력을 줄이고, 자신의 자리를 거두고자 하는 성향을 따를 것입니다. 이 ‘자연 초월적’ 성향이, 한병철이 신역학을 통해 소개하는 태도의 핵심입니다.
[…]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자아는, 빈 공간을 남겨두기 위해 움츠러드는 기체와 마찬가지로, 권력의 열역학에 어긋난다. 따라서 자기 포기로서의 자발적 권력 포기는 자연에 반하거나 자연을 초월한 행동이다.
67면
시몬 베유는 권력의 열역학에 빈자리의 신역학을 맞세운다. 빈자리의 신역학은 영혼의 자연적 성향을 뒤집어 영혼을 전향시킨다. 오직 이 같은 영혼의 전향만이 은총의 수용을 가능하게 한다. 빈자리는 은총이 흘러드는 통로다. 영혼이 은총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빈자리 덕분이다.
67면
그렇다면 왜 빈자리의 신역학에 한병철은 주목하는 것일까요? 이는 그가 빈자리의 이념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윤리학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칭적 경제를 규범으로 삼곤 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그 모토이지요. 어떤 행동에 대해서는 응분의 몫을 져야 하고, 어떤 행동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병철에 따르면 이와 같은 ‘대칭 강박’은 순수한 베풂과 순수한 용서를 수행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가 보기로, 진정한 윤리적 태도란 대칭 강박에서 벗어난 베풂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빈자리의 윤리는 작용과 반작용의 대칭, 행위와 보답의 대칭을 깨트린다. 또한 어떤 답례도 염두에 두지 않는 순수한 베풂을 가능케 한다. 빈자리의 윤리를 실천하는 자는 맹목적으로 베푼다. 빈자리의 윤리는 맹목성에 기반을 둔다. 그 윤리는 대칭을 책무로 삼는 경제를 깨트린다.
68면
이 윤리는 한병철이 보건대 ‘초자연적인’, 즉 신적인 것인데, 이는 자연적 질서를 거스르는 윤리적 태도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탈창조의 윤리로서의 빈자리의 윤리는 자연적인 권력 경제를 좌절시킨다. 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연민은 어떤 우월 의식도 동반하지 않을 때, 자기 포기를 기반으로 삼을 때 순수하고 초자연적이다. 그럴 때만 연민은 자비로서의 초자연적 사랑에 접근한다.
75면
빈자리의 윤리는 나아가 인식론적 측면에서도 초자연적 성격을 갖습니다. 앞서 한병철은 우리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실재의 모습과 신적 관점 하에서 바라본 실재의 모습의 간극을 지적하고, 무위로써 후자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직한 인식 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한병철에 따르면, 빈자리의 윤리에 따른, 자기포기적 용서는 바로 이 태도에 따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내가 나를, 나의 기대를 명시적으로 도외시하는 것을 전제한다. 용서하는 사람은 다름을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타인의 다름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다름을 말이다. 그 사람 자신의 다름은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상상을 떼어놓는다.
78면
결과적으로, 한병철은 빈자리의 윤리를 실재에 대한 참된 인식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으로 묘사합니다.
빈자리와 상상은 상반된 두 힘이다. 상상은 하나를 상쇄하는 다른 하나를 만들어냄으로써 대칭을 회복하려 애쓴다. 이를테면 상실을 상쇄하는 위로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상상은 외견상의 채움으로 영혼을 유혹한다. […] 빈자리는 그림(성상)이 금지된 장소다. 죄는 우리가 끊임없이 빈자리를 배반하고 환상에 불과한 그림들로 채우는 것에서 유래한다. […] 상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빈자리만이 존재의 참된 충만을 드러낸다.
81면
쉼표
여기까지 우리는 《신의 관하여》의 절반 정도를 살폈습니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한병철은 베유의 철학적 관점이 예술과 노동과 같은 삶의 영역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분량이 길어져, 이어지는 부분은 다음 북리뷰에서 다시 다루고자 합니다. 그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도서 정보
《신에 관하여》
한병철 저・전대호 역.
김영사, 2025 년.
정가 16,800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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