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수많은 철학 논문들이 발표되고 있지만, 이 모든 흐름을 쫓아가기엔 우리는 너무 바쁩니다. 지난 두 주 사이 오늘의 철학이 공부한 철학 논문들 중 소개할 만한 논문들을 정리해 보내드립니다. 에디터 김오늘이 전합니다.
이상한 것을 믿는 사람이 많은 시대라고들 합니다. 미디어가 강조하는 탓이든 실제로 수가 늘어난 탓이든 이른바 ‘ADHD 행동’이 크게 가시화된 시대이고요. 하지만 이상한 것을 믿고, 충동적으로 부주의한 행동을 하는 것이 마냥 오늘날의 유행은 아닐 것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무지에 의한 재앙을 다루고 있고, 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민중을 향해 그들이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으므로 화를 면하려면 마음을 돌이켜야 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행태에 대한 공포는 인류사를 통해 이어진 오랜 유산인 셈입니다. 오늘은 이 유산과 곁들일 만한 네 편의 연구를 전해드립니다.
미안해, 깜빡했어….
Stubborn cases (Schwind 2026, Synthese)
무언가를 해야만 했는데, 깜빡하고 하지 못한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겁니다. 그 중에는 나에게 책임이 물릴 일들도 있고요. 애인의 생일이 다가온 것을 깜빡하고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거나, 수도세 납부를 까먹었다거나, …. 이에 따라 나는 애인의 비난이나 지자체의 연체료 부과 등을 마땅히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위의 두 경우보다 다소 심각한 상황을 예로 듭니다. 차에 아이가 있던 것을 깜빡한 채로 차에서 내려 출근을 했는데, 뒷자리에 타고 있던 아이가 차량 내부 온도가 상승해 열사병으로 사망했다고 합시다. 이 경우 아이를 두고 내린 나는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까요? 진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그러나 이때 우리가 어떤 이유로 도덕적 책임을 지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뭔가를 잊을지 말지는 우리 힘으로 정할 수가 없으니, 이는 일종의 능력적 결함입니다. 또한 무언가를 해야 하는지 인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는 기억의 결함에 의해 할 수 없게 된 일을 하지 않은 것이고요.
하지만 깜빡해서 뭔가를 안한 것은 여전히 잘못 같습니다. 이를테면 애인은 나에게 ‘그러게 달력에라도 써두거나 일찍 주문을 해두거나 하지 그랬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는 우리가 원래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부대 행위들에 대해서도 의무를 갖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를 ‘고차 의무’라고 불러봅시다.
저자가 주장하는 ‘예방주의’(precautionism)는 이러한 고차 의무로 잘못의 탓을 옮깁니다. 말 그대로, 내가 애인의 생일을 깜빡한 것은 깜빡하지 않도록 미리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 의해 내 잘못이 된다는 것이죠. 음… 애인은 역시 날카로운 사람이었나봅니다.
널 사랑해! 하지만… 널 미워해?
Reanimating the divided heart (Kind 2026, Synthese)
또 연애 상황입니다. 연인이나 부부가 ‘애증’ 섞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흔한 모습 같습니다. (맞나요? 아닌가요? 음….) 그런데 애증이란 말 그대로 사랑하면서 미워한다, 내지는 좋아하면서 싫어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한 사람에게 어떤 감정과 이에 반대되는 감정을 함께 갖는 것이니, 뭔가 논리적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한편, 어떤 사람이 충분히 합리적이면서도 누군가에게 애증을 품는 건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논리적 추론에 능하고, 언제나 합리적인 판단만을 하는 철학 교수가 옆 연구실의 인기 많은 다른 교수에게 애증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된 태도를 지니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 같으니,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생각보다 간명한 해결책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대략의 요지는 이런 듯합니다. 감정이 개념적이지 않고, 개념적이지 않은 태도는 추론 과정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순된 감정은 합리적인 추론 주체에게 소유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정과 생각은 별개다’ 같은 것이죠.
사실 이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저자 또한 긴 논문으로 자신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 과정에 약간의 미묘한 부분들이 있어, 이후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부모님한테서 유튜브 압수해야해’라는 생각의 정당성?
Debunking doxastic morality with epistemic sociality (Schmidt 2026, Synthese)
주제를 자유롭게 옮겨봅시다. 애증의 대상이라면 역시 부모님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부모님 하면… ‘유튜브 알고리즘 초기화하고 싶다’, 언젠가부터 이 말을 사람들이 많이 하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이 인터넷에서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배워오곤 하다 보니, 그런 악영향을 차단하고 싶다는 취지의 불평인 것이겠지요.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가정이 숨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배워와서는 안된다’ 같은 종류의 생각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부모님에게 ‘유튜브 압수’를 할 정당성은 없을 터입니다. 즉, 잘못된 믿음을 갖는 것이 일종의 도덕적 의무 위반이라는 생각이 있는 셈입니다. 저자는 바로 이 생각에 천착합니다.
어떤 믿음을 갖는 것이 그 자체로 위반인지가 쟁점입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 위반이라는 것만으로 비합리적 믿음에 대한 비난이 설명될 수 있다면, 잘못된 믿음 자체는 도덕적 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명될 수 없다면, 도덕적 의무 위반이라는 답이 불가피하겠고요.
저자는 ‘도덕적 의무 위반이 아니다’ 편에 섭니다. 대신, 잘못된 믿음에 대한 비난을 ‘인식적 태도 자체가 사회적 성격을 갖는다’라는 관점에서 답합니다. 즉,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갖는 것이 인식 공동체에 대한 실천적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미묘하지만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나는 내 신념에 따라 행동할 의무가 있을까?
Moral uncertainty and imaginative resistance (Mahtani 2026, Philosophical Studies)
비슷한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살펴봅시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가 자신의 도덕적 신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가령 동물권 옹호론자가 공장식 축산 상품을 소비할 때 그를 비난하곤 합니다. 페미니스트가 혼전순결주의를 전파할 때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때의 비난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위와 같은 비난은 일견 ‘내 도덕적 신념이 나에게 당위를 제공한다’를 선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는 저 경찰을 죽여야만 해’라는 신념을 가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그가 저 사람을 안 죽였다면 그는 비난받아야 할까요? 이 점은 의심스럽습니다. 그 경찰을 죽일 이유가 없어 보이니까요.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서 약간의 플롯 트위스트를 줍니다. 어떤 허구가 있고, 그 허구에서 주장된 어떤 당위가 있을 때, 우리는 그 당위에 동의하며 허구 안에서의 행동들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당위 자체가 우리의 평가 대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경찰을 죽일 이유가 없다’라는, 제가 위에서 제시한 당위도 마찬가지로 평가 대상이 될 뿐 사례에서 작동하는 당위가 될 수는 없을 터입니다.
이제 문제는 제자리로 돌아간 것일까요?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합니다. 이 경우 역시 누군가의 도덕적 신념이 그에게 당위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례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즉, 위의 확신범 시나리오와 같은 상황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하건, 우리는 ‘나의 도덕적 신념이 나에게 당위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를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딜레마 논변입니다.
비합리성의 시대에 걸맞는, 비합리적 태도에 관한 네 편의 연구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마침 이달의 북리뷰도 이번 《이달의 철학》으로 소개해드린 《비합리성》인데요, 북리뷰를 통해 비합리성에 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주말 잘 마무리하시고, 평안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김오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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