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85] 🌻 게으르고 싶은 새해에 함께 듣는 플레이리스트

새해 첫 번째 목요일에 편지를 부치는 숑🌻입니다. 구독자님, 새해 복은 많이 받으셨나요? 친구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다 보면 한 해치 복을 연초에 다 받고 시작하는구나, 이 복이 과연 12개월 할부로 어떻게 분배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느 친구는 바로 그 인사를 주고받는 서로야말로 '새해 복이 되어줄 사람'이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그런 의미로 PRIIISM 레터도 올해 역시 구독자님의 복이 될 수 있게끔 꾸준히 적어보겠습니다.

이른바 '새해 버프'로 저마다의 목표에 불타는 시기이기도 하죠. 사실 저는 게으른 천성에 한껏 기댄 채 연말의 나른함을 연장하려 애쓰고 있어요. '1월 1일부터 뭔가를 시작' 같은 건 고사하고, 전기장판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운 겨울 아침처럼 의욕 넘치는 시기로 나아가기를 유예하고만 있습니다. 하지만 낡은 자동차에도 언젠가 시동이 걸리듯 기왕의 일상과 속도가 차차 돌아오겠죠.

구독자님의 새해는 어떤가요? 올해는 꼭 이루고픈 목표를 다지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지, 저와 비슷하게 지나간 연말의 공기 속에 꼼지락대고 있는지, '새해고 뭐고 알 게 뭐냐'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무쪼록 레터를 읽고 있는 어디에서든 건강하시길 바라며, 제가 요즘 패딩을 여미며 즐겨 듣는 노래들을 소개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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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공 - 알면서도

불과 지난 주까지 나의 핫 키워드는 연말결산이었다. 사실상 연말결산을 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매 계절을, 일 년을 어떻게든 채색하며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12월을 맞기 무섭게 매일의 기록이 담긴 휴대폰 사진첩이며 일기장, 캘린더를 뒤적이며 한 해의 정수(!)를 뽑아내는 작업에 골몰했다.

그리하여 2022년 '올해의 가수'로 꼽은 이가 바로 싱어송라이터 사공(Sagong)이었다. 혹시 미처 보지 못한 분을 위해 거듭 소개하자면 PRIIISM은 연말의 3주간 한국경제 매거진에 올해의 노래/앨범/가수를 기고했고, 나는 그 지면에서도 사공을 소개한 바 있다. 모름지기 '올해의 가수'니까 한 해 동안 가장 자주 들은 그의 노래인 <모래성>을 꼽았는데, 서늘하고 쓸쓸한 사공의 목소리가 돋보이는 요즘은 또 다른 노래들에 손이 간다.

그 중에서도 <알면서도>는 고요하고 깊은 겨울 밤 같은 그의 평소 스타일과 사뭇 다르다. 조곤조곤한 발라드 사이로 귀에 쏙쏙 날아드는 연주(특히 우아한 플룻)야말로 이 곡의 주인공이 아닐까 싶을 정도. 그렇다고 사공만의 담백한 보컬이 묻히지 않는다. 잔잔한 강 위에 유유히 떠 가는 나룻배처럼 개성 넘치는 연주 사이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문득 앨범 소개글을 찾아보니 '사공은 언제나 사공이다. 다만 떠 있는 강들이 달라질 뿐'이라는 문장이 눈에 띈다. 내게 '2022년의 가수'였던 만큼 그가 유영하는 강물의 각기 다른 온도가 유독 각별하게 느껴진다. (음원으로 들으며 느꼈던 '플룻의 주인공스러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온스테이지 라이브 영상도 추천하고 싶다!)

🌻 윤상 - 벽

최근 신형철 평론가의 신작을 읽다 그가 가수 윤상의 '찐 오타쿠'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평론가 본인의 표현이다). 특히 [인센서블] 앨범의 첫 세 트랙을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비창, 월광, 열정)에 빗대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아마 이와 관련해 뒤이어 덧붙인 문장의 강렬한 의지 때문이리라. '동의를 구하기 위한 설득의 말이 아니다. 나와 관련된 사실을 정확히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말은 사실상 '윤상의 그 트랙은 너무 쩔어서 베토벤에 비견할 만하다, 님들이 뭐라건 진심 반박 불가'라는 말을 평론가의 우아한 언어로 치환한 것이 아닌가. 윤상이 쓰고 부른 곡은 물론 다른 가수에게 준 모든 곡까지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그의 고백을 읽다 보니 윤상의 노래를 다시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발랄한 듯 우울하고, 도시적인 듯 촉촉한 감수성이 빛나는 그의 명곡이 무수하지만 내가 가장 꾸준히 애착을 둔 곡은 <벽>이다.

윤상이 활발히 앨범을 내던 시대에 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의 노래를 드문드문 접해왔다. <벽>은 2000년 발매한 3집에 실렸다. 세상에 나온 지 20년 이상 지난 노래에 (그것도 자주) 감응 받을 때마다 보편성의 힘을 실감하곤 한다. 고전으로 남을 콘텐츠의 조건 중에서도 이 고유한 힘이야말로 긴긴 생명력을 발휘할 테다. 익어가는 올 겨울에는 평론가가 넌지시, 그러나 강경하게 건넨 문장들에 힘입어 윤상의 다른 노래들까지 꼼꼼히 듣게 될 것 같다.

🌻 하비누아주 - 혼자만의 겨울

1월 중 소한과 대한(각각 1/6, 1/20)이 지나면 겨울이 다 간 셈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을 듣고 성격 급한 한국인인 나는 약간 조급해졌다. 아직 제철생선인 붕어빵도 충분히 사 먹지 못했고 여유롭게 설경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어그부츠 산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유례 없는 혹한이었던 12월을 겨우 치르고 연말연시를 보내주었을 뿐인데!

별안간 삿포로 여행을 떠나거나 스키장에 갈 계획은 없으니 일상에서 겨울을 만끽할 방법을 궁리해봤다. 일단 계절을 누리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제철만의 음식을 챙기는 것이다. 거창하지 않을수록 일상에 바짝 덧대어져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길거리에서 파는 따끈한 계란빵이나 가쓰오부시가 찰랑찰랑 춤추는 타코야끼, 한순간에 언 몸을 녹이는 오뎅 국물 같은 것.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어울리는 음악을 곁들이는 것이다.

'이 노래 없이 겨울을 보낼 수 없다!' 싶은 곡에 무엇이 있을까. 나는 겨울을 대표하는 목소리에서 하비누아주를 결코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2011년 데뷔하여 피아노, 기타, 베이스, 보컬로 구성된 밴드인데 하나같이 입김 나오는 계절의 심상을 가득 품고 있다. 특히 <혼자만의 겨울>을 들을 때,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려~ 내 마음도 하얗게 물들어가고' 같은 노랫말을 들으면 하얗게 눈 덮인 지붕이나 모닥불 따위를 떠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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