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72] 🌻 공연 보고 홀딱 반해버린 한국 밴드들의 노래

기다리던 시월에 편지를 쓰고 있는 숑🌻입니다. 연휴와 연휴 사이 끼어있어 더욱 달콤한 프라이데이 이브네요! 한 주도 잘 지내셨나요? 작년 이맘쯤의 시월에도 상기된 감정으로 뉴스레터를 부쳤던 기억이 나는데 시간이 참 빠릅니다. 흔히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간다고 하죠. 살아온 인생에 1(년)을 나눈 숫자가 매해 줄어드니 일 년의 체감이 빨라지는 건 씁쓸하지만 자연스러운 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구독자님은 혹시 음악을 들으며 이런 경험해보신 적이 있나요? 음원으로 무덤덤하게 듣던 곡을 공연장의 달뜬 분위기, 쟁쟁하게 귀를 때리는 라이브로 접하고는 완전히 다른 곡으로 받아들여본 적. 그 간극과 여운에 한 곡을 며칠째 플레이리스트에 담고 공연장의 오감을 되감으려 애쓴 날들! 저는 한여름의 인천 펜타포트를 시작으로 가을까지 총 세 군데의 공연장을 찾고 매번 같은 경험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곤 공연 이전의 감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오늘 준비해본 노래는 공연을 보고 푹 빠져버린 노래들, 그 중에서도 멋진 한국 밴드들의 노래입니다. 모쪼록 저마다 품고 있는 소중한 기억, 꼭 공연장이 아니어도 음악과 함께한 공간의 공기를 떠올리며 듣고 읽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가을에 근사한 BGM으로 합류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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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2), 공연의 조명 온도 습도가 느껴지는 사진을 맨 아래 첨부했어요.📸

🌻 보수동쿨러 - 모래

보수동쿨러는 내게 이름만 자주 들어본 부산 출신의 밴드였다(보수동 책방골목의 그 보수동이다). 나는 이들을 통영 서피랑의 작은 야외 공연장에서 보게 됐다. 오십 명도 채 되지 않는 관객이 무대를 둘러싼 채 옹기종기 앉아 있었고 그 중에는 편한 차림의 동네 주민들이 적지 않아 힙한 페스티벌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이하게도 보컬이 무대 중앙으로 나서지 않고 제일 구석에서, 나머지 멤버들과 거의 수평에 가깝게 나란히 서 있었다.

10월 초 가을 밤의 공기는 그야말로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공연장이 위치한 곳의 지대가 꽤 높았던 탓에 밴드의 뒤로는 통영 시내의 야경이 점점이 빛났다. 저만치 보이는 항구의 윤슬이 지붕 대신 내려앉은 어둠을 뚫고 반짝였다. 잔잔한 연주가 이어질 때면 풀벌레들이 뚜르르 뚜르르 울며 세션을 자처했다. 그토록 완벽한 가을 밤의 공연장에서 빈티지하면서도 서늘한 보수동쿨러의 음악에 완전히 잠겨 있던 시간이었다.

보수동쿨러에 대해 나중에 알고 보니 2020년 기존 보컬이 탈퇴했고, 오디션을 통해 영입한 새로운 보컬과 작년 이맘쯤 첫 정규앨범 [모래]를 발표했다고 한다. 타이틀 <모래>가 사뭇 쓸쓸해 보이지만 <고무>, <대니>와 같이 발랄한 곡이 섞여 있어 조화롭게 만들어진 칵테일을 마시듯 앨범 전곡을 단숨에 들어버렸다. 사실 이 외에도 <목화>, <죽여줘> 등 걸출한 싱글이 많아 소개할 노래를 고르는 데 유독 애먹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내게 있어 가장 애착을 둔 도시인 통영에서 처음 만난 이 밴드를 나는 앞으로도 질척한 관심을 두고 지켜보게 될 것 같다.

🌻 새소년 - joke!

8월 초의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은 대단히 더웠다. 언젠가 비슷한 시기의 오사카 락페를 다녀온 경험이 있기에 내심 오만했는데 그에 못지않은 반도의 습도 앞에 무릎 꿇었다. 가만히 있어도 비 오듯 땀이 흘러서 좀처럼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게 혹서기 훈련인가 페스티벌인가 긴가민가하던 차에 새소년 공연은 놓칠 수 없어 그제야 무대 앞으로 호다닥 달려 나갔다.

보컬 황소윤 단독으로 이런저런 무대에 피처링한 공연은 몇 차례 봤지만 '새소년' 밴드의 공연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새소년의 프론트퍼슨 황소윤은 정말.. 진짜.. 너무나.. (어휘력의 한계) 그는 정말 락스타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피크를 입에 물고, 허리를 뒤로 꺾으며 기타를 치고, 무대 이편에서 저편 끝까지 전력으로 내달릴 때마다 나를 비롯한 모든 관객이 흡사 무릎반사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곡이 <joke!>다. 가사가 영어로 되어 있어 찾아보니 이보다 걸맞은 제목이 또 있을까 싶었다. 진심인지 거짓인지 모를 말을 말을 조각조각 늘어놓다 '미안, 농담이었어' 하곤 휙 돌아설 것만 같은 노랫말, 그리고 일일이 이해하지 않아도 펑크한 연주만으로 와닿는 자유로운 기운! 정수리를 구워버릴 기세로 태양이 뜨겁던 페스티벌의 기억은 점차 흐려지지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여지없이 몸이 들썩인다. 'Baby, you've got nothing, nothing!' 목놓아 떼창하고픈 욕망을 억누른 채 지하철에서 소심하게 발가락만 까딱대면서.

🌻 크라잉넛 - 좋지 아니한가

너무 새삼스러운 선곡인가! 하지만 나는 지난 9월 말, 서울 난지한강공원에서 열린 렛츠락 페스티벌에서 크라잉넛의 공연을 처음 보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좋지 아니한가>는 노랫말이 아름다워 평소에도 좋아하던 곡이었는데 왜 그리 새로이 들렸는지 모르겠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불어오는 강바람, 막힌 곳 없이 뻥 뚫린 머리 위, 직전까지 낯 모르는 이들과 몸을 부딪치고 뛰어 노느라 땀이 흥건하던 가을 밤이어서 그랬는지도.

곁에 서 있던 어느 관객은 노래의 연주가 시작되자마자 눈물을 주륵 흘리기도 했다. 정말로 <좋지 아니한가>의 가사 구석구석은 신나는 연주 뒤에 능청스럽게 숨어 무방비한 마음을 돌연 찌르는 데가 있다. 노래에 묻은 자유분방한 순수를 바라보다, 바보 같은 추억을 떠올리다 크게 한번 웃고 싶어진다. '그래도 너는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리 태어났으니까'

페스티벌이 끝난 뒤 크라잉넛 공연의 여운이 남아 영상을 찾아보다 이 밴드가 좀더 좋아졌다. (데뷔 27년차 밴드에 이제 와 입덕하는 사람이 있다?) 그저 <말달리자>, <룩셈부르크>의 괄괄함으로 기억한 밴드였는데 이렇게나 형형한 총기와 에너지를 현재진행형으로 뿜어내고 있는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들이 쓴 노랫말처럼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공연장만의 고유한 공기 속에서 이 밴드를 새로 만날 수 있어 그저 기쁜 마음이다. 바람처럼 강물처럼 지나갈 세월 앞에 '그래도 같이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진심을 다해 외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