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레터에서는 버리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했어요.
어떠셨나요?
정리나 버리기나 말장난 같긴 합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정리란 말에 줄이거나 없앤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편의상 정리는 1, 2의 의미로 버림은 3번으로 정의하고 이야기를 이어갈께요.
우린 체계와 제도, 정리란 말에 집착합니다. 전직장 중 한 곳은 수십 년 업력을 갖고 있고 제도왕국이라 할만큼 많은 제도와 체계가 중시되던 회사였음에도 익명 평판 사이트에 가면 '대기업인데 체계가 없다'는 말이 꼭 나왔습니다. 중견, 중소, 스타트업은 오죽할까요. 그런데 경험상 이 얘기가 끊이지 않는 건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 정리와 체계라는 자체가 정지되어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라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개개인의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때그때 상황이 정형화 되기 어려우며 미세하게라도 시기나 담당자, 이해관계자의 조합에 따라 상이하니 당연한 걸지도요.
그래서 언제, 누구에게나 만족스러울 체계나 정리라는 건 존재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버림은 다른 거 같아요.
차마 입 밖으로 그거 하지 말자, 안 해도 된다는 말을 꺼내긴 어렵지만 막상 없애면 우려와 달리 없어도 되네 싶은 일이 더 많더군요. 또는 원래 그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혀지기도요.
우리가 체계나 제도가 필요하다 말할 때엔 혼란을 더 방치하기 어렵고 효율과 집중력을 저해할 때, 속도가 늦어질 때입니다.
이 말은 반대로 체계를 잡고 제도를 만들 때엔 속도를 높이고 집중력을 극대화 할 수 있게 하느냐로 검수를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요.
집중력을 높이고 효율을 높이고, 속도를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야 할 일의 가짓수를 줄이는 거, 커뮤니케이션 하며 조율해야 할 사람의 수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일을 줄여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거구요.
일을 줄이란 말은 많지만 그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습니다. 누구나 들으면 끄덕일만한 원론적 수준이죠. 제가 드리는 팁은 계속 강조하지만 '정확히 지금까지, 현재 어떤 일을 얼마나 어디에 하고 있는가'를 아는 작업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가장 큰 허들은 '다 알아'라는 생각일 거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얼추 9~10 센티 정도 됩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실제로는 9센티다. 크게 문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1센티가 쌓이며 10센티, 1미터가 되기도 할 거에요.
안다.
안다는 건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갖고 있는 상태, 어떤 상태나 존재를 느끼거나 깨닫는 걸 말합니다. 제가 말하는 건 정확히 안다에요.
안다는 건 대략 10센티 정도라는 거고, 제가 말하는 정확히 안다는 9센티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모든 일을 9센티로 알아야 하는 거냐. 물론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각 담당자의 암묵지도 개입되니까요.
그럼에도 최소한 누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각 업무에 리소스를 어느 비중으로 쏟고 있느냐, 상대적으로 많이 투입하고 있는 일이 그 정도 투입할 일이냐, 정작 기대하는 역할에 쏟는 리소스가 생각보다 적진 않으냐,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이냐.
이걸 거쳐야 비로서 다음에 뭘 할 지 정할 수 있는 거에요. 체계나 제도는 두 번째 단계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한참 뒤에 언급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정리하고 체계를 잡겠다 할 때 '뭘 하겠다'를 전제로 시작하면 곤란해지곤 해요. 정확한 상황 파악 후 뭘 해야 하는 구나를 결정해야 이전의 짐들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만 추가하는 걸 방지할 수 있거든요.
가장 쉬운 게 뭘 만드는 겁니다. 누더기처럼 붙여가면서요.
가장 어려운 게 뭘 안 하는 겁니다. 필요하다 판단해 했고, 누군가는 그 일을 담당해 왔으며 그걸로 채용하고 급여를 받아왔기에 성과 기여에 대한 경중을 떠나 뭔가 하던 걸 안 하는 게 가장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제도와 체계를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정리'가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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