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차 사원급 팀 후배와 전사 교육을 위한 교안을 만들던 때였습니다. 제가 후배에게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었죠. 사실상 같이 작업한다고는 했지만 거의 제가 얼개부터 상세 내용까지 다 만들고 있는 것과 다름 없었죠. 그러나 팀장님이 육성 차원에서 그리고 작업 속도 차원에서 같이 진행하라 지시하셨기에 한팀으로 진행 중이었습니다.
후배는 신입 시절 1년 간 교육만 전문으로 하는 곳에 파견을 다녀와 복귀한 후였어요. 같은 팀이었지만 직접적으로 같이 일하진 않았죠. 하지만 신입시절부터 관계가 괜찮았고 간접적으로 부서 내에서 업무 조언이나 자료제공, 설명에 아낌없던 저였습니다. 후배도 잘 따르던 편이었구요.
하지만 아예 같은 업무를 하게 되면서부터 미묘하게 어긋났고 감정적으로 후배가 제게 멀어진다는 걸 느끼던 참이었어요.
저는 성격도 급하고 손이 빠른 편입니다. 일정이나 목표가 정해지면 빠르게 착수해 깔끔히 끝내려 노력했어요. 제가 일하는 스타일은 어떤 교안을 만들어야 한다치면 한 달의 기간이 있을 때 2~3주 정도는 해야 할 일에 대한 스터디를 집중적으로 한 후 나름의 초안을 잡아 계속 수정을 했습니다. 그러곤 3주차가 되면 전체 기획 스케치 후 상사와 싱크를 맞추고 기획안을 최종 컨펌하면 3~4일 간 바짝 콘텐츠를 만들어요. 4주차 때엔 이걸 가지고 리뷰하면서 세부 조정해야 하는 것만 수정하는 식으로요. 보통 완성된 콘텐츠는 방향이 바뀐다거나 크게 수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단어나 작은 표현, 추가 사례 정도 일부 넣는 정도.
사전 스터디를 많이 하는 편이고, 힘들어간 기획안 대신 수시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다고 구두나 메모 수준에서 리더와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보고를 위한 기획안은 그 과정 후에 상세 첨부 자료나 예시까지 만들어 이해할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만들었기에 기획안 보고부터는 수정이 별로 없던 거죠. 보통은 아무리 이야기를 많이 해도 기획안이라는 것은 정제되어 있어 사람마다 아이디어를 보태기 시작하고 모호한 부분이 생기면 방향 바뀌고 콘텐츠단에서 그거 아니다 하기 쉬워요. 그래서 저는 그게 싫어 최대한 앞단에서 많이 공부하고 많이 소통한 후 기획안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콘텐츠도 하루 이틀 날을 잡아 집중해 만드는데 70%정도는 완성을 했어요. 배치, 표현, 내용에 집중해서요. 그것만 통과하면 바로 전체 디자인과 세부 슬라이드별 디테일을 수정했죠.
후배는 신중했어요, 조심성도 많았고 섬세했습니다. 슬라이드 디자인을 아주 잘했고 풀어서 설명하는 스타일이에요. 한 장 한 장을 공들여 만드는 스타일이었죠. 경험이나 학습량에서 아무래도 저보단 미흡할 수밖에 없었고 후배 입장에서는 제가 차이 많은 선배였으니 대체로 따라오는 편이었구요. 똑똑하고 사원급에서는 잘 만든다 하는 편이었기에 작업이 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난항이 없었어요.
굳이 나누자면 숲을 보고 나무를 다듬는 저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다듬으며 숲을 만드는 후배였죠. 속도가 유난히 빠른 저와 평균보다 속도는 좀 느린 후배, 두괄식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저와 미괄식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후배, 구문과 키워드 중심의 워딩에 집중하는 저와 문장형 상세 설명을 중시하는 후배, 용어와 자료의 정확성을 유난히 중시하는 저와 역시 중시하긴 하지만 그 파고듦에 있어서는 제 기준보다 훨씬 낮았던 후배, 직설적이고 바로 피드백하는 저와 싫은 소리는 못하고 돌려서 말하는 후배, 일정과 속도를 중시하고 납기일 최소 사나흘 전엔 마무리 해 검수하고 수정보완하는 저와 납기일을 최초 보고로 생각하는 후배.
보통 조직 내에서 일하고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할 때 언급되는 것들만 본다면 제 방식이 일잘러라 할 수 있어요. 그럼 어차피 제가 해당 과제의 리더였고 한참 선배였으니 스타일이 다를 지언 정 끌고 가면 되고 제가 하면 금방 끝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원래 예상했던 기한보다 2~3주나 더 걸렸고 그 과정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 거의 받아쓰기 수준이라 할 만큼 상세히 설명하고 피드백을 해주었어요. 직접 슬라이드를 그려주지 않았을 뿐 상세 배치까지, 표현까지도 설명했었죠. 제가 뭔가 후배와 작업 할 때 원칙 중 하나는 후배의 작품이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거였는데요. 그래서 내가 다 해줄 망정 그 구현은 후배 손으로 하게 했어요. 아무리 다 설명해주었다 해도, 제가 하면 금방 할 거 같아도, 몇 번을 수정해야 해도 제가 고수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을 돌려 하지 않고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명확히 하는 편이라 혼동할 여지를 타인에게 준 적도 거의 없구요.
그런데 매번 기껏 설명하고 그게 맞는 거 같다며 이해했다고, 알겠다고 한 후배가 다른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 거였어요. 이유는 다 있었습니다. 제가 한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본인 생각이 다른 것도 아니었어요.
그럼 어디에서부터 어긋났느냐.
바로 앞서 언급한 저와 후배의 일하고 생각하는 스타일 차이에 있었습니다. 전체를 빠르게 잡아 세부 디테일을 한 번에 수정하는 저와 달리 한 장 한 장의 디테일을 중시하며 수정하는 후배가 충돌한 거죠. 물론 후배의 방식은 아직 많은 작업을 해보지 않았기에 신속하긴 어려웠구요. 그런데 유난히 급한 저와 일하다 보니 제 입장에서는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음에 답답했고, 한 챕터를 만들 시간에 슬라이드 서너 장에 매몰된 것처럼 보여 속이 터질 지경이었어요.
그리고 설명이 장황하다 보니(네,, 제 기준입니다) 슬라이드 구성 스타일에서도 이견이 많았어요. 저는 교안을 만들 때 핵심 키워드와 메시지를 표현할 수 있는 아이콘이나 이미지를 상당히 신경 쓰는 편이이에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교안을 썰렁할 정도로 심플하게 만드는 편이에요. 전체 교안의 스타일과 톤을 맞추는 데에도 신경써요. 후배는 상세히 설명하고 그에 맞는 걸 고르긴 하지만 디자인에 좀 더 신경쓰는 스타일이구요. 그래서 한 장씩 보면 예쁜데 제 기준엔 장황하고 전체의 조화가 안 맞아 보였습니다.
직접 그리지만 않았을 정도의 설명으로도 다른 결과물을 가지고 오고 그 결과물을 보면 제 말을 이해한 게 아니구나란 생각에 이해시키려 설득하려다 보니 잔소리도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쥐 잡듯이 다그친 거 같아요.
"내가 만들고 직접 그려서 주면 쉽겠지만 그럼 당신의 작품이 안 돼, 그래서 작업 자체는 본인이 해야 해"라 했죠.
그러던 어느 날부터 후배가 이런 말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에서는 이렇게 일했어서.."
파견 다녀왔던 곳에서는 자기처럼 일했다는 거였어요. 이 말이 몇 번 나오고 반복된 설명에 답답해 하던 저는 쏘아붙이고 말았습니다.
"거기 선배들이 그렇게 일했다고 하지 마요. 그렇게 일하지 않았을 거고 본인 스타일대로 선택적 취사를 한 게 아닌지 잘 생각해 보세요. 지금 작업이 겉돌고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데 본인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 걸 그 조직과 그 선배들이 그렇게 했다 하면 싸잡아 욕 먹이는 거 밖에 안 되지 않나요?"라구요.
막판에 일정이 빠듯해져 제가 만든 부분이 대부분이기도 했어요. 핵심적인 부분은 제가 만들었고 후배는 마이너한 부분과 장표 다듬는 정도였어요. 결과적으로 해당 콘텐츠는 잘 만들어졌습니다. 관련 사업부장이나 리더들로부터도 잘 이해하고 쉽게 풀어냈단 칭찬도 받았구요. 성공적으로 전사에 잘 운영했고 저는 모두 후배가 했다 했습니다. 고생했다구요. 그 후배는 이후에 해당 과정을 본인이 다 한 것처럼 말하고 이력서에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 지내면서도 저를 조심스러워하고 편해 하지 않았죠. 많이 배웠다 따르면서도 불편한 그런 복잡미묘한 관계 말이에요.
이 에피소드를 듣는 분들은 대부분 제 방식이나 했던 말들이 맞다 하고 그 후배의 스타일을 아는 분들은 이해한다라고 하세요. 다시 돌아봐도 업무 수행엔 제가 훨씬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란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이번주 레터에서 이 주제를 꺼낸 건 그 과정상에서 저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닌 동료 혹은 후배를 데리고 이끌어 가야 할 때엔 달랐어야 했단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의견을 내는 데에 매우 조심스러워지고 제 눈치를 살피던 후배, 슬라이드에 옮기기만 해도 될 정도로 얘기했는데도 빈 슬라이드를 보며 막막해 하곤 했던 후배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막판으로 갈수록 스스로 자책하고 힘들어하던 모습도요.
여러분은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저나 제 후배 어느 입장이든 간에요. 그땐 어떤 마음이셨는지 그 경험을 댓글에 나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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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게
참 고민되는 지점을 잘도 짚어 주십니다. ^^; "나와봐(줘봐). 내가 할게." ---> 내 정신건강에도, 사업 진행에도, 프로젝트 속도에도 좋은 방법인데 딱 하나 "후배 육성"에는 도움이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해서 제가 하는 과정에서 외부와 메일을 주고받거나 할 때 일부러 "그 일을 했어야 할(앞으로 담당해야 할) 후배나 실무자들을 cc.로 넣어서 보게 해요. (메일 작성하는 것도 나름 고난이도의 업무라는 생각) 시간도, 자금도, 인원도 충분히 많다면 "일단 해봐요. 나중에 결과 보면서 이야기 합시다."로 하고 싶은데, 그런 날(회사에 자원이 풍부한 날)은 오지 않겠지요. 어느 선까지 개입(참여, 지원, 분담)하는 것이 일에도 사람에게도 좋을지 항상 고민.
프로브톡
신임리더에게 가장 먼저 말하는 것 중 하나가 실무자에서 관리자 모드로의 전환이고 이대리, 이과장으로 남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건데 정말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더라구요. 신임팀장의 최우선 과제는 인내심이 아닌가 싶긴 한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가장 빨리 내가 하는 일을 내가 하는 만큼 팀원이 할 수 있는 방법을 더 숙고해봐야 하는게 아닐까 합니다. 내가 직접 하지 않고 시킨다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거든요. 직접 해 보여주며 그대로 따라하게 만드는 편이 이해나 속도 면에서 더 낫다면 초기엔 이것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 사람 by 사람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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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슬기
오늘의 에피소드는 좀 다르게 읽혔습니다.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2003년 어느 가을로 점프 했거든요. 제가 2년차이었을 때, 제 매니저 선생님이 제가 만든 조서를 보며 이야기 해주셨던 내용과 거의 일치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성격 급한 boss가 되었고 두괄식을 선호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승전결로 구성하며 build up을 가져가는 미괄식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올 한해 경영지원팀장겸씨레벨로서 제게 주어진 2명의 사원분들과 일을 하면서,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다 그리고 보여주면서 일해봤는데 현재는 이게 제일 나은 것 같더군요. 좋은 하루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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