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월요일 이야기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이 있던 건 조직에서 평가나 진단에 대한 논의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 아닌가 합니다.
에피소드로 돌아가 볼께요.
먼저 리더십이나 조직문화가 뻔히 어떤지 아는데 늘 전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던 조직이에요. R&D, 제조 중심 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회사는 일반 지원부서가 아닌 이상 대부분 스페셜리스트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그래도 사업부가 여러 개이고 사이트도 8군데였기에 같은 직군 간에는 사업부 이동 정도는 가끔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A라는 조직은 부정적 의미의 고인물 조직이었어요. 평균 연령대도, 평균 근속 기간도 높았고 리더는 오랜 기간 바뀌지 않았죠. 위계와 투박한 커뮤니케이션, 정체된 업무 수준을 갖고 있었습니다. 임원의 권한과 권력(?)은 꽤나 강력했답니다. 조직문화와 리더십 서베이 결과는 늘 90점대였구요. 제가 입사하기 전에는 가장 낮은 점수를 받던 조직 중 하나라 했습니다. 하지만 팀장, 임원이 공공연하게 누가 이런 응답을 했다, 가만 안 둔다며 한바탕 난리가 난 이후 모든 서베이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조직이 되었습니다. 인터뷰를 해보았어요. 불만과 문제는 가득하지만 피곤해진다며 그냥 점수 주고 말지라 했어요.
인사에서 이 상황을 모르고 있느냐,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A부서 뿐만 아니라 전사적으로도 이런 조직은 여럿 있었죠. 매년 때 되면 실시하는 전사 서베이. 그 서베이 결과 분석과 보고를 위한 Task를 한 달 가까이 하고 수없이 보고서를 수정했습니다. 보고서 내 단어 몇 개, 한 줄 정도를 적기 위해 심지어 SPSS를 사용했어요. 이 정도 상관과 유의도는 엑셀로도 충분히 가능했는데 말이죠.
보고서는 사업부별, 사업부 내 임원 조직별로 수십 개 문항의 평점과 주관식 응답 결과를 한 장에 담는 방식이었습니다. 막대/꺾은선/파이차트/도넛 등 각종 그래프 형태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사분변과 스케터 플롯 등으로 다양하게 시각화 해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저희끼린 장표를 그린다, 도화서 등으로 부르기도 했어요. 점수가 높은 조직에 대해서도 보고는 해야 하는데 적을 말이 없어 늘 고민이었습니다. 평균인 조직도 마찬가지. 레드 시그널이 뜬 조직이 보고서의 중심이었는데 원인 분석한다고 인터뷰하고 개선 솔루션으로 뭘 할 지 등이 담겼습니다. 이후엔 개선 과제 팔로업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월별로 보고하는 작업이 쭉 이어졌어요.
진단에 대해서는 몇 번 더 풀어 놓은 이야기들이 참 많아요. 하지만 이번 레터에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건 이거에요.
핵심 원인을 비껴간 언저리 원인 분석과 엉뚱하고 효과 없을 개선 과제들, 인사부서의 회피가 만들어낸 부작용이요.
이 부분을 강하게 어필했지만 결국 제게 돌아온 피드백은 "누가 몰라?", "됐고" 였어요. 저는 또 한 번 그냥 넘어가지 않는 사람, 불만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작은 변화가 생긴 건 CEO와 인사 임원이 바뀐 후였습니다. 이 조직이 한 게 없는데 왜 이리 점수가 높은 거냐, 이렇게 높은 이유가 뭔지 얘기 해보라는 질문 한 마디로 보고서에 담기는 내용이 추가되게 되었거든요. 하지만 또 대단히 크게 바뀌었냐 하면 그렇진 못했습니다.
누구나 알지만 보고서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 임원과 리더의 엉망진창 리더십, 과거의 트라우마.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조직의 말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생각, 점수가 낮을 때 인사와 경영진에서 왜 낮냐, 뭐가 문제냐 헤집어 놓던 기억, 개선한답시고 이사람 저사람 불려가 면담하고 개선과제 도출 워크샵, 개선과제 결과 보고, 다음 점수가 오르면 오르는 대로 정말이냐 묻고 안 오르면 안 오르는 대로 계속 지적 받는다는 인식, 각종 서베이에 대한 피로도, 그래도 말해 봤지만 바뀌는 거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이 몇 년 간 차곡차곡 쌓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장 리더십 좋고 조직문화 좋은(?) 조직이 탄생했고.
지난 레터 중 하나에서 사람이 아닌 문제에 집중하시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어요. 하지만 문제의 끝엔 사람이 있는 경우를 심심찮게 봅니다. 그게 리더일 때 조직에 끼치는 악영향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실 거에요.
HR이나 경영진이 리더, 특히 임원에 과감한 결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서 애초에 그런 사람을 왜 올렸냐, 그렇게 문제인데 왜 이제 보고하냐, 후임은 있느냐, 조직문화나 리더십이 성과를 내온 리더를 면직시킬 결정적 사유가 되느냐. 오랜 기간 기업들은 역량이니 리더십이니를 외쳐왔지만 성과 내는 사람을 리더 선임 시 가장 우선시 해왔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당장의 조직 성과 때문에 많은 걸 덮고 간 경우도 많았죠. HR은 가장 임직원에게 잣대를 들이대고 신중하게 일하는 부서라 하지만 때때로 가장 내로남불 부서가 되기도 합니다. 솔직한 피드백과 과감한 문제해결, 주도성을 강조하면서도 리스크 최소화란 합리화 아래 회피하는 조직도 많습니다.
때론 진단이라는 행위 자체, 방법론에 매몰되어 얼마나 더 정교하게 분석하느냐에 집착하며 진단/서베이의 본질을 주객전도 시키기도 해요. 데이터 기반 분석, 객관화, 일부 담당자의 전문성 욕심 등으로 분석하고 이것들을 소위 '있어빌리티'로 가득한 보고서로 만드는 데에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들이곤 합니다. 모든 진단/평가/서베이는 현상을 알아보기 위한 도구이지 목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구요. 정말 중요한 건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죠. 실행 말입니다. 실행 계획 말고 실행요!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적으로 안 하느니만 못하는 일들이 있어요. 잘못 되고 있는 걸 알고도 하던 걸 없애거나 변경하는 걸 어려워 할 때도 많지요. 하지만 이런 일들이 앞서 언급한 조직 내 학습된 무기력을 조장하는 걸 우린 너무 많이 봅니다. 더구나 모이면 일하는 문화 혁신을 외치고 변화, 개선, 혁신이란 과제를 강조하며 구성원의 만족도, 몰입도, 동기부여 강화를 그렇게나 고민하는 리더와 HR이 그 원인이 되는 것도요.
금요일에는 조직건강도, 조직문화 설문(혹은 진단)을 검토하거나 실시할 때 무엇을 유의해야 하는지 담아보려 합니다. 주객전도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요.
이번주는 열린(?) 결말로 여러분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보기로 마무리 하게 되네요. 오늘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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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슬기
뭉개고 가도 되더라도 결국 언젠가는 그게 쌓이고 쌓여 고칠 수 없는 암덩어리가 되고 회사는 망가지고 사람들은 떠나고 못 떠나는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살게 되더군요. 그렇게 안되려면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습, 습관, 문화들이 바뀌어야 하는데, 큰 충격으로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바뀌지 않더라구요. 그렇더라도 그렇게 살긴 싫으니, 나, 그리고 내 주위는 그렇게 안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이렇게 하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할텐데, 그것 또한 걱정이네요.
프로브톡
의도가 나쁜 일은 거의 없는데 결과적으로 안 하니만 못한 일이 빈번한 이유.... 오늘자 고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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