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레터에서의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셨나요?
1~3을 구분하기 시작하셨다면 이제 4~6은 좀 더 잘 받아들이실 수 있을 거에요. 오늘은 4번, 잘하는 일입니다.
잘하는 일
할 수 있는 일과 먼저 구분해 보겠습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해 기본적인 개발 지식을 배웠고 부트캠프에도 들어가 한 번 더 배웠습니다. 그리고 스타트업에서 개발자로 몇 년 일했구요.
자, 이 사람은 뛰어난 개발자일까요?
뛰어나다는 건 둘째치고 회사가 기대하는 수준의 업무를 잘 수행해 내는 개발자일까요?
회사마다 기대 수준이 다르고 함께 일하는 동료의 수준이 또 다를 테니 일률적인 기준을 적용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럼에도 우린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가이드가 많이 필요한지,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찾아내 적용해 보는 사람인지, 코드를 보고 문제를 발견하고 바로 대응 가능한 수준인지 등을요. 이를 통해 누군가는 잘한다, 누군가에겐 잘하진 못한다, 혹은 못한다 평가합니다.
인사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5년 이상 인사담당자로 일했는데 5년 차 이상이면 이래야 한다는 기준에 미흡할 때가 많습니다. 분명 그간 경험한 것만 보면 가짓수도 많고 채용, 보상, 노무, 교육, 평가까지 다 했다는 데도요. 본인만의 철학, 경영진과 회사 성장, 생존에 대한 기여, 본질적 문제 정의, 정말 이게 최선이었는가 등을 따져보면 기계적으로 해야 하는 그때그때의 일을 단발적으로 대응했다에 가까운 일인 경우입니다. 이런 걸 저는 '물경력'이라 하고 '성장이 아닌 숙련'이라 합니다. 전문가로 성장해 온 과정이 아니라 익숙한 걸 반복해 숙련도만 높아지면 이직을 해도 연차가 오르고 연봉이 오르지만 수평이동에 머무르게 됩니다. 같은 수준의 일을 다른 회사에 가서도 그대로 하는 거죠. 불과 스타트업에 나온 지 불과 4년 여일뿐인데도 인사담당자의 이력서를 족히 수 백통 보고 면접만도 수 없이 보며 확연히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이 기준일 수도, 정답일 수도 없습니다. 특유의 직제와 소요 시간이 젊고 탁월한 인재를 발견해 내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기에 부정적인 면도 많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을 예로 들면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등으로 직급을 차례대로 밟아갑니다. 단순히 승진이 아니라 그 기간 좁고 얕게 선배들의 업무를 조금씩 받아 피드백받아 가며 하나씩 확장시켜 나가는 축적과 성장의 시간으로 보면 됩니다. 대기업이라고는 해도 같은 그룹사에서도 계열사별로 다르고, 대기업군이라 해도 천차만별이기에 이 기간과 단계는 또 차이가 많습니다. 하지만 보통 대리 정도면 2~5년 차에 달게 되는데 10년 차쯤 되면 빠른 회사는 차장, 보통은 과장 초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가장 많은 실무를 할 때이지만 단독 기획과 책임까지의 완결형 업무를 폭넓게 할 기회가 많지는 않습니다. 특정 업무의 실무자로 일하는 거죠. 의사결정을 내린다거나 완결형 업무는 거의 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에서의 10년 차는 완전히 다른 얘기죠. 그 이하의 C-level도 많은 상황에서 경험의 밀도가 다르다고는 해도 충분한 축적의 시간을 갖거나 냉정한 피드백을 받기 어렵습니다.
이런 환경적 특성으로 잘한다의 기준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채용 장면에서 많이 느낍니다. 스타트업들과 미팅을 하면서 깊숙하게 이슈를 들여다보면 그 '잘'의 수준이 어떤가로 그 조직의 문화와 인재밀도가 결정적 영향을 받는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베스트라면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고, 실제로 할 수 있는데 심지어 잘하기까지 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앞서 다루었듯이 이것들을 잘 구분해야 내 성장의 기회를 제대로 찾고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눈앞의 명성이나 처우를 기회라 여기며 '기회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기 쉬우니까요.
재밌는 건 하고 싶고 할 수도 있지만 잘하지 못하면 좋아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흔하다는 거겠습니다. 일본어를 취미로 배웠던 적이 있어요. 상대적으로 일본어는 쉽다는 인식이 있지요. 우리로 치면 가나다라 같은 히라가나, 가타카나부터 배운 초급단계 수업에는 30명 명 넘은 수강생이 있었습니다. 4단계를 패키지로 등록하는 코스였으니 서로 같은 진도로 승급하면 쭉 가는 거였죠. 1단계는 쉬웠어요. 내가 언어 천재인가, 일본어에 소질 있나 착각할 만큼 이해도 잘 되었고 그만큼 재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단계 마지막주쯤 수강생은 30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어요. 2단계 수업은 25명 정도 있었습니다. 1단계를 같이 수료한 사람들은 20명쯤이었고 다른 분들은 이전에 1단계를 들었다가 오랜만에 다시 듣는다는 분들이었죠. 2단계 수업에서는 단 2주 만에 수강생이 반으로 줄었습니다. 3단계 수업은 15명 정도로 시작했어요. 4단계는 더 많았지만 저와 함께 했던 수강생들은 5명뿐이었습니다.
2단계부터(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았지만) 수업 난이도가 확 올라가는 걸 느꼈습니다. 갑자기 시간마다 문법이 튀어나오고 외울 게 몇 배 많아졌죠. 이미 2단계 혹은 다음 단계를 들었지만 중도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한 분들이 함께 하며 그들은 저희보다 선행학습도 되어 있었습니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나보다 잘 이해하고 따라가는 걸 보며 드는 상대적 위축, 더 잘하고 싶다는 짜증, 갑자기 올라간 난이도로 1단계만큼 재밌지 않더군요. 한자를 외우기 시작하면서는 더더욱요.
그래도 꾸역꾸역 2단계를 마치고 3단계로 가니 훨씬 더 난이도가 올라갔음에도 재미가 다시 있었습니다. 더듬더듬이지만 짧은 문장을 말하고 늘었단 느낌이 드니 의욕이 생기더라구요. 하지만 3단계 중간쯤 가니 과제가 밀리고 조금만 게을러져도 수업 따라가는 게 어렵더군요. 그럼 또 하기 싫단 마음이 올라왔고요. 4단계는 결국 한 번 포기했다가 재도전해 듣게 되기도 했고, 역시나 어렵다며 그러다 또 많이 늘었다 싶으면 다시 해보다가 주춤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일본의 작은 소도시를 혼자 여행하며 자유롭게 다녀봐야겠다로 시작한 일본어 공부.
자, 우리 주제로 돌아와 볼까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일본어였을까요? 엄밀히 제가 하고 싶은 건 일본어가 아니라 일본의 작은 소도시 혼자 여행(이하 일본여행)입니다. 1번을 잘 정의해야 해요. 아니면 일본어가 목적이 되어 버리니까요. 일본여행을 하고 싶다면 꼭 일본어 공부를 해야 했느냐는 근본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일본여행만 하면 되는 거니 혼자서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할 테니까요. 번역기를 잘 쓸 수도 있겠죠. 좀 더 들어가 작은 소도시 혼자 여행이 꼭 일본이어야 하느냐도 있습니다. 작은 소도시 혼자 여행이 하고 싶은 거라면 일본 외에도 태국이며 유럽이며 방문국가가 많아질 거고 그럼 그때마다 해당 국가의 언어를 배울 거냐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소도시이냐, 해외이냐란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파고들다 보면 나는 조용히 생각하고 걷는 걸 좋아한다, 이왕 걷는 거 낯선 지역에 나를 두고 싶었던 것일 수도요. 그럼 좋아하는 걸 하기 위해 뭘 해야 하는가가 일본어일까요?
좋아서 잘하는지(이러면 너무 행복한 인생이겠지만), 잘해서 좋아하는지도 구분해 보면 좋습니다. 제가 일본어 수업을 들을 때 클래스에는 일문과 신입생들이 몇 명 있었어요. 고교 때 제2외국어도 일본어는 아니라 했습니다. 성적에 맞춰 일문과에 왔는데 따라가질 못해 듣는다 했어요. 이미 한 학기를 따라가지 못하다 온 거라 일본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고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첫 학기에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공부했던 동기들은 앞서 나가고 본인들은 처음부터 해야 하다 보니 격차가 벌어져 흥미를 잃어버렸던 거죠. 아무리 성적에 맞춘다 해도 아예 싫은데 진학했냐 하니 그건 아니라 했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도 좋아했고 쉽다 하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못하니' 싫어지게 된 거죠.
1~2단계 정도는 못해도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배운 게 있으니 그들에게 일본어는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거나 좋아하진 않아도요. 하지만 할 수는 있었어도 잘하진 못했죠. 좋아하지 않아 잘하지 못했냐, 잘하지 못하니 좋아하지 않느냐.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얘기지만 현업에서 이 질문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도, 리더가 팀원을 관찰하고 피드백을 제대로 주기 위함에도요. 3단계까지 왔던 일문과 학생은 단 2명뿐이었습니다. 열심히 하던 그 두 학생은 그 수업에서 가장 잘하는 학생이기도 했어요. 한 번은 티타임을 했는데 그러더군요. 이제 좀 알 거 같고 재미가 붙었다고요. 전공 수업을 따라가는 목적으로 시작했는데 진짜 잘하고 싶다더군요.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통역사가 되고 싶다고까지 했습니다.
다는 아닐지 몰라도 어떤 일을 잘하게 되면 좋아지고 좋아진 일을 잘하게 되면 관련한 꿈도 커지는 걸 단순히 일본어 수업이 아니어도 그동안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자세히 다루진 않겠지만 잘하는 일임에도 좋아하지 않고 하기 싫은 일인 경우도 종종 봅니다. 그림에 재능이 넘치지만 화가나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수학을 굉장히 잘해도 수학자는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제 지인은 올림피아드 수학 경진대회에서 입상할 정도였지만 수학을 너무 싫어했습니다. 수학 교사이셨던 부모님의 엄격한 훈육으로 잘했지만 싫어했어요. 저는 강의를 오래 했습니다. 괜찮게 잘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죠. 하지만 강의를 정말 하기 싫어합니다. 당시에 제가 할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열심히 했고 그로 인해 인정받고 여러 기회를 얻었지만 언제든 강의를 하지 않기 위해 회피하며 살아왔으니까요.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보다는 못해서 좋아하지 않거나 잘해서 좋아지는 경우가 훨씬 많더군요.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잘하는 건 아닐 때.
이걸 잘한다고 스스로 과대평가할 때 채용장면부터 일하는 과정에서 갈등은 시작되곤 합니다. 날 객관화 하는 건 물론이고 '잘'의 눈높이를 확인하고 맞추는 것이 중요한 이유죠.
그리고 이 '잘'의 기준은 내가 보고 배운 환경에 따라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잘'하고 싶다면 실제로 잘하는 사람들, 잘하는 기준이 높은 사람들, 잘해본 성공경험을 가진 조직에 나를 담아야 하는 거고요.
이제 해야 하는 일과 하기 싫은 일을 남겨두고 있네요.
여기까지 읽으며 구독자분들은 어떤 장면들이 떠오르세요? 혹은 작은 실마리를 찾아보셨는지요? 글이 길었지만 오늘 레터에서 저의 핵심 키워드를 골라 본다면 '보고 배운 것'입니다. 나는 뭘 보고 배웠는가, 그 주변에 누가 있었는가? 나의 보고 배운 '잘'은 '잘'인가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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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슬기
오늘의 밑줄: "날 객관화 하는 건 물론이고 '잘'의 눈높이를 확인하고 맞추는 것이 중요한 이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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