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의 어쩌면책』 팀 오브라이언
너는 상처와 가슴앓이와 죄악과 의심과 좌절과 절망의 세상을 맞게 될 거야. 그 말인즉 네가 살아 있게 된다는 거지. 너는 훌륭한 일들을 하게 될 거야, 난 알아, 하지만 너는 전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에 나쁜 짓도 하게 될 거고, 그래서 나는 늘 네 곁에서 용서를 베풀어줄 수 있으면 좋겠어. 그 이상으로 있잖니, 나는 네가 아빠를 용서해줄 날도 간절히 바라. 나는 좋든 싫든 내가 쓴 장편들과 단편들로 스스로를 정의해왔어. 내 인생 혹은 내 글쓰기를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야. 언젠가 네가 그 책들과 단편들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네가 그 책장 하나하나 속에서 내 넋, 내 최선의 자아, 너를 위해 되고 싶었던 사내를 발견했으면 좋겠어. 자음과 모음 사이의 꿈같은 공간에는 과거에 나였던 아이, 지금의 나라는 사내, 머잖아 내 모습이 될 노인, 이렇게 네 아버지의 목소리가 담겨 있거든.
나는 녀석의 살냄새를 맡고 있다. 살 냄새는—아기의 살은—냄새를 맡는 순간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것이 된다. 그 밖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이 오직 살냄새, 살인도 없고 타락도 없고 불행한 결말도 없이 오직 살 냄새, 그 밖의 모든 건 저 밖에 있으므로 아기의 살냄새는 어둠을 지우는 빛의 냄새다.
간혹 나는 호기 내지 엉뚱한 기분에 젖어 내 학생들에게 소설가라면 자기 이야기를 믿는 게 좋을 거라는 자신 없는 의견을 내곤 한다. 이야기를 믿는다면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하라고 나는 웅얼대는 소리로 말한다—주뼛거리지 말라고, "좋은" 부분을 뒤로 미루지 말라고, 넌지시 내비치거나 영리한 복선을 깔거나 대단한 이야기가 곧 펼쳐진다는 약속을 독자에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믿는다는 건 인간의 느닷없는 사건과 모순 속으로 머리부터 들이밀 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거라고. 이야기를 믿는다는 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겁니다. 이야기를 믿는다는 건 어느 문학 선배의 상상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을 믿는 겁니다.
소설 쓰기는 혼자서 하는 노력이다. 자신만의 우주를 빚는다. 망상을 취급한다. 불신을 일부러 접어두는 데 의존한다. (…) 아름다운 걸 만들어내려고 애쓴다. 플롯의 역동 하나하나가 과거와도 연결되고 미래와 연결되도록 통일성과 흐름을 추구하면서, 삶이라는 거대한 망상이 창조 또는 재창조되길 매 순간 바라면서 총체성을 갖추려고 애쓴다. 마술사는 "아브라카다브라"라고 말하는데, 그럼 실크 스카프는 색이 바뀐다. 허클베리 핀은 "이제 슬슬"이라고 말하는데, 그럼 당신은 시간을 초월해 그와 뗏목에 오르게 된다. 이런 말 딱히 해본 적 없는 당신의 아버지는 "용서하렴"이라고 말하는데, 그럼 당신은 그리하게 된다.
어느 정도나마 우리는 미래라는 불가사의 때문에 소설의 책장뿐 아니라 인생의 책장도 넘기지 않을 수 없는 거야. 짐승과 달리 우리는 내일을 이해해—우리에게 내일은 중요하잖니—그래서 우리는 우리 시간 중 상당 부분을 현재를 조정해서 미래를 빚는 데 사용하지, (…) 우리는 해피엔드라는 기적을 갈망해.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불가사의란다. 우리 중에서 자기가 하는 일을 왜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걸 왜 생각하는지 정말로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 이디스 워턴은 중편소설 「시금석 The Touchstone」에서 이렇게 말해. "우리는 지도에 없는 땅, 자기가 거주하려고 일군 몇 에이커의 땅에서 살듯 자기만의 영혼 속에서 삽니다. 인근의 자연에 관해 우리가 아는 건 고작 우리가 넓힌 경계만큼이지요."
소설의 기술은 항상은 아니지만 대개는 일어나지 않은 일, 적어도 현실 세계라 불리는 곳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과 연관되고, 그러면서도 인간의 감정적이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측면을 비춰. (…) 피카소가 직설적이고 명쾌한 말을 남겼지. "예술은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다." (…) 이야기의 "진실"은 과학적 방법으로는 입증되지 않을지 몰라도 자정을 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책장을 넘기는 독자 개개인의 마음과 위장과 눈물샘으로는 틀림없이 입증될 수 있어—이미 입증되었어.
아울러 작가가 되고 싶다면 이런 뻔한 사실을 유념해도 나쁠 것 없지. 작가는 반드시 써야 한다는 거. 이에 관해서라면 조지프 콘래드가 친구한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일과를 이렇게 적었어. "난 매일 아침 어김없이 자리에 앉는다네, 날마다 여덟 시간을—그렇게 앉아 있는 게 전부야."
독자들은 다른 사람의 책에 자신의 삶을 가져다 대입한단다. 언젠가 너희 중 누가 이야기를 쓰려고 자리에 앉잖니, 그럼 그 이야기 안에 독자의 기쁨과 두려움과 멀리 떠난 아버지가 들어설 공간을 남겨두는 게 너의 의무란 걸 부디 기억하렴. (…) 소설의 필수 목표는 설명을 안 하는 거야. 설명은 사실과 사실 간의 인간적 모순에 인위적이고 오만한 질서를 부여해. 소설의 필수 목표는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는 모든 것을—우리가 누군지, 왜 존재하는지를 말이야—포용하고 넓히고 심화하는 거고, 우리가 자궁에서 나와 빛을 보고 무덤으로 가는 우리의 보편적 여정을 잠을 설치며 함께 헤아렸던 것처럼 우리한테 밤늦은 동행을 제공하는 거야.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은 여느 경이로운 예술 작품이 그렇듯 인생의 모호함이라는 선물, 안내견 없는 참여라는 선물, 거대한 불확실성 한가운데서 찰나에 드러나는 명징함이라는 선물, 우리 자신의 인생처럼 마구잡이에다 애매하고 불운한 다른 이의 인생을 만난다는 선물을 우리한테 선사하지.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고 마땅히 말해야 했다. "아빠, 너무너무 사랑해요."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죽었다가 일어앉아 그 품으로 나를 안아줄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는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괜찮아, 네가 아빠 사랑하는 거 아빠도 알아."
어쩌면 역사는 그래서 존재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2000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주려고. 우리의 삶을 돌려주려고.
출생은 사형선고다. 우리는 이를 알면서도 알고 싶어 하질 않는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자신의 소설 『리스본의 밤』에서 이렇게 쓴다. "어찌하여 죽음은 우리가 지쳤을 때조차, 우리가 영겁에 대한 망상을 유지하려 애쓰는 그 한 시간조차 가만두질 못하고 그 손으로 우릴 자꾸만 잡아끄는가?
이야기에서나 현실 세계에서나 매번 제일 어려운 선택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야. 어떤 선택들은 이 소중한 가치와 저 소중한 가치 사이에 있지. (…) 나라면 그 상황에서 뭘 할까? 그런 다음 이렇게 물어봐. 나라면 그 상황에서 뭘 해야만 할까? (…) 너희는 선택을 해야 할 거야. (…) 이처럼 불가피하되 명확하지 않은 상황일 때 내가 매번 조언을 해줄 순 없을 테니까 그냥 지금 할게. 너희의 삶이 이야기인 척하렴. 그러니까 좋은 이야기를 쓰도록 해.
자신의 무지를 (부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 호기심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 위험도 자꾸 무릅쓰면서. 새로운 것과 시도되지 않은 것과 예상치 못한 것과 불가사의한 것 모두한테 열린 마음을 절대로 버리지 마. 누가 뭐라 하든 실패와 친해지고 말겠단 너희의 결의, 너희의 충만한 영혼, 스위스의 나무에 오르고 코네티컷의 부두에서 다이빙을 하겠단 너희의 열망을 꼭 붙들렴. 성취 같은 건 걱정하지 마. 유쾌함만 있으면 성취는 따라올 거야. 더욱이 너희는 이미 많은 걸 성취했잖니. 한때 더 이상은 없다고 믿던 사람에게 너희는 기쁨을 가져다주었지.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