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우산을 든 남녀가 손을 꼭 잡고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공원을 거닌다. 어둑칙칙한 주변풍경과 다르게 서로를 향하는 눈길이 따스하다.나도 이런 적이 있었나 기억을 거슬러 본다.
둘째 아이 출산 후, 남편이 다니던 직장이 폐업을 해서 남편이 자영업을 시작한 뒤론 내가 남편이 변했다고 투덜거렸고 -항상 지시를 받던 입장에서 지시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되니 성격이 바뀌어 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요즈음은 남편이 내게 변했다며 자길 사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린다.
1998년, 우리는 길거리에서 피부샵 설문조사를 계기로 만났다. 그 때 당시 남편은 피어리스 영업사원이었고, 나는 IMF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휴학 후 아르바이트로 집에 생활비를 보태고 있었다. 그는 부천 송내역 근처에서 간이테이블을 놓고 여성들의 피부고민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피부관리 1회 무료쿠폰을 준다는 그의 유혹에 넘어가 설문조사에 응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설문조사의 댓가로 받은 무료쿠폰을 들고 당당히 피어리스를 찾아갔다. 피부상담 후 피부관리사님에게 관리를 받고 내 피부에 꼭 필요한 제품들을 구매강권 받았다. 알바비를 몽땅 집에 생활비로 보태고 있는 판국에 내가 그 비싼 화장품 살 돈이 어디 있으랴? 설명만 듣고 미안한 마음으로 에스테틱을 나서려는데, 그가 나에게 자기의 첫 방문손님이라 감사한 마음에 과일주스를 대접하고 싶다며 삐삐번호를 알려달라는 것이다.
그가 내민 메모지에 내 삐삐번호를 적어주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그 때 나는 송내 로데오거리에 있는 팬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맞은 편에 작은 동네서점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그가 맞은 편 서점에서 책을 보는 척하며 나를 훔쳐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급히 서점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그가 싫지 않았던지 그런 그의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며칠 전 남편과 드라마를 보다가 그 때가 떠오르는 장면이 나오기에, 그 때 내가 너무 예뻐서 훔쳐봤냐고 물어봤더니, 남편 왈 ‘내가 미끼를 던진 것이지~!’ ‘그럼, 내가 미끼에 걸려든 거네?’ ‘그렇지! 니가 미끼를 확 문 것이지~!’ 두둥! 26년만에 그렇게 진실이 드러났다!
남편이 나한테 반해서 훔쳐본 줄로 알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해 왔던 그 장면이 그의 미끼였었다는....낚.였.다.
봄, 후리지아, 교정
감사의 뜻으로 과일주스를 대접하고 싶다던 그가 삐삐로 연락을 해 왔다. 각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여져 있고, 싱어가 그랜드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르던 카페 ‘샤넬’에서 만났다. 혼자서는 뻘쭘했는지 그는 친구 세분을 대동하고 나오셨다. 나는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라 앞머리 실핀으로 꽂아 올리고 반바지, 반소매 차림에 남방을 걸치고 나갔다.
그는 말을 참 잘했다. 이야기를 리드해가며 적절한 유머로 분위기를 꽃피웠다. 우리 부모님은 장남장녀로 책임감으로 똘똘 뭉치신 분들이라, 우리 가정엔 대화란 없다. 아빠의 지시사항과 자녀의 대답, 엄마의 잔소리만 있을 뿐. 그 집의 장녀인 나 역시 무뚝뚝하다. 대화 없는 가정과 나의 무뚝뚝함을 아는 나는, 이상형이 애교 많은 남자다. 그런 나는 이미 그의 화술에 넘어갔다.
며칠 뒤엔 군에 있는 쌍둥이 형이 휴가를 나왔다며 보여주겠다고 삐삐를 해왔다.호기심반 기대반에 쌍둥이 형, 친구들과 지난 번 만났던 카페 ‘샤넬’에서 만났고, 그의 친구가 다니던 회사에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어서 면접을 본 후 쌍둥이형과 셋이서 만났다.
그리고 노란 후리지아와 손바닥만한 상자 안에, 바이오캔디 하나하나에 리본을 붙여 만든 화이트데이 선물을 건네 받았다. 3월의 따스한 햇살아래 부천대학교 교정에서 노란 후리지아와 수줍게 웃던 그의 미소가 그 때 그 시절, 내 젊은 날 행복했던 봄의 기억이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동춘서커스
그리고 그 다음 그가 함께 가자며 내민 티켓은 다름아닌 ‘동춘서커스’였다. 부천지역 어딘가의 들판에 처진 천막 안에 무대가 차려져 있고 외발자전거 묘기와 마술공연 그리고 이어서 경품추첨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당첨되었다! 그런데 ‘제세공과금’만 내면 시계를 준다는 것이다.
- `응답하라 1994‘에서 삼천포(김성균역)가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순금시계를 단돈3만원에 주는 대박기회에 당첨되어 기뻐하며 시계를 구매했는데, 손목에 차고 보니 금색가루가 묻어났었던 에피소드처럼 -
하지만 다행히 우리는 금시계에 관심이 없었고 더욱이 제세공과금을 내면서까지 가지고 싶지는 않아서 경품을 타러 가진 않았다. 그 어설픈 무대와 천막 속에서도 팔꿈치가 살짝씩 닿을때마다 설렜다. 그리고 그가 나를 바래다 주는 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 첫 입맞춤을 했다.
*글쓴이_김경애
아이와 열심히 성장하는 주부로 집밖의 일을 탐색하고 있다. 그림 감상과 글쓰기 전시 나들이로 깨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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