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에세이

박숙현_Spring

인생의 봄찾기_유승희

2024.07.24 | 조회 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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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드 까뮤

그림과 글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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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a spring

Happiness in your recollection doesn’t disappear. It becomes a spring, a stream and the sea. s it was in the beginning, is now and will be tomorrow.

기억 속에 남은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기쁨은 샘이었다가 시내가 되고 바다가 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_Lucy Montgomery 캐나다 소설가

Spring은 봄이다. Lucy Montgomery의 아름다운 명언 속에서의 springa를 데리고 이다. 그림을 그리던 내성적인 소녀의 취미는 미술대회를 알리는 신문을 오려 붙여 두고 엄마 아빠에게 함께 갈 것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조용한 사람들의 묵직한 한마디는 청중으로 하여금 그 일이 큰 무엇이란 것을 일깨우는 화법이다. 나는 어린시절 그 화법을 썻 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러한 화법은 일상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10년 넘게 하고 있는 강의와 강연을 할 때 유용하게 쓰인다. 강약을 활용한 음의 높낮이 소리의 크기를 활용하는 방법이다.

부모님께 중시 여기셨던 것들이 가족 여행과 독서, 미술관에 함께 가는 것이었다. 늘 삼남매와 함께 이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날 미술대회는 왠일인지 아버지와 나의 둘만의 시간이었다. 어색함이 계속되어 지금의 나라면 아버지께 말을 많이 걸지 않았을까 예상해보지만 그때의 나는 내성적이라 말을 하지 않고 가만 있어도 원래 그런 아이라 편했다.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던 때를 존중 받던 시절도 있었다. 조용히 화구를 챙겨 이젤을 펼치고 대회에 참가한 몇시간을 아버지는 묵묵히 기다려 주셨다. 미술대회에 심사위원분과 아시던 사이라며 인사한 기억, 이야기 나누시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걸 그리는 건 어떠니 저건 어떠니 소리는 일절 하지 않으셨다. 내 생각의 그림과 일치하지 못해 속상함을 가졌지만 그때의 내성적인 나는 그 이야기를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두었다.

대회를 마치고 아버지는 밝은 황토색과 노르스름한 조명이 있던 일식집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요리사 분이 접시에 한점 한점 올려 주시던 초밥. 어릴 때부터 입이 짧던 내가 남기지 않고 잘 먹던 음식이어서 데리고 가신 걸까? 격식이 갖춰진 곳이었고, 언니 동생을 두고 외동처럼 혼자 먹는 비밀 식사 같았다. 아버지는 그런 시간을 선물해 주실 줄 아는 ''이 있는 분이다. 교토에 방문할 때마다 126천명의 코와 귀가 잘린 조선 백성의 아픈 귀무덤을 말없이 둘러보시며 마음속으로 '한국의 물건을 한국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을 지닌 사람. 강연을 위한 자료 속에 Lucy Montgomery의 위 글귀가 있었는데, 영어 강연 하루 전날 아버지와의 통화에서 아버지는 나를 그림을 그린 작가와의 식사자리로 대우해주신 것이란 걸 듣게 되었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끊고, 수십년이 지나 알게 된 아버지의 마음을 듣고 엉엉 울었다.

다소 어색했지만 행복했던 나와 아버지의 '처음의 시간'이었다. 그 처음의 시간은 Lucy Montgomery‘It becomes a spring, a stream and the sea. 그 기쁨은 샘이었다가 시내가 되고 바다가 된다.’ 그 샘의 ‘a spring’ 이었다. 학부모님들 상담에서 늘 1:1 한 아이만을 위한 시간을 강조한다. (아이가 둘 일경우, 양육자1A: 아이1A, 양육자1B:아이1B 이렇게 따로 시간을 보내고 전체 가족시간을 갖는다. 양육자가 1명일 경우도 꼭 따로 A, B 아이와 1:1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미국의 중산층 지인 부부의 교육에서 한 양육자 대 한 아이의 시간을 주1회 최저3시간으로 따로 가지의 긍정적인 교육 효과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꿈이 없다는 10대 학생들의 대답을 들을 때에는 내 눈 옆으로 물음표와 느낌표가 백 개 떠오른다. 꿈과 목표가 없는 삶이 얼마나 재미가 없을지, ‘그저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3개월의 번아웃에서 나도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매해 늘 그렇듯 봄이 되면 개나리의 청량한 노란색을 기다리며 기쁨을 만끽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 10대 중반부터 말미까지 6년의 세월을 지나고나서 다시 나의 미래 직업을 위해서 과를 선택하고, 그 안에서 나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무언가를 채워 나갔다. 지금도 나는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이 설령 뻘짓이라고 냉대받더라도 나는 그것을 가치 있는 시간으로 대한다.

나는 늘 그림과 그 외 예술 분야를 사랑하고, 어른이 되어 홀로 전시회를 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며, 나의 커리어를 남편을 따라간 어느 장소 든 상관 않고 다른 새로운 길로 파생해 나가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나보다 더 큰 사람으로 자라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인문학을 사랑하고 다국어 하는 영어 교육자라는 나에 대한 정의를 확립해 나갔고, 이 화폭의 봄처럼 나의 겨울을 즐겁게 보내는 중이다. 나의 또 다른 봄을 위해서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계속된다. 놀며 쉬며 나를 공부해 나가는 시간. 이 얼마나 행복 한 가. 고통을 즐겨라 라는 슬로건은 이제 나에게 행복을 제대로 즐겨라 라는 말로 대신해 본다.

 

봄을 닮은 사람들

현재 변호사가 된 대학 기숙사 생활을 함께 한 법대동생은 과거의 나를 기억하고 20년이 지난 어느 날 만나 그때의 내 모습을 말해주었다. 영어를 왜 해야 하는 것인지, 영어의 쓰임이 생각보다 무궁무진한 점, 언어는 시간을 들인 만큼 보상되는 것이라서 단숨에 하기는 어렵다는 당부도 늘 잊지 않았단다. 두터운 RC, LC 파랑 빨강 TOEIC 책 두 권이 꽂혀 있던, 맞은편 다른 학과 동생에게 한학기동안 단 한번도 펼쳐지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무료로 수업해주겠다는 날라리 언니가 신기했단다. 어느 날은 밤새 외국인 교환학생 친구들과 파티하고 들어와 쪽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말쑥하게 차려 입고 수업을 가는가 하면, 옆자리 책상(법대동생은 내 옆 책상을 썼다. 4인 기숙사로 책상4, 2층침대 2개가 있었다.)에 앉아 10대의 부모님 과의 대화를 틈틈이 꺼내 보여주며 웃고 우는 나를 보며, 자신의 긍정적인 해석을 넣어 부모님 사랑을 밝게 품고 자라난 사람의 기운은 저런 것 이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했다. 뭐든 하는 만큼 분명히 보상이 있을 것이라며, ‘노력은 배신자와 친구가 아니야. 고통은 즐겨야 제 맛.’ 등등 이상한 말을 늘어놓기 일쑤였지만, 용돈벌이를 위한 영어과외와 교내 활동 외에도 영어의 쓰임이 생기는 학교 밖 이력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던 모습이 신기했다고 했다.

잠을 줄여서 놀던 모습이 법대 친구들과 다른 카테고리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저 그때의 나는 오늘의 대나무통 주 값과 큰 음악소리 속에 덩실거림(클럽), 미래 직업의 목표(부모님으로 부터의 독립)를 위해 바쁘던 나였을 뿐이었다. 그저 그런 나를 좋은 말로 포장해 20년 뒤 선물처럼 풀어준 동생은 분명 직업의 한계를 벗어나 따듯함을 품은 좋은 변호사로 커갈 것이다.

다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연락을 따로 하지 않아도, 개인 SNS에 가끔 올라오던 힙합가사 사진들과 드문드문 올라오는 하와이 사진들도 인상깊게 보고 있었다. 후에 들은 그 하와이가 괴짜스럽게 영어에 미쳐 있었던 룸메이트 언니인 나로 인해 영어를 시작하여, 사법연수 하나의 기회로 얻은 것이란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나를 통해 영어가 동기부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엄한 공무원 부모님 슬하에 근면성실하고 모난 기억이 없는 원만한 성격의 그 여동생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집 사람이 되면 정말 다치지 않게 잘해줄 수 있어.’라는 야망을 품고, 서울에서 사업에 미쳐 있던 남동생의 짝으로 추천하기도 하였다. 언제나 그렇듯 상상력을 총 동원하여 잠시 단 꿈을 꾸었으나, 인연이 되지는 못했다. 지금은 같은 직업의 변호사와 결혼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방구석 봄 찾기

10대의 기억에서 내가 선택한 그때의 슬로건은 고통을 즐겨라.’ 였다. 어차피 겪어 나갈 시간은 흐를 테니,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을 나이기에 그 말을 항상 되 뇌였다. 인생의 봄이라는 단어에서 겨울은 왜 나쁜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늘 나에게 봄이다.’ 속삭이게 하는 개나리의 노란색을 그리며, 어둠이 이르게 찾아오는 겨울을 나는 애정 한다. 1월 겨울 코 끝으로 온전히 차가운 찰나를 간직하고 태어나서 일까. 인간이 태어나 25년 정도 배운 것으로 평생 먹고 산다는 이야기를 세기며, 대학생까지의 시절을 바삐 보냈다. 엄마에게 전화해 용돈을 부치지 않았다며 짜증을 내던 대학 친구들을 보고 크게 충격 받았다. 그 친구들을 서서히 꼬여내 아르바이트를 하도록 했다. 기업체를 들어가기 위해 비교적 관문이 넓을 것 같던 경제학과에 들어온 친구들이니 함께 돈의 흐름을 같이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대학생은 벼슬이 아니며. 스무살을 건너 이제는 성인이지 않는가 라는 꼰대 소리를 그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 하기전까지 했다. 토익 공부도 미리미리 하기를 추천했고 어느 문제든 나에게 들고온다면 과외비를 받지 않고 알려주겠다 하였다.

과외로 용돈을 벌기 시작한 대학생이었기에, 돈을 쓰지 않고 하루를 방구석에서 즐겁게 보내는 방법을 늘 연구했다. 현재도 평소 가까운 지인들에게 말하는 방구석 행복 찾기의 시작이 바로 그때 인듯하다. 방 구석진 곳에서 스스로와의 시간을 보내는 아날로그 방식은 날개를 펼칠 기회를 기다리며, 아름답고 고혹 스럽게 자신을 빚어 놓는 시간이다. 돈을 써서 느끼는 행복의 시간은 예상외로 그리 오래가지 않다는 걸 느껴보았다. 10대의 긴 터널 덕분에 대학생의 시절은, 그토록 갈망했던 소속감을 느끼며 친구들과 노는 시간, 미래를 위한 안과 밖에서 공부할 수 있던 아주 밝고 값진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이 현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도 계속 잘 유지되고 있다. 목표를 무한대로 높게 펼쳐 두지 않아, 천천히 이뤄 나갔으며, 한 목표를 이루고 나면 다음 목표가 꾸준히 나를 기다려 주는 걸 안다. 좌절하는 일들을 계속 겪어 나가면서도 온실 속 나를 바꾸게 하는 교훈을 찾아 나가기를 멈추지 않을 나를 신뢰한다. 물론 중간마다 멈춰 서서 꽃도 보고 풀도 만지작 거리면서.

 

 

글쓴이: 유승희

예술을 사랑하고 그에 필요한 여러 언어를 공부해 나가고 있는 영어교육자 이자 영어교육강연자. 현재 영어 강의를 대학교, 어학원, 개인공간에서 16년째 하고 있다. 영어강연으로 영어를 배우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을 위한 영어권 국가의 사고를 알려드리는 부모교육 <여러언어를 하는 영어강사의 육아이야기>,영어 및 다른 언어들을 배워가는데 중요한 방법을 알려드리고 영어동기부여, 영어 공부법을 알려드리는 <영어, 행복하게 만나다>를 하고 향후 강연도 기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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