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湖泊)의 새벽점
호박(湖泊)으로 다다를 때
호수의 싱거움을 잃어갈 때
나비 가운데가슴에 있는
한 쌍의 막모양 날개의 태엽을 돌려
어느 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순결한 황무지의 새벽점을 찍는다.
-료.2024.05.20.
바나의 슈거 포인트와 루나 게이트웨이를 떠다니는 잠수부 오리와 개구리
수면 위로 잘 익어가던 바나를 만나게 된다. 순결한 시간의 한계점을 넘어 여울을 따라 바나는 갈색점 무뉫병에 걸린다. 슈거 포인트라 불리는 이 병을 막기 위해서는 공기를 차단해야 한다. 덜 외롭고 싶은 바나는 솔직하게 살아가지 않는 방법을 터득해나간다. 야심찬 슈거 포인트가 껴안을수록 바나는 어쩔 수 없이 숨을 들이켜야만 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소멸 직전의 고요함을 뱉어낸다. 결정의 세계에 덫을 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잡히면 찢어지고, 부서질 것처럼 나약해 보이는 예감을 적중이라도 하듯 그들 존재의 인과관계는 미약하다.
그 정거장을 떠다니는 오리들은 개구리 기침의 빛깔로 뿜어낸다. 위로하며 추상하는 것도 루나 게이트웨이로 빨려 들어가 헤엄칠 물갈퀴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찾아나가는 너는 간단히 명료한다. 개구리의 명언을 잡아먹는 나의 글자들로 손을 모은다. 기대의 소리를 지르며 흐트러짐이 없는 날개들은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어수선하게 박수를 치는 흔적들을 나타낸다.
그들은 호박으로 나와 물갈퀴를 신은 잠수부들처럼 털버덕털버덕하며 마라의 죽음에도 호기심을 가지지 않는다. 호수에 비친 달 아래로 석채가 무수히 쏟아지는 것을 받아내며 제일 먼저 알아봐 준 그 오리에게 본능적으로 몰두하게 된다. 내리지 않는 비를 맞는 고민은 무심결에 존재한다. 소낙비라도 맞은 것처럼 모든 것을 적시고 받아들인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 것의 빛은 한 물체를 돌가루처럼 잘게 부스러뜨려 색점을 반사시켜 맑고 투명하고 찬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낀다. 황홀한 색모래의 정원에 돌가루를 뿌리는 삶을 살아온 색점들은 그 두근거림에 긴박하게 퍼져나간다. 환호와 박수의 소음을 잡아내는 각자의 날개의 색점들로 국경을 오가며 날개맥으로 관통한다.
그 일상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스마일은 어느 때와 다름없이 어디로든 날아가 꿀을 빨러 갈 것이다. 본체의 김밥을 돌돌 말아 썰어도, 썰어도 스마일은 계속 웃는다. 생산적인 나비들은 썰어진 스마일처럼 다시 태어난다. 돌가루들의 색점을 주워 텅 빈 그릇에 담아낸다. 망토를 걸친 나비는 두 팔 벌려 꺼내지 못한 것들의 이상적 디스토피아 석채 은하를 마주한다.
<쉼>, 체류자의 낙화봉
회화의 <쉼> 체류자 박숙현 작가의 내면의 무대에서 색점 파동들의 무수한 인연들을 알아간다.
평범이라는 것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예술에 익숙해져 있는 그들은 평범한 가? 평범하지 않으려 진화하는 것을 창조라 대답한다. 가상 예술의 잔상이 그려진 매체에 따라 설계해진 그녀의 몸으로 공허함도 함께 탑승시켜 여행을 떠나본다. 어떠한 것에도 익숙하지 않고, 불완전한 것을 체류하는 그녀의 은박 비늘을 따라 내 몸을 그 사이에 누워 한지를 펼친다. 그것은 실존하는 것인가. 사라지지 않을 힘의 위기를 강제적으로 장착시키는 것인가. 헤매었지만, 여전히 거대한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슈필라움의 티켓을 상징하는 그녀의 관대함에 내 마음은 작아지도록 어수선해진다.
불확실한 미래를 지속한다. 세계는 바나의 슈거 포인트처럼 무수한 점을 찍어나간다. 기억의 서사에 따라 파생되는 엘랑비탈의 소음에 빠지지 않는 것이 욕망 기계의 철학이다. 호수의 새벽점을 떨어뜨린 바나의 부유한 세계가 나를 초대한다.
윤이 나는 아이
부유한 생물들이 떠도는 그곳에서 낙화봉을 태운다. 그 세계의 낙화봉은 두 사람이 양 끝을 잡고 꼬아야하기 때문에 혼자서 만들 수 없다고 한다. 쑥 냄새와 톡톡 튀는 소리의 소금을 터뜨리며 소박한 정성을 빌며 소망한다. 이따금 사금파리 가루와 목화솜을 넣어 만든 낙화봉을 줄에 매달아 불을 붙인다. 낙화 소리와 함께 꽃불이 빙글빙글 돌며 흘러내린다. 그렇게 사라져간다. 윤슬이 비치는 호수에서 천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조직마저 끈끈한 한지처럼 유난히 곱고 강한 힘을 가진 그녀는 윤이 나는 아이를 바라본다. 그 빛의 쉼에서 극장을 떠나도 영화의 삶을 계속되듯이 미술관을 떠나도 그녀의 작품 세계는 끝이 없다.
*호박湖泊: 호수 가운데에, 수면 위로 드러나 있는 땅.
*바나: 료가 부르는 바나나의 애칭.
*여울 : 강이나 바다 따위의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
*루나 게이트웨이(Lunar Orbital Platform-Gateway) 달 궤도에 설치되는 국제우주정거장을 지칭하는 단어로 국제적인 유인 달 탐사 프로젝트인 ‘아르테미스 계획(Artemis Program)’의 일환이다. ‘아르테미스 계획’은 2025년까지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고 2028년까지 달에 거주가 가능한 유인 우주기지를 건설하는 것으로 달을 거점으로 화성 등 심우주(중력이나 자기장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우주공간) 탐사가 목표다.
*⟪마라의 죽음⟫(프랑스어: La Mort de Marat)은 자크루이 다비드가 살해된 프랑스 혁명가인 장폴 마라를 그린 그림이다.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한 프랑스 혁명의 그림 중 하나이다. 다비드는 몽테뉴이자 프랑스의 선도적인 화가였다. 이 작품은 샤를로트 코르데에 의해 살해된 후 1793년 7월 13일 욕조에서 죽은 채로 누워있는 마라를 묘사한다.
*석채: 돌가루에서 나오는 다양한 색채
*날개맥: 가운데가슴·뒷가슴에는 각각 한 쌍의 막모양 날개가 있고 이것을 지탱하는 속이 빈 맥이 그 가운데를 지나는 것, 그 양상을 맥상(脈相)이라 한다.
*슈필라움(Spiel + Raum): 독일어 ‘놀이(Spiel)’ 와 공간(Raum)’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여유 공간’ ‘놀이공간’을 뜻한다.
*앙리 루이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모든 생명계, 인간의 삶은 진화한다. 이 진화는 내적 충동력인 엘랑비탈(elan vital), 곧 생명의 비약에 의해 이루어지는 창조적 진화이다.”
*들뢰즈의 욕망 기계: 들뢰즈는, 그것이 현상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장에서 배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기계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게 되면 인지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모든 개체는 ‘욕망하는 개체’라는 말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욕망이란 ‘부족함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단어가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뜻하고 있다.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개체는 다른 개체와 어떤 형태의 차이를 생성하고 싶은 의욕, 즉 욕망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란 차이를 생성하려는 의욕을 가진 개체인 것이다.
*글쓴이 - 료
글/ 도서관/ 미술관에 곁들어 살고 있다.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다. 예술에 대한 욕구가 차오르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질주하는 본능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 것 같다. 그렇게 멍 때리기를 반복하다가 얻어걸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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