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취타 초상, 조류의 홈런
"대취타(大吹打)는 ‘크게 불고 두드린다’는 뜻으로, 왕이 궁 밖으로 거동 할 때나 군대가 행진 할 때 연주하던 행진곡이다. 커다란 소라로 만든 나각과 금속으로 만든 나발 등 한 음정만 내는 관악기와 징, 자바라, 용고와 같은 타악기가 중심이 되는데, 태평소가 가락을 연주한다. 지휘자 역할을 하는 등채의 구호에 따라 음악을 시작하고 마친다. 태평소의 자유로운 가락과 나각 및 나발의 호령하는 듯한 음색 그리고 타악기의 울림이 어우러져서 장쾌하고 드높은 기상을 나타낸다."
대취타의 집단 초상화
두 다리가 얼어붙은 겨울
낱낱의 장들이 찬연한 쪽으로
가만히 기억에 다시 되돌아올 때
소멸하기 전 태양으로
물방울들이 가득한 글자들로 솟구쳐 튀어 날아올라
나각들을 불고 행진하는 대취타
커다란 소라 껍데기로 만든 나각은 낮고 부드러운 한 음만 호방하게 불려낸다.
달빛이 군침을 뚝뚝 흘리듯
빛발들이 줄줄 새어 흐르는 밤사이 그것들을 기록했다.
대취타의 집단 초상화의 울림은
"명금일하대취타하랍신다"라고 호령하면,
징 한번 때리고,
용고의 가장자리를 두 번 '탁탁'치면
다 함께 연주를 시작한다.
그것들은 늘 한결같지 않은 나였으며 슬프기도 꿈을 꾸기도 모두 그저 알지 못하는 기억 속으로 깊이 잠겨 행진했다. 낯선 지혜는 기어코 두려운 기억을 찾아내었다. 물기도 없이 젖는 기분으로 노를 저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모두 연주하였다. 그 길로 높이 날아가는 조류의 편지들을 부르는 나각 소리가 울려온다. 온 힘을 다해 물장구치던 해색의 커튼에 떠돌며 그 장면들로 빠뜨린다.
집사가 등채를 들고, ‘허라금(喧譁禁)’을 외치면, 연주를 마치게 된다.
노마드(Nomad)의 피자 보트
오래된 일기장을 읽는 것이 요즘 취미가 되었다. 나를 들춰보는 것은 그 공간의 나에 대한 기대인 것인지, 그리움인 것인지, 후회인 건인지 겁에 질린 것처럼 알지 못한다.
봄이 오고 나서부터 꽃가루와 미세먼지로 알레르기가 터졌다. 이미 피부에는 두드러기가 여기저기 피어 올라왔다. 눈까지 가려워서 정말 너덜너덜한 상태가 돼버렸다. 이 세상의 가려움은 흘러내리는 눈물의 조류가 되어 내 심장이 썩어가지 않게 소멸하는 태양으로 날아가 태워버리고 싶다. 한마디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울려버리고 싶다는 이야기이다. 그다음은 햇살에 중독된 사람처럼 달려가 한 줌의 모래처럼 스윽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지중해 어느 가장자리에 걸쳐져 둥둥 떠다니며 피자 보트나 기다리며 있는 것이 사실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나각: 소라 껍데기로 만들었다. 큰 대왕 소라의 속살을 빼내고, 껍데기의 꼭지 부분에 구멍을 내어 나발과 같이 입술의 진동으로 소리를 낸다.
*해색(海色): 바다의 경치.
*취타대를 이끄는 사람은 '집사'라고 하여, '등채'라고 부르는 막대를 잡고 취타대를 총괄한다. 대취타를 시작할 때는 '명금일하 대취타(鳴金一下 大吹打) 하랍신다' 라고 집사가 운율을 넣어 소리친 후, 각 악사들이 '예이' 하고 명을 받든다. 그 외에도 집사가 "명금일하 대-취-타!" 라고 구령을 넣은 다음 바로 연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 후 징을 한 번 울린 후 용고가 '따닥 딱' 하고 변죽을 두드린 후에 연주를 시작한다. 반면, 대취타의 연주를 마칠 경우에는 집사가 다시 등채를 들고 '허라금(喧譁禁)' 혹은 금하라로 외쳐 곡을 마친다.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그치라는 뜻으로, 본래 훤화금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노마드’는 ‘유목민’이란 라틴어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1968)에서 ‘노마디즘(nomad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데서 유래하였다. 유목민은 원래 중앙아시아, 몽골, 사하라 등 건조·사막 지대에서 목축을 업으로 삼아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사람들을 말하지만, 현대의 유목민은 디지털 기기를 들고 다니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또한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자리에 앉아서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지향하는 사람을 뜻한다.
*글쓴이 - 료
글/ 도서관/ 미술관에 곁들어 살고 있다.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많다. 예술에 대한 욕구가 차오르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질주하는 본능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 것 같다. 그렇게 멍 때리기를 반복하다가 얻어걸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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