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앞둔 금요일. 오전부터 예민하다. 모처럼 찾아 온 긴 휴식의 기간이라 기뻐서 춤을 출 만도 한데 왜 이토록 신경이 곤두선 걸까 생각해봐도 이유는 대범하지 못한 나 때문이다.
서울에 혼자 거주 중인 나는 얼마간 엄마가 계신 집에 갈 요량으로 짐을 챙기면서 쓸데없는(?) 걱정들의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한 주 동안 뭐 주문한 게 없으니 택배 박스가 현관 앞에 쌓일 일은 없을 거고, 지난번처럼 갑자기 집을 비운 사이 전력차단기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겠지? 혹시 모르니까 콘센트는 다 뽑자, 오케이, 창문도 닫고, 재활용 쓰레기도 치우고, 나머지 자잘한 문제들은 연휴 동안 체크해서 하나씩 해결하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겸허하게 "출근"을 외쳤는데 위층 거주자가 현관문을 닫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열었던 현관문을 다시 닫고 기다렸다가 나오는 바람에 마을버스를 탈 시간을 놓쳤다. 택시를 부르고 3분 뒤에 도착할 거라는 알람을 보고 안도했는데 1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다가 이내 도착했다. 골목길을 헤매다가 도착한 것이다.
현재 내가 거주 중인 집은 비좁은 골목길 그중에서도 막다른 길에 위치해 있다. 조금 상황이 좋은 길에서 택시를 부른 것이지만, 어쨌든 여차 하면 얼마든지 헤맬 수 있는 동네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애초에 늦은 내가 잘못이다. 그냥 현관문을 처음 열었을 때 누군가와 마주치더라도 걸어 나왔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핸들을 잡고 계신 택시 기사님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닐 텐데, 시간에 쫓기는 마음은 나도 싫은데, 이런 마음으로 타인을 독촉한 것 같아 마음이 더 불편해서 기사님의 등 뒤에서 조용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해진 운명처럼 회사 앞에 늦게 도착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사무실로 올라갔다. 바쁘게 일을 하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우체국 집배원 / 맨날 전화 옴. 저장해 둔 문구가 액정에 떴다. 나는 꽤 오랜 시간 같은 동네에서 세 번의 이사를 했다. 2가에서 3가로 3가에서 1가로 맴도는 그런 느낌처럼 이사를 해서 그랬는지 우체국 등기를 받아야 할 일이 생기면 늘 집 앞에 똑같은 집배원 분이 찾아왔다. 종일 근무를 해야 하는 날들이 많아서 집으로 온 등기들은 늘 반송이 되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그러한 처지에 앞서 집배원 분과 통화해야 하는 절차를 늘 거쳐야 했다.
"제가 직접 찾아갈게요. 우체국에 맡겨주세요. 낮에는 일을 해서요. 다음에는 문자로 부탁 드릴게요." 몇 번을 말해봤지만 그 역시 통화 한 통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일 처리 방법이어서 그랬는지 몇 해째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 예, OOO 이 건물 OOO호, 맞죠? 그 어디 병원에서 건강검진 안내 우편물이 왔는데요." 나는 언제나처럼 우체국에 맡겨달라고 말했다. 연휴가 끝나면 찾아가겠다고 말하니 집배원 분이 아까와 같이 큰 목소리로 건물이 다 울리도록 이야기했다. "아, 연휴 끝나고 찾아갈 테니 우체국에 맡기라고요? 현관 앞에 놓지 말고요?"
기운이 다 빠진 채로 전화를 끊었다. 구옥이라 바깥의 소음이 안으로 다 들어오는 구조인데. 남들이 다 들었겠지. 그래. 그럼 뭐 어때. 그걸 그분이 알았을 리 없는데. 괜찮아. 찝찝하면 내가 이사 가면 돼.
나는 왜 이렇게 조심성이 많은 걸까. 무엇을 위해 이렇게 많은 조심을 하고 사는 걸까. 단순히 성향탓이라 생각하고 조금 더 부지런해지면 되는 것일까. 내가 눈치를 보고 상처를 잘 입는 만큼 염치 있게 살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굳건해진다. 그런데 애써 공격의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나를 드러내는 행위 하나만으로도 그 모든 공격이 타인에게 가해질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조심해지는 나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보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모를 때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명절을 맞이하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위하는 진심 없이 던져지는 친인척의 질문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명절이 왔다. 직접 얼굴을 볼 일이 없어도 통화로, 문자로, 거쳐서 언제든 공격이 들어올 수 있다.
"대학은? 취업은? 직장은? 연애는? 결혼은? 아이는?"
"..."
이 모든 물음표 이전에 놓친 것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심지어 나조차도. 주술 관계의 균형이 맞지 않는 질문에 불쾌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불쾌하다면 내가 아직 이런 나여도 괜찮다는 격려를 스스로에게 못해주는 상황일 것이다.
왜 몇몇 인간들은 타인의 결핍(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부분일 수 있는데)을 들추면서 자신이 자랑하고 싶은 부분을 펼쳐 보이는 걸까. 이번 명절에는 이상한 쪽으로 뻗어가는 에너지를 도로 가져와 마음에 심어두고 아래 두 책을 마저 읽을 계획이다.
자기 인생에 흥미를 잃어버려 성취에 집착하다보면 타인의 인생을 두고 불쑥 무례한 평가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이기듯 이루려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애써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너그러운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싶다.
'내게 남은 대책'은 만물박사 김민지가 완독한 좋은 책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2021년 9월 30일까지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시는 분들 가운데 해당 레터 하단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들 중 한 분을 추첨하여 소개된 책 한 권을 선물로 드립니다. 메일 답장으로 참여해주셔도 좋아요. (답장 보낼 곳: something.text@gmail.com) 이전에 예고했던 내용과 다르게 보다 많은 분들이 좋은 책을 접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코너 역시 무료로 진행하게 되었어요. 새 책은 아니지만 최대한 깨끗하게 읽었던 책이 대부분일 거예요. 앞으로 소개될 책들 기대해주시고 많은 참여 부탁 드려요. 기존의 레터도 열심히 써서 보내겠습니다.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댓글 2개
의견을 남겨주세요
eddy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만물박사 김민지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