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높이, 바로 위 높이

그 전에 살아 도움닫기

2026.04.14 | 조회 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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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을 좋아합니다. 떡볶이, 튀김, 순대, 김밥, 어묵, 떡꼬치, 붕어빵보통 때도 맛있지만, 멘탈이 갈린 날 먹으면 특히나 맛있습니다.

왜 그럴까. 분식이라는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그런 날과 퍽 어울릴 수밖에 없다고 느껴집니다.

가루 분. 먹을 식. 가루로 만든 음식.

기반이 가루이며, 그 가루가 물을 먹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 그 지점이 분식을 찾는 제 하루 운세와 닮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분식. 오늘날 분식은 꼭 밀가루로 만든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음식. 길거리 음식을 아우르는 말로도 쓰입니다.

열량 대비 영양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포만감 하나는 끝내준다는 점은 높이 삽니다. 그 장점을 극대화하기 좋은 최상의 입지는 바로 학교 앞.

얼마 전 동네 학교 앞 분식점에 갔습니다. 방과 후 속셈학원과 태권도장을 다녀온 듯한 두 아이가 나란히 서서 떡볶이 한 그릇을 나눠 먹고 있었습니다. 중학생 누나와 초등학생 동생. 우물우물 볼 안쪽 떡을 씹으며 메뉴판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더군요.

떡볶이 얼마, 컵볶이 얼마. 요즘 비싸다. 그래도 여기 정도면 저렴한 편이다. 대화 끝 나란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컵 안에 든 어묵 국물을 홀짝이며 들이키고는 쓰레기통을 찾아 입가를 닦던 냅킨을 버렸습니다. 사장님께 잘 먹었습니다인사하고 자리를 뜨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경쾌했습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바라본 분식집 한쪽 벽면. 그곳을 다녀간 아이들이 남긴 메모가 한가득 붙어 있었습니다. 사장님 착해요. 사장님 아프지 마세요. 사장님 맛있어요. 학교 앞 분식 너무 좋아요. 떡볶이 맛있어요. 하트. 똥강아지가 인정하는 맛집. 느낌표 두 개. 귀여운 낙서들.

어느덧 찾아와 곧 떠날 봄. 어쩌면 마지막 붕어빵을 주문하고 서 있는데 갑자기 사장님이 컵볶이를 내미셨습니다. 주문할 때 가게 앞으로 버스가 요란하게 지나갔는데 아마도 그 바람에 분식점 사장님이 잘못 들으시고는 컵볶이와 붕어빵을 준비해 주신 듯했습니다. 잠시 당황하다가 엉겁결에 모든 값을 치르고 두 손 가득 분식을 들고 나왔습니다.

집에 온 저는 혈당 스파이크에 멍해지는 몸을 뒤척이며 침대 근처에 두고 사는 책 속에서 다음 문장을 만났습니다.  

  • 구름은 얼마나 높이 있어, 라이너스? 
  • 아, 구름마다 각각 달라…. 어떤 것은 ‘아득히 높이’에 있고 어떤 건 ‘바로 위 높이’에 있지.
  • 설명이 그게 뭐야?
  • 때로는 비전문적 언어를 고수하는 게 가장 좋은 법이거든!

피너츠의 세 인물. 샐리의 질문과 라이너스의 답변, 찰리의 반문과 라이너의 답변으로 이어진 짤막한 대화에서 요즘 제게 필요했던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설명보다는 느껴지는 대로 표현하는 것. 한동안 그러한 일에서 멀어졌고 그 때문에 기분 좋은 긴장감을 못 느끼고 지냈다는 것을 자각한 봄입니다.

이 봄, 가능하다면 떨어지는 꽃잎 하나 잡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떨어진 꽃잎을 주워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올봄, 창밖에서 제 팔 안쪽으로 날아온 벚꽃잎
올봄, 창밖에서 제 팔 안쪽으로 날아온 벚꽃잎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교 앞 분식집 벽에 붙어 있던 메모들. 신속 정확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주린 배를 채워주는 사소한 일들. 생활에 밀착한 시시콜콜한 일을 다시금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메일을 띄웁니다.

새 책 출간 및 북토크 소식 ✨

“오래도록 내가 바라던 삶은 그 자체로 발판이 된 시간”
“오래도록 내가 바라던 삶은 그 자체로 발판이 된 시간”

추신, 이달 출판사 결에서 새 책을 펴냈습니다. 살아 도움닫기라는 산문집입니다.

표지 그림은 이코즈 작가님의 작품입니다. “계곡 풍경을 바라보는 한 소외된 아이의 시선을 담은“ 이코즈 작가님의 ”꿈일지 속 한 구절에서 시작”된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제각자 따로 시작한 글과 그림이 한 몸으로 엮인 책이지만, 모든 요소가 맞닿는 감각도 가능한 재미도 있는 책입니다. 자세한 책 내용은 위의 이미지를 눌러 살펴봐 주세요.

418일 이번 주 토요일에 북토크를 합니다. 책보다 앞장서서 말하는 게 여간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어색해도 반가움이 더 큰 자리이기에 말씀 전합니다.

그간 책을 읽어주신 분, 앞으로 책을 읽어주실 분, 지금 이 레터를 읽고 계신 분과 함께 모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레터를 못 보낸 사이 열심히 감량했던 체중과 키운 체력도 성실하게 유지하지 못한 탓에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요. 이제는 그냥 그 모든 것을 돌파하려 합니다. 만사 뜻대로 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느끼려 해요.

북토크 진행은 추천사를 써주신 신미나 시인께서 해주실 예정입니다. 오시기 전에 시 「이마」를 찾아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싱고,라고 불렀다』에 수록된 한 편인데요. 이후 출간하신 시집과 산문집들도 일독을 권합니다.

꽃 구경하기에도 짧은 봄. 북토크에 못 오셔도 괜찮습니다. 책으로 만나뵙는 길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요. 그럼 더워지기 전에 이다음 레터로 찾아 오겠습니다.


살아 도움닫기 가능한 노래, 함께 듣고 싶어서 두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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