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혼자 있는 휴일이면 라면이 먹고 싶어. 또 이따금 정신없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평일 저녁에는 간장달걀밥이 먹고 싶어. 어릴 때는 그렇게 간단한 메뉴들도 모두 오버쿡을 해버렸지. 면이 푹 퍼지도록 끓인 라면을 냄비째 상에 들고 와서 몇 젓가락 대접에 나눠 덜고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보리차 물을 부어서 간을 맞췄던 거. 완숙의 후라이가 잘 풀리지 않아 되는 대로 간장과 참기름을 뿌리고 숟가락으로 비볐던 거. 동생들도 기억할까.
당시 맞벌이를 하던 엄마 아빠가 집에 돌아오시기 전에 하기 싫은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기 싫어서 동생들에게 사다리 타는 게임하자고 했던 거 생각난다. 동생들아 미안해. 그래도 너희랑 종일 엉망진창으로 있다가 까치발로 설거지 하고, 까치발로 빨래를 널던 거 재밌었어. 그때 그렇게나마 어른으로 살아가는 감각을 조금은 예습한 것 같기도 해. 생각해보면 그때가 제일 어른스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네.
이 이상의 말은 못하겠고, 대체 이건 누굴 향한 반말인가 생각하면서 몇 자라도 더 적어보려는 오월이야. 오월은 정말로 푸르른 걸까. 진한 초록도 오월의 햇살을 강하게 받으면 새순처럼 연둣빛이 되더라. 맞아. 이래서 오월을 좋아했는데. 얼마전에 걷다가 되돌아 온 생각이야. 이제 다시 자랄 방법은 없고 저 정도의 볕을 쐬다가 가을로 겨울로 가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처없이 걸었지.
나 혼자 열심히 잘 살아보려고 외면하던 시간이 한동안 모든 것을 망쳐놨다는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어. 작년 오월은 그랬어. 우리 가족에게도 잘 지은 밥알의 찰기 같은 게 남아 있을까. 언젠가 동생들이 가정을 새로 꾸리게 되면 내가 많이 기뻐서 울지도 모르겠고, 엄마 아빠의 마음은 여전히 다 알기가 어렵고, 이때의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나. 나는 이제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어.
예전과는 다른 책임감을 느껴. 더 이상 내가 살아있는 시간에 짓눌리는 일이 없길 바라. 내가 살아 있는 시간에 살아 있다는 감각을 더하는 것만이 살아가는 이유라고 깨닫는 새로운 오월이야.
추신, 몇 년 전 들렀던 한 카페에서 찍어 둔 은호 어머님의 메모입니다. 메일링 서비스를 하면서 제가 어떤 것에 촉각을 세우는지 알아가는 것 같아요. 특별한 것은 드릴 수 없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을 생색 없이 제자리에 돌려 놓는 그런 문장들을 쓰고 싶어요. 메일에 대한 답장을 주시거나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들 고맙습니다. 읽어만 주셔도 좋고 저는 그냥 여러분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이 메일을 읽고 계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 어려운 일과 시간 속에 있다면 다시 돌아와주실 때까지 저 역시 다음 메일 데리고 꾸준히 돌아오도록 노력할게요.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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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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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半)예술대학 고양이는무엇일과 인생삽질전공 김다연
태그의 #남 이 신경쓰이고 슬퍼요. 명절보다 긴 오월이 더 야속하게 느껴짐미당..
만물박사 김민지
그 야속한 마음 이 댓글에 묻고 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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