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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편집자의 하루

2021.05.04 | 조회 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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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박사 김민지

생활 전공자를 위한 내적 대화 콘텐츠

오탈자 하나에 무너지는 기분을 느끼기 싫어서 몇 번이고 고사했던 직업이 있었다. 잦은 이직 경험에도 편집자가 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한 스스로의 예상을 뒤엎고 현재는 편집자로 근무하고 있다. 

이직 중간 중간에 했던 밥벌이 경험을 하나의 직장으로 포괄했을 때,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은 나에게 열 번째 직장쯤 된다.

재작년 겨울에 출판사로 전직을 했고, 바로 직전 직장에서는 모 출판사의 유일한 온라인 마케터 인력으로 일했다. 업종은 다르지만 그간 겪어 온 일들은 대개 홍보와 마케팅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어디를 가든 나에게 비슷한 바탕을 갖추고 있는지 물어보는 일이 많았다.

약간의 기획력과 센스, 약간의 작문 능력과 편집자적 스킬 등. 나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들이 말하는 '약간'을 비교적 고루고루 갖춘 듯한 사람이었고, 다니던 직장에 회의를 느낄 때마다 스스로 재조립을 감행하며 이직에 성공해왔다. 어떻게 보면 말만 조금씩이지 값싼 만능을 원했던 걸 알고는 있었다. 다만 대부분 만능을 전문가로 인정해주기에는 각박한 남의 사업일 뿐이라는 생각에 빠져들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편집자 재질인데?"

이곳에 와서 마케터로 일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어떻게 일한 걸까 싶을 때가 많다.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앞으로의 인생 중 편집자로 계속 일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될지, 몇 년 뒤 책을 만들고 있을지, 만들고 있다면 어떤 책을 만들게 될 지 알 수 없다.

현재는 단행본이 아닌 잡지를 만들면서 2주에 한 번씩 찾아오는 마감의 루틴을 체득하고 있다. 한 호를 꾸리는 특집 기획안을 작성하는 일부터 원고 청탁, 교정교열과 발송까지. 마감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마감이 시작되는 지독한 돌림노래를 부르는 일에 빠져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어떻게든 음이탈을 내고 도망쳤을 텐데, 아직 이 지독한 마감의 굴레에 빠져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정한 운동성을 가지고 있던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디로든 크게 뻗어갈 거란 예감 때문이다.

최근 일 년 동안 무엇보다 안정적인 생활이 필요했던 것도 이유에 포함된다. 우울과 무기력에 힘입어 내가 가장 크게 척질 수 있는 것이 보편적인 일상이기 때문에 출퇴근만은 힘들어도 어떻게든 반복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규범 표기가 어떻게 돼요?"

"우리 출판사 표기로는 그렇게 표기하는 게 맞아요."

"헷갈리면 필자한테 문의하는 게 가장 빠르고 정확해요."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팀장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이전까지 나는 이러한 지도 편달이 나에게 어떤 안도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 뭐든 혼자 해나간다는 생각에 갇혀 있었던 지난날.

편집일을 시작할 무렵 나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일상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일상 속에서 나를 의심하고, 남들이 문장으로 닦아 놓은 길들을 침착하게 걸어보는 일은 회복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같았다.

작은 글자 하나 하나에 기대서 살기 싫다는 생각도 살아야 한다는 강박도 잊을 수 있어서 감사한 매일이다.

비 오는 오월의 퇴근길 버스에서
비 오는 오월의 퇴근길 버스에서

추신, 마케터로서의 경력을 십분 발휘하려면 지금 이 시간대에 메일을 보내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그냥 제멋대로 해보는 밤입니다. 더불어 편집자도 간혹 실수합니다. 밥그릇이 날아가지 않도록 매일 노력하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실수를 한다는 걸 순간순간 깨닫고 자괴감에 빠집니다. 지난번 나무와의 인터뷰 메일에서도 오탈자를 발견했는데요. 그래도 이 뉴스레터는 포기 않고 가겠습니다. 인생도 그렇게 이끌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요. 다들 마음 푸르른 어린이날 보내셔요. 

● 만물박사 김민지의 뉴스레터는 구독자 여러분의 긴장성 두통, 과민성 방광 및 대장 증후군 치유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텍스트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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